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91화 (291/303)

291화 #52 – 진가가 발휘되면 (4)

팬 미팅 날짜가 잡힌 후.

지체할 것 없이 팬 미팅 준비에 돌입했다.

팬 미팅이라는 게, 팬들과 만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팬과 얼굴만 보며 소통할 것은 아니니까.

가수들은 팬들을 만나 자신들의 곡으로 공연을 하는 게 보편적이다.

뭐, 그런 걸 보고 팬 미팅이 아니라 콘서트라고 하기도 하지.

하지만 배우들은 팬 미팅에서 팬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

앞에서 자신이 펼쳤던 연기를 할 것도 아니고, 연기로 장기를 펼칠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배우들은 팬 미팅에서 주로 하는 게 노래나 춤이었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 특별하게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지.

그래서 다른 방송이나 매체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들을 준비하는 편이다.

나는 평소 예능 프로그램이나 라디오에도 많이 출연하지 않았었고.

그렇기에 팬들에게 드라마나 영화 외에 다른 방송에서 나를 보여준 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팬들을 향해 특별한 무대를 준비하고 싶었다.

내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것들.

“형, 나 팬 미팅 때, 노래할까?”

내 말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희성이 너 노래 잘하잖아. 노래는 무조건이지.”

“에이, 잘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괜찮은 게 노래니까.”

“아니야. 진짜 잘해. 선곡 리스트 먼저 뽑아서, 연습해보자.”

“그래야겠다.”

그리고 이내 고민에 잠겼다.

팬 미팅 시간이 몇십 분이 아니기에, 돈과 시간을 써서 내게 와준 팬들에게 뭐라도 하나 더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음… 발라드로 한두 곡 준비하고. 그리고 하나는 댄스곡 할까?”

내 말에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댄스곡이면 춤도 춰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당연하지.”

“희성이 너 춤도 추겠다고?”

“응!”

김 실장은 내 답이 끝나자마자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하하.”

그의 반응에 나 역시 웃음이 터졌지만, 곁눈질로 그를 쏘아보며 외쳤다.

“형, 나 춤도 좀 춰.”

장난스럽게 내뱉은 내 말에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왜, 뭐….”

“그래, 팬들한테도 보여줘야지. 희성이 네가 다 잘하는 건 아니라는 걸.”

그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휘이 가로저었다.

“아니야. 나 연습하면 춤도 잘할 수 있어. 댄스곡도 하나 꼭 할래.”

“그래, 하고 싶은 건 우선 다 해보자. 팬분들이 오히려 그런 걸 좋아해 주실 수도 있어.”

나는 앉은자리에서 웨이브 하듯 팔을 움직이며 읊조렸다.

“내 춤… 나쁘지 않은데?”

그런 내 모습에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알겠어. 우리 희성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리고 공연 외에는 팬분들이랑 소통하는 거로, 어떤 거 준비하면 좋을지….”

김 실장과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팬 미팅에 대한 회의를 이어갔다.

* * *

“하아… 하아….”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 지 어언 두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시간과 비례하게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희성 씨, 잘하고 있어요. 근데 그 부분에서 동작 넘어갈 때, 상체를 조금 더 뒤로 젖혀야 해요.”

“아… 이렇게요, 선생님?”

“네, 근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댄스 학원 원장이 내 몸을 뒤로 젖히며 설명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럼 제가 이 부분 몇 번만 더 반복해서 연습해 볼게요.”

“오늘 연습 더 하시게요?”

“네, 이 동작만큼은 완벽하게 하고 가고 싶어서요.”

그는 내 말에 입을 떡 벌리며 답했다.

“이렇게 오래 하시면 힘드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팬 미팅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최대한 노력해 보려고요.”

“알겠습니다. 하시다가 모르시는 부분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보다가 수정할 부분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네, 감사해요.”

곧바로 흘러나오는 음악.

나는 배운 것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몇 번 더 연습하던 그때.

연습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김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울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춤사위에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끝내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다가왔다.

“푸흐… 흡.”

“아, 형!”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고.

김 실장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손을 흔들었다.

“미안, 미안. 참으려고 했는데, 웃음이 안 참아지네.”

워낙 가까운 사이라 김 실장은 나를 추켜세워 주지만은 않았다.

현실 친구, 혹은 형제 같은 사이나 마찬가지니까.

나 역시 그런 그의 행동에 진심으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아, 진짜!”

“하하, 그래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네. 땀 흘리는 거 봐.”

“당연하지. 나 진짜 열심히 했어. 그렇죠, 선생님?”

내 말에 앞에 앉아 있던 학원 원장이 우리에게로 다가오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요. 희성 씨 진짜 몇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연습하셨어요. 그리고 실력도 금방 늘어서, 팬 미팅 때는 완벽하게 해내실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힘입어 김 실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봐. 팬 미팅 때, 보고 놀라지나 마셔.”

“알겠어. 그때는 잘하게 됐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장난치는 그의 말에 나는 이를 꽉 깨문 채로 말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왔는데?”

“아, 연습하고 있으니까 보러 왔지. 여기 커피, 선생님도 커피 한잔 드세요.”

“감사합니다.”

김 실장은 나와 원장에게 커피를 건넸다.

“나 춤 얼마나 못 추는지 구경하러 왔어?”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니야. 외근 갔다가 끝나고, 너 연습하는 거 도우러 왔지.”

“맞다. 미팅은 잘했고?”

김 실장은 내 물음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어, 그때 네가 말했던, IBH 투자사의 장한민. 그 사람도 미팅 왔었어.”

“응, 그분이 대본 리딩 때 왔던 IBH 직원이었어.”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회사에 투자하는 게, 너 때문이라고 하던데?”

“정말?”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대본 리딩을 했던 날.

장한민은 내 실력을 낮게 평가했던 걸 사과했었다.

하지만 애초에 IBH에서 주연 배우에 경력이 많은 배우를 선호했던 것을 알기에.

나 하나로 인해, 김 실장에게 투자하겠다는 연락을 했을 거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 * *

몇 시간 전.

IBH 직원들과 마주 앉은 김 실장.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한민의 말에 김 실장은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먼저 연락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거리가 중요한가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들은 길게 대화를 끌지 않고, 곧장 미팅의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저희가 이렇게 투자를 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린 건, 당연히 진희성 배우님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장한민은 진희성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번 대본 리딩 때 희성 씨 연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 실장은 진희성에 대한 칭찬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희 배우라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자랑 같지만. 희성이, 연기는 정말 따라올 배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아보니까 진희성 배우가 유명하고 가치가 높기는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장한민의 말에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집중했다.

“다르다면 어떤….”

“이번 대본 리딩에서 연기를 본 결과, 제가 생각하기에 진희성 배우는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포텐이 아직 터지지 않았다는 거죠.”

그는 진희성의 연기를 떠올리며 감탄을 쏟아냈다.

“대본 리딩실에서 펼쳤던 그 연기는, 제가 지금껏 다녀본 여느 촬영장의 배우들보다 뛰어났어요. 그 모습에 기립 박수를 칠 정도였으니까요.”

김 실장은 진희성을 칭찬하는 그의 말에 흐뭇하게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겨우 끌어 내렸다.

“진희성 배우가 속한 회사가 신규인 걸 알게 됐는데, 저희 투자사에서 어떻게 투자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 IBH는 확실한 곳에만 투자를 합니다. 지금껏 실패가 없는 투자 회사이고요. 그래서 IBH에서는 진희성 배우님이 계신 그 회사에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 * *

“…IBH 측에서 그렇게 말하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니까?”

김 실장은 IBH에서 장한민과 나눴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쏟아냈고.

다시 소름이 돋았는지 팔을 쓸어내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이, 네 연기에 아주 푹 빠진 것 같더라.”

“다행이네. 그래서 형, 투자 받기로 했어?”

“아직.”

그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어갔다.

“우선은 고민해 본다고 했어. 당장 나 혼자 결정하는 것보다는 너랑 이야기 좀 해보고 하려고.”

“조건은 어떤데, 괜찮아?”

김 실장은 내 물음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건은 딱 IBH 투자사스럽더라. 진짜 확실하고, 완벽해. 조건이….”

그는 신이 난 목소리로 IBH 투자사에 대한 이야기와 투자 조건들에 관한 말들을 쏟아냈다.

* * *

WG 엔터, 대표실.

한 본부장은 파일 속에 자료를 가득 담은 채, 박 대표의 앞에 서 있었다.

“대표님, 말씀하신 물건 하나 찾았습니다.”

“송유나 대체품?”

박 대표는 턱을 치켜든 채 그에게 물었고.

한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내밀었다.

“네, 서규리. 얘가 가장 괜찮은 것 같습니다.”

박 대표는 자료를 받아들며 읊조렸다.

“서규리…?”

“예, 걸 그룹 ‘핑퐁’에 센터를 하던 그 친구요.”

“그건 알지. 걔네 지금 다 어떻게 분리해뒀지?”

한 본부장은 파일을 열어, 가장 첫 페이지에 기재된 사진을 가리켰다.

“작년에 핑퐁 막내가 학폭이 터져서, 탈퇴했고. 얘네 둘은 애초에 팬덤도 적어서 키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옆에 얘는 탈퇴했고요.”

그의 말에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2명을 가리켰다.

“그리고 얘네는?”

“여기 한 명은 요즘 예능 쪽으로 돌리고 있는데, 나름 반응이 좋아서 계속 활동 중입니다. 그리고 나머지가 말씀드린 서규리입니다.”

“음… 그러네. 서규리가 여기 5명 중에 마스크는 가장 괜찮네.”

“네, 배우로 나가기에 크게 무리 없는 마스크일 것 같습니다.”

박 대표는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 모습을 본 한 본부장은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진행을….”

한 본부장의 질문에 박 대표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송유나가 가진 걸 하나씩 서규리한테 넘겨.”

그의 말에 한 본부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송유나 성격에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눈치도 챌 테고요.”

박 대표는 그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음흉하게 끌어 올렸다.

“아니, 가만히 두고 볼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고는 사악한 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송유나 약점 하나를 잡았거든.”

“약점이라면 어떤…?”

한 본부장의 말에 박 대표는 잠긴 서랍을 열어 봉투를 하나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알아?”

투명한 봉투 안에 담긴, 검정 물체.

한 본부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봉투를 바라보았고.

안에 든 것을 확인한 그는 섬뜩함에 두 뺨 가득 소름이 돋아났다.

“…머리카락 아닙니까?”

“어, 맞아. 송유나 머리카락.”

박 대표는 음침하게 눈을 뜨며, 한 본부장에게 봉투를 쥐여 주었다.

“송유나, 마약 했거든. 이거로 검사 맡기면, 양성이 뜰 거야. 누구인지는 비공개로 하고, 바로 검사부터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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