# 45화
염려와는 달리 무사히 축제 당일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학교를 그만둘 기세로 말하던 라디트는 의외로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은 채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가끔 나에게 와서 투덜거리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던 축제 당일인 것만큼 교내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이 축제만을 위해 준비했다는 말만큼 화려하게 바뀐 교내는 제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든 아이들의 몸가짐을 까탈스럽게 여기는 시간. 약간의 틈만 보여도 평소의 배로 혼을 내는 이들 덕분에 자율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라디트와 단둘이 만나는 시간도 줄어들자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웬 한숨?”
옆에서 같이 준비하던 아이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오자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착적이던 라디트의 과잉 행동이 멈추었고, 덕분에 밥도 주기적으로 섭취할 수 있었다. 모든 것들이 너무 내가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운이 좋단 말이야. 김첨지의 마음이 된 것 같은 심란함에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한숨이 나왔다.
“긴장해서 그래?”
“응.”
별다른 핑계를 대지 않아도 알아서 잘 맞춰 주는 그녀의 말에 재빠르게 응해 주었다. 적당한 구실과 대답이 들어가자 그녀의 얼굴엔 다정한 빛이 퍼뜩하고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하던 대로 하면 잘 될 거야.”
“그렇겠지?”
“그럼. 여태까지 한 연습이 있는걸.”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얼굴은 참으로 순진무구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그래.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고마워.”
그녀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이곤 다시 앞을 향해 고갤 돌렸다. 그래, 괜찮을 거야. 아이를 향해 말했던 말을 똑같이 되뇌듯 자신에게 되풀이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준비는 다 되었나요?”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이의 등장이 소란스러운 안을 단박에 조용하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이목이 나쁘지 않은 것인지 우리를 부르는 이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자리잡혔다.
“다들 여태까지 준비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단, 실수해선 안 돼요.”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느낌이 얼마 만일까. 어렸을 때 학교에서 진행하던 학예회에 참여하는 느낌이었다. 살짝 설레기까지 하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대륙의 높으신 분들도 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들의 진가를 마음껏 뽐내세요.”
그녀가 이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던 것인지 멈추었던 잡담이 다시 시작되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들 사이에 몇몇 아이들은 흥분감을 이기지 못하고 제 뺨을 붉게 물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잘하면 자신이 눈에 띌 수도 있다는 이야기. 웅성거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같았다. 자신이 여태까지 했던 모든 것들을 발휘해 최고로 눈에 띄는 것.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목표와도 같았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그녀 또한 양 뺨이 살짝 상기된 채 확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언뜻 보이는 표정에서 결연함마저 보이는 것을 느끼고 불안한 한숨을 쉬었다.
만약 내 목표가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야기가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이곳에서 먹고, 자고, 등 따시게 자는 것 외에는 바라는 건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몰매를 맞을지도 몰랐지만, 성녀엔 관심조차 없었다.
‘아.’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설마. 아닐 거야. 이런 후미진 곳의 축제를 누가 보러 온다고.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 번 치켜든 불안함은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저…….”
긴장감과 걱정. 그리고 열띤 방안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혹시.”
없기를 바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 나라의 폐하께서도 참관하시나요?”
“당연한 소리를. 신의 소리를 듣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참관 안 하실 이유가 없지 않나요?”
망했다.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유난스레 나한테 좋은 일들만 일어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처참하게 표정을 무너트리는 나완 상반되게 방 안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고조되어 가는 환호성 사이로 나는 양 뺨을 감싸 쥐었다.
테이젤. 에드아르.
잊고 있었던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쉬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제 입술을 짓누르며 사방으로 고갤 돌렸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유일한 탈출구는 이미 들어온 이가 든든하게 버티며 지키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핑계를 댄다고 하더라도 이 옷차림을 하고 복도를 걷는 건 엄청난 이목이 집중될 터였다.
완벽하게 그들에게서 탈출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아프다고 뻥을 쳐 볼까 싶다가도 이내 주변 상황을 보고 포기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쌩쌩하던 애가 이제 와서 아프다고 말한다고 한들 믿어 줄 이 하나 없을 것 같았다.
‘이럴 때 라디트라도 있었으면.’
참으로 변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없길 바랐던 이를 다시 찾는 제 속물적인 마음에 눈물을 훔쳤다. 뭐 어떻게 해. 테이젤과 에드아르를 상대하느니 한 명인 라디트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심적으로 편했다.
될 대로 되라지.
옛날의 일이 어떻게 되었든, 지금 자신은 이곳에 묶여 있는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꽤나 고귀한 취급을 받고 있지 않는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뭣하면 그들한테 방패가 되어 달라고 하고 뒤에 숨으면 되는 거고.
다행히 내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이들은 없었다. 라디트나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없어서도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나를 보는 것보단 앞서 보일 이들에 대해 점수를 한 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서 분주하게 준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곧 무대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우리를 진두지휘하던 사제 말고도 한 명이 더 들어오는 순간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한데 모였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모든 이야기의 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누구 하나 쉬이 입을 놀리는 이가 없었다.
나만 빼고. 희망에 차 앞만 보는 이들과는 달리 나는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 가만히 있질 못했다.
괜찮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망상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에드아르나 테이젤 둘 중 한 명을 만나거나, 혹은 최악의 상황으로 둘 다 만나는 상상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제대로 생각조차 못 한 채 상황은 재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 순서대로 선 이들의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낀 채로 그들의 대열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미안해, 라디트 돌아와! 너랑 같이 도망갈게!
열심히 속으로 외쳤지만 어리석은 라디트는 황금 같은 기회를 알아채지 못하고 나타나질 않았다. 단단히 삐졌을 거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알 게 뭐냐, 나는 고갤 단호하게 저었다. 지금은 삐진 라디트를 달래는 맘 편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두웠던 대기실에서 점점 밝아지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세상을 덮어 버릴 것처럼 커다랗게 쳐져 있는 커튼 뒤로 대열을 맞추자 여태껏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살짝 떨렸다.
“별거 없어요, 여러분. 그저 여태까지 연습했던 것들을 잊지 않고 마음껏 뽐내면 되는 겁니다.”
말이야 쉽지. 그걸 하기 위해선 긴장을 하지 않아야 했다. 평소의 나 같았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제 옆에 파트너가 와 준비 자세를 취하더라도 전혀 집중을 하지 못했다.
“곧 시작합니다!”
시작을 알리는 이의 말과 함께 육중한 무게를 자랑할 것 같던 커튼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곳을 환하게 일깨워 주는 밝은 불빛에 순간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커튼이 완전히 걷히고 눈앞의 밝은 빛에 천천히 적응이 되는 순간 우리를 쳐다보는 수백, 수천만의 눈동자에 압도당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작게 웅성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수많은 연습을 통하여 자리를 잡은 난//잡고 파트너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아주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꽂힌 것은. 오랫동안 듣지 않았지만 잊을 수 없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제발 아니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제 귓가에 다시 한 번 더 정확하게 들려왔다.
“비시아!”
미친. 안타깝게도 내 귀가 멀어 버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예 자리에서까지 몸소 일어나시는 덕분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향했기 때문이었다.
아, 안 들린다. 안 들려. 애써 무시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모두가 고개를 그를 향해 돌릴 때 나 혼자만 반대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비시아, 네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데?”
아, 묻지 마. 눈치 없이 끼어드는 옆자리 친구를 향해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그런데 저분께서 어떻게 네 이름을 알아?”
“동명이인 아닐까?”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말한 이름인데 어딘가에는 하나쯤 있지 않을까. 제발 내 이름이 흔하디흔하길 바라며 그녀의 말을 한사코 부정했다.
“그치만 널 빤히 보고 있는데.”
“생김새도 비슷했나 보지.”
“두 분이나?”
젠장. 최악의 상황만 오지 말라고 빌었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덕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차마 눈으로 확인할 용기가 나질 않아 보진 않았지만, 두 명이라는 소리에 직감할 수 있었다. 애초에 테이젤과 에드아르, 그 두 사람 외에 자신을 찾을 사람도 없었다.
잠깐의 소란과 함께 웅성이긴 했지만 곧 시작되는 노랫소리가 혼란스러운 소리를 잠식시켰다. 귀찮기만 했던 춤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음률에 맞춰 몸을 흔드는 시간에 이렇게까지 해방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끝내고 싶지 않았다. 춤이 끝나고 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기타 외 등등 신님. 제발, 제발 이대로 시간이 영원하게 해 주세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춤만 추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꿈만 같던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어느덧 음악의 막바지가 다가가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른 이후로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걸로 보아선 그들 또한 이 공연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칠까.’
편하고 정들었던 곳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찾기 힘들 것 같았다. 그 둘의 손에 붙잡혀 문책을 당할 바에야 다시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끝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던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휘장이 닫혔다.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어두워지는 시야에 차례대로 나가야 한다는 순서마저 까먹고 발걸음을 바삐 했다. 공연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그들 측에서 움직이는 것 또한 슬슬 시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한 수 먼저여야 했다. 그들이 구실을 만들어 움직이기 전에, 그리고 나를 찾기 전에 이곳에서 난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목표였다.
도망치자.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