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50 –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5)
딩동-
아침부터 집으로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김 실장이었다.
“형, 왔어?”
“응, 일찍 일어났네?”
“그럼, 형이랑 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나는 김 실장을 맞이했고, 그의 손에 들린 커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부터 카페에 들렀다가 왔어?”
“어, 너 커피 좋아하잖아.”
“고마워. 얼른 들어와.”
김 실장과 카페가 아닌 집에서 만난 이유.
큰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집에서 만나는 게 당연했다.
카페에서 일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도 없었고.
우리에게 일 이야기를 나눌 만한 회사 공간도 없었으니까.
아직 사무실을 구하기 전이었고, 우리가 일 이야기를 나눌 곳은 우리 집, 혹은 김 실장의 집뿐.
김 실장과 나는 서재가 아닌, 거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스몰토크를 나누기도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곳은 우리가 일상 대화를 나누는 곳이 아니라, 회사처럼 일 이야기를 하는 곳이니까.
“희성아, 우리 이제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하자.”
김 실장의 반짝이는 눈빛.
하지만 알고 있었다. 마냥 행복한 눈빛만은 아니라는 걸.
나 역시 그랬으니까.
작품이 엎어진 것에 대해 행복 회로를 돌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이 한순간에 사라진 건 팩트니까.
“…그래, 이미 엎어진 작품인데, 우리가 다시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차라리 잘됐어. 작품 끝나고 나면, 또 새로운 작품을 찾고, 그리고 회사 세우고 할 정신이 없었을 텐데. 이번 기회에 회사나 제대로 만들어 놓고 시작하자.”
김 실장과 나는 커피를 들이켰고,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어제는 집 바로 올라갔지?”
“응, 올라와서 그냥 바로 뻗었어. 형은?”
김 실장이 어제 나를 데려다주고 약속이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대상이 WG 엔터의 한 본부장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한 본부장과 어떤 일이 있었고, 무슨 대화를 나눴느냐를 굳이 캐물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제 약속 갔다가 바로 집에 들어갔어.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갔다가 와이프한테 잔소리 왕창 들었지, 뭐. 하하.”
“어휴, 잘 혼났네. 하하, 이제 형수님 임신도 하셨는데, 집에 일찍일찍 들어가야지.”
그리고 김 실장 또한 내게 전날, 본부장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김 실장의 성격이라면, 분명 영화 ‘턴테이블’에 대한 것을 물어봤을 터.
그런데도 내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다.
WG 엔터에서 영화를 엎으라고 푸시했을 거라는 걸.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오해를 한 거라면.
김 실장은 WG 엔터가 아니었다고 내게 말했을 테니까.
WG 엔터의 짓이 확실해졌지만, 내가 직접 김 실장에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야기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그저 우리의 화만 돋울 뿐.
김 실장도,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작품을 엎어버린 WG 엔터를 뒤엎을 힘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김 실장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의 힘을 키우는 게 먼저라는 걸.
“형, 우리 얼른 회사부터 준비하자.”
“그래, 내가 안 그래도 부동산에 이야기는 해뒀는데….”
김 실장은 언제 준비한 것인지, 내게 자신이 정리해둔 사무실 목록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한 계단씩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응, 급하게 하지 말고, 천천히 꼼꼼하게 찾아보자. 나도 작품 준비 바로 시작해야겠다.”
“어, 내가 대본 좀 찾아볼게.”
나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눈에 의지를 가득 불태웠다.
“이번 작품은 진짜 엄청난 거로 가보자.”
* * *
작품이 엎어진 날 이후.
김 실장과 나, 우리의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낼 정도로 하루를 바쁘게 살아갔지.
김 실장은 그동안 엔터에서 보낸 세월을 경력 삼아, 제작사를 탄탄하게 설립했다.
매니저로만 활동했지만,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그간 회사에서 엔터가 돌아가는 상황.
사무실에 대해 눈여겨봤었고, 그 결과 김 실장은 빈틈없이 회사를 차릴 수 있었다.
단순히 서류 하나 내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정식으로 법인을 차리고, 엔터 회사다운 사무실을 만들고, 직원까지 채용했다.
김 실장이 내게 말했었다.
자신이 살면서 이렇게까지 바쁘고 온 힘을 다해 일한 건 정말 처음인 것 같다고.
그 정도로 김 실장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나날을 보냈다.
나 역시 매일 대본 속에서 살았다.
나를 믿고 WG 엔터를 박차고 나온 김 실장이 있었기에.
그리고 내 미래를 위해서 미친 듯이 대본을 살폈다.
예전에는 충분히 마음에 들어 작업을 하고 싶을 만한 대본이어도.
이번에는 그런 작품은 배제할 정도였다.
단순히 하고 싶은 작품만을 찾지는 않았다.
하고 싶을 만한 구미가 당기는 작품, 거기에 탄탄한 작품성.
그리고 흥행까지 할 수밖에 없는 작품을 고르고 싶었다.
왜냐, 이번 작품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를 위한 작품이 아닌, 김 실장의 사활까지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했다.
그래서 대본을 보는 내 시점이 더욱 까다로워진 것이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으니까.
며칠째,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대본에 파묻혀 살고 있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서재에서 눈을 떴다.
요즘은 늘 이런 식이었다.
서재에서 해가 뜰 때까지 대본을 보다가 의자에 기댄 채 잠들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눈을 비비며 다시 대본을 살폈다.
“이 정도 대본이면 내가 잘 살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니야. 이거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대본으로….”
나는 몇 시간 동안 살피던 대본을 옆으로 밀어냈다.
대본을 보는 내 눈이 몇 배는 더 까다로워져 있었다.
그때.
딩동-
서재의 열린 문으로 들려오는 초인종.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 형 서류 확인하러 간다고 했는데?”
김 실장과 약속을 잡지 않았기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현관으로 다가갔다.
“어? 뭐야.”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김 실장이 아닌, 송유나였다.
나는 그녀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 곧장 문을 열었다.
“유나야, 너 지방에 촬영 갔잖아. 연락도 없이 무슨….”
문을 열며 그녀에게 말하자, 송유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진짜야?”
“어?”
“영화 턴테이블, 엎어진 거 사실이냐고!”
송유나의 얼굴에는 걱정이 아닌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아… 그게….”
그녀는 내 말을 들을 새도 없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WG 엔터에서 한 짓이지?”
“확실한 건 아니야. 투자사에서 투자가 취소된 거라. 유나도 잘 알잖아. 이런 일이 업계에서 일어나는 거.”
나는 오히려 그녀를 설득하듯 말했지만, 그런 내 말에도 송유나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확실하네. WG 엔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괜찮아. 우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
나는 흥분한 송유나를 방 안으로 끌어당겼고.
거실에 앉은 그녀에게 찬물을 건네며 말했다.
“유나야, 이것 좀 마셔.”
“응.”
화를 분출해 목이 말랐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녀.
“작품 엎어진 것 때문에 온 거야?”
송유나는 빈 물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매니저 오빠한테 이제 막 소식을 들었거든. 왜 이야기 안 했어?”
“유나, 너 걱정할까 봐. 좋은 소식도 아니고… 그리고 너 촬영 가 있었잖아. 그래서 만나면 이야기하려고 했지.”
그녀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해봤자, 해결이 될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녀의 마음만 불편할 거라 생각했다.
나도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촬영에 열중해야 할 그녀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는 건,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나는 몰랐잖아.”
“미안해. 그래도 그렇게 걱정할 건 아니야.”
내 말에 송유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답했다.
“아니, 걱정이 아니라 화가 나는 거지. WG 엔터… 아무리 그래도 같은 회사 식구였던 사람한테 이런 거지 같은 짓을 해?”
송유나는 차분해졌던 마음이 다시 끓어오르는 듯 얼굴을 붉혔다.
“유나야, 화낼 거 없어. 투자사에서 투자 회수를 결정한 게, WG 엔터라는 확신도 없고. 그리고 밝혀진 것도 하나 없어.”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뻔하지. WG 엔터에서 하는 짓….”
송유나는 내게 벌어진 일임에도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돼. 내가 분명히 경고했잖아. 오빠 건들면, 나도 더 이상 WG 엔터에 있을 이유 없다고.”
“그럼 회사를 나오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응, 그때 오빠 계약 파기할 때, 내가 대표한테 이야기했잖아. 나도 이런 회사 못 믿어.”
머리끝까지 흥분한 그녀의 모습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막아서는 것이었다.
지금 송유나는 물불 가릴 것 없이 날뛰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내 작품이 엎어진 것으로 인해, 그녀가 회사를 나온다는 것?
그건 도저히 내가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유나야.”
“응, 오빠. 내가 대신 복수해줄게. 오빠도 알잖아. WG 엔터에서 나 나가면, 회사 주춤할 거야. 내가 WG 엔터 망하게 도와줄게.”
그녀의 말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내 앞에 앉혔다.
“아니, 그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지.”
“그럼, 이 분함을 그냥 넘어가자고?”
“내가 할게, 그 복수.”
송유나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눈썹을 휘었다.
“어떻게 하려고….”
“다음 작품으로 복수할 거야. 내 앞길을 막고 싶은 거라면, 내가 더 성공하는 게 진정한 복수잖아?”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유나, 너는 WG 엔터에 남아 있어.”
“그래도 나도 오빠를 위해서….”
“유나, 네가 거기 있어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보일 거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왜?”
“그래야 WG 엔터에서 방심하겠지. 자신들이 한 짓을 유나 네가 모를 거라고. 그리고 나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때 엄청난 작품으로 나타나고 싶어.”
송유나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낫겠네.”
이성을 찾은 듯한 그녀의 모습.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그게 훨씬 낫지. 게다가 유나 너 계약 만료 얼마 안 남았잖아. 다 채우고 나야, 다른 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잘 옮기지. 괜히 이것저것 시비 걸려서 기사 나는 것보다는.”
그녀는 언제 분노를 표출했나 싶게 내 말에 순한 어린 양이 되었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 * *
집에 틀어박혀 대본만 찾아본 지도 며칠이 흘렀다.
“아휴… 이것도 별로고.”
그럼에도 내 마음을 끌 만한 대본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이 너무 높아진 건가… 기준이 너무 까다롭나?”
하지만 이 기준을 낮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을 높인 만큼, 좋은 작품을 찾을 테니까.
기존에 나를 사로잡을 정도의 작품으로는 성공할 수 없었다.
내가 바라는 성공의 척도는 이전과 확연히 다르니까 말이다.
WG 엔터… 나를 막아선 그들을 넘어서려면, 나부터 커져야 할 터.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확실한 성공을 향해 가야지.”
퀭해진 눈을 손으로 비비며 정신을 다잡을 무렵.
지이잉.
송유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대본 틈에서 찌든 목소리를 털어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그러고는 곧장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응, 유나야.”
-뭐 하고 있어?
“나 대본 보고 있지.”
-정한 건 있고?
“아니, 아직 끌리는 게 없네…. 유나는?”
-나 집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오늘 감독님을 좀 만났는데 말이야.
“응.”
-감독님이 새로 들어가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서 진희성 배우한테 관심이 있다고 나한테 이야기하더라?
“정말?”
-어. 내가 봤는데, 작품도 진짜 괜찮고. 감독님이랑 작가, 그리고 투자자도 엄청 빵빵해.
“어떤 감독님인데?”
-박호찬 감독님.
“내가 아는 그 박호찬 감독님?”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감탄을 쏟아냈다.
영화계에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 아닌가.
최근 몇 년간 내는 영화마다 대박을 낸 감독이기에, 모든 배우들이 그의 새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호찬 감독의 작품에 단역으로라도 출연하기만 하면, 몸값이 배로 올랐으니까.
-어, 박 감독님이 자신 있게 이야기하더라. 이번 대본 대박이라고. 박 감독님이 먼저 오빠한테 관심이 있다니까, 이건 고민할 것도 없잖아!
그녀의 말에 나는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박호찬 감독과 하는 작품.
그리고 나를 찾는 박 감독… 당연히 고민할 게 없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확신의 주먹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