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휘영청 달 밝은 밤 (73/114)


73화 휘영청 달 밝은 밤
2023.04.13.



 
다정은 잠시 얼떨떨하게 굳어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이곳에 왔다는 뜻일까?

고개를 갸웃한 다정의 눈길이 먼발치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고추밭 너머로 흐릿한 전조등 불빛이 보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설마 싶었지만, 다분히 돌발적인 데가 있는 남자라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정혁 씨, 지금 여기 와 있다는…….”

다정이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또다시 부아아앙! 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이 정도면 확실했다. TV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안방을 흘깃 돌아본 다정이 작게 소리쳤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이러다 동네 사람들 다 깨겠어요!”

특히 정애가 깨면 곤란해지는 건 다정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다정이 곤란해지는 상황을 즐기는 모양이지만.

다정은 냉큼 대청 아래로 내려가 신을 꿰어 신었다. 그리고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다시 한번 안방 쪽을 흘깃 돌아보며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예전엔 부모 몰래 연애질을 하고 다니는 딸을 잡아다가 머리를 죄 깎아 놓기도 했다던데, 그런 걸 보면 부모에게 딸들의 연애란 무작정 나쁜 모양이다. 이렇게 제 발이 저린 걸 보면.

다정은 유난히 달 밝은 밤의 담벼락을 따라 빠르게 걸으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차정혁 씨. 지금 어딘데요?”

『몰라, 내비게이션 따라왔더니, 이상한 공터에 데려다 놓고 다 왔다잖아.』

“주변에 보이는 거 말해 봐요.”

『아무것도 안 보여, 엄청 시커메서……. 아, 앞에 큰 나무 있어.』

“느티나무요?”

『모르지. 암튼 되게 무섭게 생겼어. 뭐 나올 것 같아.』

“알았어요. 금방 갈 테니까 끊어요.”

『끊지 마. 무서워.』

진심이 아니라기엔 너무 간절한 투라 다정은 찌푸려 웃었다.


“다 큰 어른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진짜야. 나무에서 막 이상한 소리 나.』

말을 하면서도 주변을 두리번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이상한 소리요? 무슨 소리요?”

『음…… 후꾸?』

“후꾸요……?”

『몰라. 암튼 계속 후꾸후꾸, 그래.』

뒤룩 눈을 굴린 다정은 이번에야말로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마 올빼미 울음소리를 듣고 그러는 모양인데, 마치 방학 때 시골집에 놀러 와 이것저것 까탈을 부리는 서울 사는 남자애 같았다.

겁 많은 남자를 외면하지 못한 채 느티나무를 향해 바삐 걷자니 시골 마을에서 보기 드문 희끄무레한 자동차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모시고 온 차는 지난번 샛노란 개나리색 슈퍼카에 비해 조금 더 납작한 생김새였다. 당연히 더 부끄러웠다.

저런 걸 끌고 와도 이 시골에선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자동차 전시장에 서 있는 것처럼 공터 중앙에서 느티나무를 향해 쌍라이트를 번쩍거리고 있는 게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여하튼 저 남자도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돈 자랑을 즐기는 면이 있었다.

다정을 발견했는지 운전석 창문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다정은 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귀에서 휴대폰을 떼며 천천히 차를 향해 걸어갔다.

이곳까지 올 때는 그리도 발길을 서둘렀었는데, 막상 마주치고 보니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게 수줍게 느껴졌다.

다정이 운전석 쪽으로 다가서자 그가 좁고 긴 차창 밖으로 팔꿈치를 걸었다. 그러곤 힘겹게 목을 꺾어 눈을 맞추었다.


“아가씨, 예쁜데? 탈래?”

날라리처럼 추파를 던지곤 까딱 턱짓까지 해 보이는데 되게 느끼했다. 오글거림에 치를 떨던 다정은 운전석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뻗어 온 손이 다정의 뒷머리를 감싸곤 쪽, 하고 입술을 부딪치고 도로 멀어졌다. 다정의 눈이 놀라 땡그래졌다.


“뭐예요? 갑자기.”

“만나면 반가우니까.”

그가 피식 나른하게 웃으며 시트에 머리를 기대었다. 다정도 어쩌지 못하고 웃었다. 도무지 좋은 기색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유다정이 보고 싶댔잖아. 어떡해, 와야지.”

“치, 그 말 하자마자 순간이동이라도 했다고요?”

“몰랐어? 이 차가 괜히 비싼 게 아니거든.”

베이지색 가죽 커버를 씌운 핸들을 기특하단 듯이 어루만지며 정혁이 우쭐하게 입꼬리를 미끄러트렸다.

이 봐. 은근히 즐긴다니까.

조금 얄미워진 다정은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허리를 더 깊게 숙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거리가 좁혀지자, 다시 한번 입술이 쪽 닿았다 떨어졌다.

그의 눈빛이 휘영청 밝은 달빛을 머금고 더 그윽하게 반짝였다.


“유시우는?”

“재웠어요.”

고개를 주억거린 정혁은 시골 밤의 정취를 사뭇 경계하는 태도로 슥 훑었다.


“그런데, 장모, 아니 유시우 할머니는 이런 데 살아?”

“이런 데가 어때서요?”

“아니, 그냥…….”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왜 그런지 알 만했다. 다정은 쿡쿡 웃었다.


“그래서 차정혁 씨는 내가 보고 싶어서 이 비싼 차를 끌고 굳이 이 밤에 여기까지 오셨다?”

“내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유다정이 보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왔다니까.”

선심 쓰듯 지껄이는 얼굴은 더 얄미웠다. 다정은 새초롬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차정혁 씨 혼자 온 거 아니에요?”

“혼자 왔지.”

“그럼 뒤에 탄 여자는 누구예요?”

“…….”

다정이 운전석 뒤를 좀 보란 듯이 눈짓했다. 그 순간 정혁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유다정…… 하지 마.”

그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차정혁 씨 뒤에, 하얀 옷 입고 머리 긴 여자 타고 있잖아요.”

“하, 하지 마…….”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버린 정혁의 동공이 극심하게 흔들렸다. 오싹하게 밀려드는 한기에 등줄기가 서걱서걱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봐요, 지금 차정혁 씨 보면서 씨익 웃고 있잖아요. 잘생긴 남자 엄청 좋아하나 봐.”

“유다정…….”

“어후, 립스틱은 또 몇 호야? 입술 되게 빨개.”

“하, 하지 말라고!”

비명처럼 외친 정혁이 냅다 차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질린 채였다.

파다닥 차를 박차고 나온 그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다정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곤 그녀의 팔꿈치를 꼭 끌어안고 뒷좌석을 살피지만, 당연히 귀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코미디 같은 장면을 목격한 다정은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맨날 놀림만 당하다가 이렇게 놀려 먹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뒤늦게야 긴장이 꺾인 정혁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유다정, 웃지 마.”

“이럴 줄 알았어. 차정혁 씨 귀신 무서워하죠?”

“아니야!”

정혁은 짧고 단호하며 강하게 부인했다.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요?”

“있는지 없는지 유다정이 봤어?”

“완전 겁쟁이네.”

겁쟁이라는 말에 정혁은 피식피식 실소를 흘렸다. 몹시 창백한 얼굴로.


“나 남자라고.”

“네네. 남자는 남자죠. 겁쟁이 남자.”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는다. 남자 자존심에 제법 상처를 받은 눈치라 다정은 얼른 그의 팔에 제 팔을 얽고 위로했다.


“괜찮아요. 남자는 사람 아닌가? 무서울 수도 있지 뭐. 나한텐 무서우면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무섭다고 말하면 유다정이 안아 주나?”

“네?”

“나 귀신 무서워. 그러니까 유다정이 안아 줘.”

응석을 부리며 그가 다정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저런, 쯧쯧. 다정은 아장아장 몸을 흔드는 그의 머리를 측은하게 쓰다듬었다.


“늦었어. 들어가.”

그가 말했다. 다정을 꽉 안고 놓지 않은 채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게 너무 여실해서 다정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러면서 어떻게 가라는 거예요?”

“그러네. 어서 들어가.”

다정을 놓고 순순히 물러난 정혁이 홀연히 돌아섰다. 그런 그의 옷자락을 다정이 황급히 붙잡았다.


“간다고요?”

“왜? 그냥 간다니까 아쉬워?”

“…….”

침묵이 길어지자 정혁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떴다.


“유다정, 은근히 밝혀.”

“누, 누가요?”

다정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 뺨을 커다란 손이 감싸 왔다. 그러곤 선심 쓰듯 말했다.


“딱 1분만 해 줄 거야.”

휘영청 달 밝은 밤. 올빼미 울어 대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가 달빛 머금은 입술을 살그머니 깨물어 왔다.


 

* * *

수풀이 우거진 가운데 우아한 레이스 장갑이 도드라졌다.

싹둑, 신중히 고민하는 것과 달리 가지를 전지해 나가는 손길은 냉정하고 거침이 없었다.

다소곳이 소파를 지키던 선영은 제 앞에 놓인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도 대지 않은 차는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노인의 손에서 잎과 가지가 댕강댕강 잘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선영은 초조한 손마디만 주물러 댔다.

정혁과 결혼이 어그러진 일로 현아는 심신이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괜찮아 보이다가도 언제 어디서 불쑥 사고를 칠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현아는 과도한 심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친 난폭성을 드러내곤 했다. 문제는 증상이 심해지면 자해와 자살 시도로까지 이어진다는 거다.

불과 며칠 전 오피스텔에서 친 사고도 그랬다. 그것들 역시 언제 일어날지 모를 지진의 전조증상으로 봐도 좋을 거였다.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현아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이던가. 현아는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집도 부유해서 교우관계도 좋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일어났다.

현아가 첩의 딸이란 소문이 온 학교에 파다하게 퍼졌다. 최초에 누구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인지 출처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오철중 회장이 두 집 살림을 하던 때라 현아는 아빠가 잦은 해외 출장 때문에 집을 자주 비우는 줄로만 알았더랬다.

따돌림이 시작되었고, 학부모와 친구 가릴 것 없이 현아를 두고 노골적으로 수군거렸다.

그때부터 현아는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정서적 불안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고, 감당 못 할 상황과 맞닥뜨리면 난폭하게 돌변했으며 한계에 이르면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현아가 중학생 무렵. 자잘한 사고를 치다가 종국엔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살소동까지 빚자 오철중 회장은 자신의 딸을 가차 없이 정신병원에 가둬 버리고 만다.

집에 가고 싶다는 현아의 절규에 선영은 병이 나아야만 나올 수 있으니 열심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눈물로 딸을 설득했다.

그 말을 들은 현아는 선영의 말대로 치료에 전념했고, 빠른 차도를 보였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선영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아의 증상은 나아진 게 아니라, 그저 나은 척을 했을 뿐이란 걸.

자신이 불안과 우울감을 드러내면 다시 병원으로 보내질 거란 사실을 잘 알기에 현아는 그것들을 감추기 위해 외부의 자극에 억지스럽게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현아가 뭔가에 의욕을 갖게끔 동기를 부여한 이가 바로 정혁이었다.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현아에게 없던 인내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노력과 시간이 다 무상해질 위기에 처했으니, 자칫했다간 명한의 안주인이고 자시고 딸애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끼쳤다.

내 딸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영은 납죽 엎드렸다.


“회장님, 우리 현아 좀 살려 주세요.”

뜬금없는 소리가 우스워 박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네 딸을 죽인다더냐? 왜 내게 와서 목숨 구걸이야?”

“우리 현아. 차 전무 없으면 못 살아요. 회장님.”

박 회장은 한숨만 삼켰다. 현아가 죽든 살든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다만 손자가 으름을 놓고 간 게 마음에 걸렸다.

박 회장은 원래 겁이 없는 성정이었다. 아들도 내쳤는데, 손자라고 못 내칠까. 근데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게 아니다. 아들을 내쳐 보니, 손자만은 도무지 내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일 당장 흙에 묻혀도 아쉽지 않을 나이. 도리어 하나뿐인 손자에게 미움을 살까 겁이 났다.

한데 녀석은 도무지 말을 들을 기미가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자니 가당치도 않고. 어쩐다.


“회장님, 제발 우리 현아 좀 살려 주세요. 네?”

선영의 애원에 전지용 가위가 멀쩡한 가지를 뚝 잘라 냈다. 바닥에 툭 떨어진 파릇파릇한 가지를 바라보던 박 회장이 짜증스레 눈길을 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 손자한테 애가 있다잖니.”

“네??”

“내 손자한테 허물이 있는데, 네 딸과 맺어 줄 순 없지. 하니 결혼 얘긴 없던 걸로 해.”

노인이 어울리지 않게 몸을 낮추고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굽히고 들어오면 결국 상대는 설설 길 수밖에 없다.

저를 떠보려는 수작에 선영은 이를 갈았다. 어쩌랴. 원하는 걸 얻으려면 납작 엎드려 쓰임을 다 해 줄 수밖에.


“아뇨, 회장님. 정혁이 아이, 현아가 제 자식처럼 잘 키울 수 있다고 했어요. 저한테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요.”

“그럼 아이를 데려오든가. 아이만 데려오면 정혁이 놈 마음은 자연히 그쪽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어.”

“……네. 그래야죠. 아이 데려올게요. 데려올 수 있어요.”

“난 모르는 일이니, 재주껏 해 보든가.”

애매하게 말하고 돌아선 박 회장은 홀가분한 한숨을 지었다.

일단 어디까지 손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지, 해 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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