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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사부인 (74/114)


74화 사부인
2023.04.16.


좁고 울퉁불퉁한 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왔던 길을 돌아보자 성냥갑 같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경악에 찬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현아가 투덜거렸다.


“여기 뭐야? 서울에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마찬가지로 하이힐을 신고 힘겹게 경사를 오르는 선영은 투덜거릴 기운도 없었다.


“표 비서. 아직 멀었어?”

헐떡거리며 묻자 길 안내를 위해 앞서 걷던 표 비서가 멈춰 서서 비탈의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 왔습니다. 이사장님. 저기까지 올라가서 모퉁이만 돌면 바로 나옵니다.”

칭얼거리는 현아를 어르고 달래 겨우겨우 비탈을 올라 평지로 접어들자 갈림길이 나타났다.


“표 비서. 여기가 맞아?”

낯선 곳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선영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비서가 또 한 번 손가락으로 갈림길의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십니까.”

표 비서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건 「원조 파전」이라고 쓰인 삐뚤게 걸린 간판이었다.

하필 멈춰 선 곳에 있는 전봇대를 발견한 현아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코를 틀어쥐었다.

공중화장실에서나 맡아 본 냄새가 어디선가 스멀스멀 밀려들고, 길고양이들이 뜯어 놓은 음식물 쓰레기는 사방에 널린 채 파리떼를 꼬여 대고 있었다.


“어우, 냄새. 엄마!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정말 그 이상한 여자랑 손을 잡겠다고?”

“그럼 너 정혁이 포기할 수 있어?”

“뭐어? 미쳤어?”

현아가 펄쩍 뛰었다.


“그럼 별수 없잖아! 그리고 손을 잡긴 누가 손을 잡아? 그냥 이용하는 거지. 엄마가 뭐랬어? 손에 직접 피 묻히는 거 아니라고 했어, 안 했어? 잔말 말고 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

단호하게 말한 선영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 뒤 「원조 파전」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현아는 눈알만 굴려 낡은 파전집 내부를 경계하듯 훑었다.

쿰쿰한 하수구의 악취와 기름 찐 내, 어째선지 끈적끈적한 테이블 표면의 감촉들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왠지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라 현아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듯 잘게 몸을 떨었다.

통 적응을 못 하는 현아와 달리 선영은 낯선 환경을 제법 잘 견디고 있었다. 작위적이고 우아한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그녀는 맞은편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성자는 이곳과 영 어울리지 않는 손님들을 향해 미심쩍은 눈초리를 빛내고 있었다.


“이런 데 올 사람들이 아닌데? 어디서 오신 분들이래?”

대략적인 탐색을 끝내고 성자가 물었다. 그러자 선영의 입가에 맺힌 살가운 미소가 한결 진해졌다.


“만나서 반가워요, 사부인. 나 정혁이 장모 될 사람이에요.”

“지금, 사부인……이라고 했어요?”

무슨 상황인지 몰라 성자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선영이 테이블 밑으로 현아의 허벅지를 콕 찔렀다.

마냥 짜증스러워 죽상을 짓던 현아는 선영의 등쌀에 치여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어, 어머니.”

짧은 단어가 현아의 입을 통해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태어나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결코 부를 일 없다 믿은 단어를 뱉자니, 뒷덜미로 솜털이 곤두섰다.

뭣보다 ‘어머니’란 여자의 꼬락서니 좀 보라지. 빠글빠글 촌스러운 헤어스타일과 목이 다 늘어난 후줄근한 옷차림이라니. 승훈이 보여 주었던 사진 속 여자와 너무 똑같아 소름이 일었다.


“어, 어머니……? 아가씨, 지금 나더러 어머니라고 했어요?”

“정혁 오빠 어머니시잖아요……. 오빠랑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저한테도 당연히 어머니시죠.”

성자는 어안이 벙벙해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언제고 때가 되면 아들도 장가를 들 거란 생각은 했었다. 혼주 자리에 앉는 건 꿈도 꾸지 않는다. 박 회장 그 노인의 서슬이 시퍼런데, 언감생심 식장에 얼굴을 비치는 것조차 기대한 적 없더랬다.

게다가 아들한테도 어미 취급을 못 받는 처지였다. 처가에서 사돈 대우를 받긴커녕 며느리한테 시어머니 소리 한번 들을 일이 없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뻑적지근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사부인이라 부르고 고운 아가씨가 어머니 소릴 하니, 어째 기분이 째지게 좋았다.


“아유, 이게 다 무슨 소린지……. 그러니까 아가씨가 내 아들이랑 결혼하기로 했다고요?”

“네……. 그런데 흐으윽! 어머니, 저 어쩌면 좋아요? 흡!”

말문을 열다 말고 현아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깨까지 떨며 흐느끼는 모습에 당황한 성자가 현아를 사근사근 다독였다.


“아가씨, 왜 그래? 울지만 말고 말을 좀 해 봐. 응?”

머지않아 자초지종을 듣게 된 성자는 몹시도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 그래서 우리 아들이 그 X한테 홀딱 넘어갔다 그거예요?”

“그 여자 얼굴만 순진하지 보통 찰거머리가 아니에요. 오빠가 누군지 알고 계획적으로 접근해서 임신까지 한 무서운 여자라고요. 오빠 아이를 낳아 몰래 기르고 있던 이유가 뭐겠어요? 아이 빌미로 나중에 한몫 단단히 뜯어내려는 수작 아니겠어요?”

“아이고, 세상에! 그런 여우 같은 X을 봤나!”

성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흑, 어머니, 저 정말 속상해요. 가을에 오빠랑 약혼하기로 했는데, 그 여자가 다 망쳐 버렸어요.”

언제 안 내켰냐는 듯 현아가 눈시울을 찍어 가며 하소연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성자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아이고, 아가씨. 울지 말아요. 속상해서 어째?”

그러자 젖은 눈을 흔들던 현아가 제 손을 쥔 성자의 손을 꼭 맞쥐며 사근사근 참하게 말했다.


“어머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 어머니 며느리잖아요.”

“아유, 그래도 되려나? 그럼…… 새아가 울지 말아라.”

두 사람은 애틋한 눈빛을 나누었다. 선영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부인도 아시잖아요. 우리 차 서방이 얼마나 듬직하고 책임감이 강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애를 볼모로 차 서방 발목을 잡고 있으니까, 어쩌지 못하고 휘둘리는 거죠.”

“알지요. 알다마다요.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정혁이가 지 아부지 닮아서 잘나기만 한 게 아니라 책임감도 얼마나 강한지 몰라요.”

“어머니, 저 어떡해요? 정말 속상해요. 흑.”

“아이고, 우리 며느리 가엾어서 어쩌나. 이 여우 같은 X! 내 가만두나 봐라. 아가, 걱정 말아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 우리 정혁이한테서 고년을 똑 떼어 내 버릴 테니까. 응?”

생각대로 일이 잘 흘러가는 듯해 선영은 한시름 놓았다.

박 회장도 피를 안 보려 하는데, 저와 제 딸 손에 피를 묻힐 순 없는 일이다. 섣불리 나섰다가 정혁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현아만 미운털이 하나 더 박힐 텐데, 누구 좋자고.

보아하니 나성자는 이번 일의 적임자로 딱이었다.

관계도 확실하니 나설 명분도 충분해 의심을 살 일도 없고, 적극적이기까지 해 한번 써먹고 버리기 좋은 패였다.

기회를 보던 선영이 준비한 물건을 넌지시 꺼내 놓았다.


“사부인. 그간 인사드릴 기회도 없고 해서 준비해 봤어요.”

커다란 쇼핑백 안에 담긴 명품 핸드백을 보며 성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고, 세상에……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

“뭐 어때요? 그래도 우리 차 서방 어머니신데, 어디 다니실 때 힘은 좀 주셔야죠.”

선영이 입에 발린 말을 하며 명품 핸드백의 입구를 벌려 보였다. 그 안에 가득 담긴 현금다발 뭉치를 보며 성자의 입꼬리가 활짝 미끄러졌다.


“우리 안사돈, 성격도 시원시원하시지. 얘, 새아가. 이 시애미만 믿고 기다려라. 여우 같은 것들 정리하는 게 내 특기니까. 호호호.”

 

 

* * *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밤 9시를 훌쩍 넘겨서였다.

욕실로 들어가 하루의 땀과 먼지를 개운하게 씻고 나온 도준은 갈증을 느끼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 들이켜는 그의 눈이 문득 빈 책장과 그 앞에 쌓인 상자에 고정되었다. 독립한 뒤 한 달이 넘도록 풀지 않은 책 상자였다.

처음엔 책장이 없어 정리하지 못했고 책장이 마련된 후에는 정신없이 바빠 그대로 방치한 상자들이 대여섯 개나 되었다.

아, 하고 탄식한 도준은 잠시 고민했다. 만사가 귀찮은데, 해야 하나. 미뤄 뒀다가 내킬 때 할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지친 몸의 투정을 무시하고 책장 앞으로 상자를 끌고 왔다.

묵직한 전문 서적들로 책장의 아래 칸을 채우고 위 칸에는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해 온 피규어를 차곡차곡 진열해 나갔다.

대강 물건들을 늘어놓고 마지막으로 다크블랙 피규어를 신줏단지처럼 소중히 들어 올렸다.

이게 처음 출시되었을 때 판매가는 대략 20만 원대 중반. 그런데 지금은 프리미엄이 붙어 그 열 배에 거래되고 있었다.

악당은 인기가 없을 거라는 판단 착오로 전 세계에 딱 천 개밖에 없는 레어템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도준은 다크블랙 피규어를 가지고 침대로 와 몸을 파묻었다. 이걸 보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곰곰 생각하던 그는 휴대폰 창을 열었다. 몇 개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지만, 모두 일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지난 몇 주간의 패턴과는 확연히 달랐다.

수경과는 주로 주말에 데이트를 했고, 약속은 금요일에 연락해 잡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주도하는 쪽은 언제나 수경이었다.

도준은 시간을 보았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벌써 밤 10시 반을 넘긴 시각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선 왜 연락이 없는 걸까.

도준의 눈길이 옷방 문고리로 향했다. 수경이 선물한 정장이 쇼핑백째 문고리에 걸려 있었다.

고가의 선물을 받고 부담스럽다고 한 것치고 풀어 보지도 않은 무성의함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째선지 뒤숭숭한 얼굴로 한숨을 몰아쉰 도준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먼저 메시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도준은 이런 게 영 익숙지 않았다. 지금껏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후회하며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무슨 핑계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고민하던 그의 눈에 다크블랙 피규어가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연락할 핑계가 아주 없지도 않은 것 같다.

도준은 곧장 메시지를 입력했다.


「이수경 씨. 다크블랙 한정판 피규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쿨하게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야 도준은 제 한심함이 기가 차서 헛숨을 뱉었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각에 여자에게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 다크블랙 한정판 피규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하고 싶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째깍째깍.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도 더해갔다.

딩동!

마침내 그녀에게 답장이 왔을 때 휴대폰을 열어 보는 속도는 번개보다 빨랐다.


「좋다고 생각해요.」

도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의미로 좋다는 걸까.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결론을 내리고 답장을 입력했다.


「잘됐네요. 수경 씨 드릴게요.」

「다크블랙 한정판 피규어를요?」

「네, 집에 굴러다니는 게 있거든요.」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다크블랙 한정판 피규어가 집에 굴러다니다니. 하여간 귀엽다. 권도준은 자기가 귀엽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테지만.

도준과 문자를 주고받은 뒤 바텐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은 수경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미안해요, 급한 연락이라서요.”

그녀가 새침한 투로 사과하자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예의상 살짝 웃어 보인 수경은 온더록스 잔을 쥐어 입술로 기울이며 앞에 놓인 제안서를 마저 넘겨 보았다. 비즈니스 때문에 한적한 바에서 술자리를 갖는 중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내용 검토를 마친 수경이 의문을 표했다.


“근데 이런 기밀을 저한테 막 보여 주고 그래도 되는 거예요?”

남자는 진중하게 대답했다.


“구체적인 제안서를 보여 주지 않으면 일을 안 맡으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못마땅하게 눈가를 구긴 수경이 ‘아, 짜증 나.’라며 탄식했다. 그 인간은 다 짜증 나는 데 제일 짜증 나는 게 이런 거다. 수경을 너무 잘 안다는 것.

어쨌거나 수경은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제안서와 관계없이 어차피 거절했을 거예요. 당분간 이대로 놀고먹을 생각이거든요. 어쩌면 쭉 놀고먹을 수도 있고요.”

“이런,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아직 젊은 분이 능력을 낭비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짐작도 못 하셨겠지만, 제 꿈이 현모양처거든요.”

“아…….”

“그래서 결혼하려고요. 좋은 남자도 벌써 찾아 놨어요.”

 

 

* * *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더니 벌써 유치원 앞이 버글버글했다.

멀찌감치서 뒷짐을 쥐고 선 정혁이 현관으로 눈길을 던졌다. 목을 빼고 보자 유시우가 현관 앞에 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유시우.”

“어?”

제 이름이 불리자 반짝 눈을 키운 시우가 입도 동그랗게 벌렸다. 그러곤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오도도 달려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예의 바르게 꾸뻑 배꼽 인사까지 한 뒤 시우가 저를 안으라며 팔을 뻗는다. 그 당당함에 정혁은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는 이런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시우를 팔에 안고 일어나자 묵직했다. 며칠 못 봤다고 그새 조금 더 자란 것 같았다.

고개를 기울여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말간 뺨을 톡 건드리자 또랑또랑한 눈이 휙 돌더니 초승달처럼 수줍게 접혔다.

흐뭇하게 마주 웃던 정혁은 연한 머리칼에 코를 문질렀다. 보드라운 냄새가 났다.


“어……? 엄마는요!”

“지금 엄마한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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