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50 –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4)
천 감독의 말에 나와 김 실장은 서로를 마주 보며 당황함을 표했다.
“그게 무슨….”
그가 내게 긴히 할 말이 있음을 드러냈기에, 작품에 문제가 생겼을 거라 예상은 했었다.
크랭크인이 뒤로 밀리거나 혹은 캐스팅에 대한 문제일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작품이 엎어졌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나와 김 실장은 당황으로 말을 끝맺지 못했고.
천 감독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저도 지금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통보식으로 전달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의 사과에 나는 더욱 이유를 듣고 싶었다.
에둘러 넘기려는 변명 말고, 진짜 이유를.
“감독님, 이유가 뭡니까? 갑자기 작품이 엎어지는 거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투자가… 어그러졌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작품을 이어갈 수가 없게 되었고요.”
천 감독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감독님, 저희 여기까지 정말 어렵게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간단하게 말씀하지 마시고, 솔직하게 전부 이야기해 주십시오.”
천 감독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내 눈을 피해 애꿎은 책상을 툭툭 누르며 답했다.
“투자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투자를 못 하겠다고요.”
“그러니까 대체 왜….”
“이거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고민을 오래 했습니다.”
그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고.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희성 씨가 주연이고, 게다가 희성 씨와 지금까지 힘들게 이어온 연이 있으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전부 들려드릴게요.”
그는 주머니 속 휴대 전화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후 곧바로 녹음 파일 하나를 열어, 내게 들려주고 싶은 부분으로 넘겼다.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휴대 전화 속 천 감독의 목소리.
-그래서 지금 투자를 전부 철회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천 감독님도 아시잖습니까. 블랙코미디가 수익성이 낮다는 걸요.
단호한 목소리의 투자자.
-블랙코미디 장르 작품인 거 이미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여기까지 와주신 거 아닙니까. 믿고 맡겨주시면….
-아니요. 저는 말 그대로 투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돈이 들어오는 작품에만 투자를 해요.
-갑자기 그러시면….
-블랙코미디가 수익성이 낮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리스크에 비해 수익성이 낮다고 판단됐습니다.
-투자자님, 저희 캐스팅도 다 변경됐고, 작품에 자신 있습니다. 당장 크랭크인이 코앞이고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청천벽력 같은 투자자의 말에, 휴대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천 감독의 목소리는 애절했다.
투자자의 단호함에도 그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간절함을 쏟아내고 있었지.
-저도 이해해 주십시오. 저희 곧 주주총회인데, 주주들 분위기가 이미 심상치 않습니다. 이렇게 된 건,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다음에 좋은 작품 있으면 같이하시죠.
휴대 전화에서 들려오는 투자자의 말에는 뼈가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투자를 철회하는 이유가 장르의 문제다, 수익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등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크랭크인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블랙코미디 장르인 걸 몰랐을 리도 없고.
투자자의 말처럼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수익성이 낮은 것 같아 취소하겠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지.
그저 핑계를 대기 위해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천 감독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아니… 그래도 다시 한번만 생각을….
그럼에도 투자자는 차갑고 칼 같은 답을 내놓았다.
-미안합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투자자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녹음은 정지되었다.
이렇게 전화가 끊긴 모양이다.
“…….”
통화 녹음이 끝나자 이곳은 고요해졌다.
천 감독도, 나와 김 실장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천 감독을 향해 왜 작품이 엎어졌느냐 물어도, 그가 답을 망설였던 이유.
투자자 역시 타당한 이유를 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지만, 나는 천 감독에게 묻지 못했고.
그 역시 투자자에게 꼬치꼬치 캐묻지는 못했다.
천 감독이 투자자에게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여 묻지 못한 건, 그가 ‘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들로서는 감독이 캐스팅해 주지 않으면 연기를 시작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런 감독은 투자자가 없다면, 영화를 시작할 수조차 없지.
투자사가 절대적인 ‘갑’이었고.
그렇기에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그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 당장 이번 작품 하나 엎어진 게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천 감독의 영화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투자사와 관계가 틀어진다면, 평생 연결된 곳에서 투자를 받기는 힘들 터.
우리는 그렇게 멍하니 꺼진 녹음 파일을 바라보았고.
나는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정적을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손쓸 방법은 없는 건가요?”
내 물음에 천 감독은 이미 수차례 고민한 듯 곧장 답했다.
“네,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누가… 이렇게 한 건지 아시는 건가요?”
천 감독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걸겠다고 다짐했던 작품인데,
그 작품이 대중들의 앞에 서지도 못한 채 가라앉는 걸 보는 순간.
분노보다는 허탈함에 사로잡혔다.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달려왔나….
큰 결심으로 선택했던 블랙코미디 장르.
그리고 작품에 사활을 걸어 보겠다며, WG 엔터의 부정 캐스팅까지 막아섰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WG 엔터와의 결별까지 선언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걸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 생각한 이 시점에 작품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저 수긍하며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 * *
천 감독과 자리를 끝내자마자 김 실장과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우리는 주차장을 벗어나지 않은 채 대화를 시작했다.
“형.”
“응.”
김 실장 역시 이 무거운 분위기에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아무래도 내 탓 같지?”
내 말에 그는 운전석에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천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투자사에서 발을 빼버린 이유를.
그리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떠올린 답은… 나였다.
“분명 나 때문에 WG 엔터에서 이런 짓 펼친 것 같아. 아니, 확실해.”
김 실장은 좌절과 분노가 섞인 내 표정을 바라보며 답을 망설였다.
그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을 터.
“아닐 거야.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나온 건데, 이렇게 앞길을 막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 WG 엔터라면 어떻게든 내 앞길, 막으려고 했을 거야. 내가 왜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김 실장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나를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혹여나 그렇다고 해도 WG 엔터에서 몹쓸 짓을 한 거지. 희성이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 괜한 죄책감도 가질 필요 없고.”
“그래도… 천 감독님도 그렇고 작품을 준비한 사람들까지…. 하아.”
잘못한 게 WG 엔터라는 건 알지만.
그로 인한 피해가 나에게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답답함이 가득 차올랐다.
“천 감독님도 희성이 네 말만 듣고 움직인 사람은 아니잖아. 먼저 대형 엔터의 갑질에 힘들어했던 거고. 네가 오히려 천 감독님을 도운 거였지.”
김 실장의 다독임에도 나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머리를 기대 누웠고.
일그러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김 실장이 말을 이어갔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어. 내가 한 번 알아볼게.”
* * *
그날 저녁.
김 실장은 진희성과 헤어지자마자 자신의 집이 아닌, 한 술집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한 본부장님.”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WG 엔터의 한 본부장.
“어, 김 실장. 어서 앉아.”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김 실장의 물음에 한 본부장은 고개를 휘이 저었다.
“아니야. 나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 어디 다녀왔어?”
“희성이랑 잠깐 미팅 다녀왔습니다.”
“아… 그래?”
미팅을 다녀왔다는 말에 한 본부장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 그의 어색한 말투를 눈치챘는지, 김 실장은 일부러 그 이야기를 언급했다.
“네, 턴테이블 작품 감독님 좀 뵙고 왔습니다.”
“응, 그래. 요즘 좀 어때?”
“쉽지가 않네요. 턴테이블 작품으로 시작하나 했는데, 작품이 갑자기 엎어졌거든요.”
김 실장의 말에도 한 본부장은 놀란 기색 없이 술잔을 채웠다.
“그래…?”
이미 작품이 엎어졌다는 걸 알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한 본부장이 놀란 듯한 표정을 억지로 짓자, 그런 태도에 김 실장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WG 엔터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더군다나 김 실장은 예상하고 있었다.
WG 엔터에서 어떻게든 진희성의 앞길을 막기 위해 이런 일을 펼쳤을 거라는 걸 말이다.
김 실장은 그런 한 본부장을 떠보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이지.
WG 엔터의 소식을 알 수밖에 없는 윗선 직원.
그러면서도 자신과 친분이 있는 직원으로 한 본부장을 택한 것이다.
“예, 그래서 회사 나오자마자 죽을 맛입니다.”
챙-
그들의 술잔이 부딪쳤고.
한 본부장은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주제를 바꾸려 했다.
“그래. 원래 회사 나가고 새로 시작하면, 괜히 여기저기 부딪쳐. 그래서 이제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
그의 물음에 김 실장이 코를 찡긋거리며 물었다.
“그 전에… 작품이 왜 엎어졌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게 해결되지 않으니,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바닥이 다 그렇잖아. 촬영 시작하고도 엎어지는 게 이 업계인데, 뭘 새삼스레 그러는 거야?”
둘은 서로를 마주 보지 않은 채, 술잔을 들이켰고.
김 실장은 알코올을 한 번에 털어 부은 후 그에게 물었다.
“한 본부장님.”
“응?”
“솔직히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뭘….”
“이번 작품 엎어지게 만든 거, WG 엔터에서 한 거 맞습니까?”
김 실장은 내내 돌려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돌직구를 던졌다.
하지만 한 본부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 회사에서 뭐 하러 작품을 엎겠어. 우리 회사랑 다 끝난 마당에.”
“그러니까요. 근데 타이밍이 영….”
한 본부장은 이 주제의 대화가 불편했는지,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회사 일 얘기 말고 예전처럼 우리 이야기나 하자. 너나 나나 하루 내내 일에 시달리던 사람들인데, 술자리에서까지 이래야겠어?”
김 실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그가 한 본부장을 만나려던 이유의 전부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이었지만.
WG 엔터를 퇴사한 후.
한 본부장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기에, 더 이상 그걸 캐물을 수만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됐어. 너도 답답한 마음에 묻는 건 알겠지만, 아니니까 나도 그거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네, 본부장님은 요즘에 별일 없으시죠?”
그들은 빠르게 대화의 주제를 환기시켰고.
“그럼. 아, 와이프 임신했다고 했었잖아. 이제 몇 개월이야?”
“네, 이제….”
한 본부장과 김 실장은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고.
그들의 테이블에는 빈 소주병이 세 병이나 올라와 있었다.
“어후… 세상 살기가 힘들지, 힘들어.”
한 본부장은 알코올이 가득한 입김을 쏟아냈고.
그의 발음은 부정확할 정도로 꼬여 있었다.
술기운이 잔뜩 올라온 모양이다.
“맞습니다. 갑자기 최 전무가 오는 바람에 로드 매니저들도 죽을 맛이었잖습니까.”
“으… 응, 최 전무 개XX. 진짜 돈 벌어 먹기 힘들다.”
김 실장은 한 본부장의 붉어진 볼과 꼬인 혀를 확인하자마자 못다 한 말을 꺼냈다.
“본부장님, 저 뭐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어우, 그럼. 다 물어봐.”
“희성이 나가고 작품 엎은 거, 대체 왜 그런 겁니까?”
그의 물음에 줄곧 아니라고 답하던 한 본부장이었지만, 그는 한껏 취한 술 탓에 입을 열었다.
“어떤 연예인이건, 회사가 탄탄해야 해. 살짝 부는 바람에도 울타리가 온전치 않으면, 배우는 이리저리 휩쓸리기 마련이거든.”
“…….”
“배우가 힘을 키우려면 인지도와 위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만큼 회사의 힘이 중요하다는 거야. 지금 진희성… 은 집이 없잖아. 자신을 지켜줄 집.”
그의 말에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그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WG 엔터에서 영화 ‘턴테이블’을 엎게 만들었다는 걸.
한 본부장은 자신이 있는 WG 엔터에서 이 일을 벌인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비유적 설명이 모든 의심을 풀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김 실장은 앞에 놓인 물 잔에 소주를 잔뜩 따라 부었고.
벌컥벌컥-
그 술을 각성하듯 입에 쏟아 넣었다.
‘진짜 제대로 된 회사 차려서… 내가 직접 보호해 줘야겠다. 앞으로도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김 실장은 억울하게 엎어진 작품을 떠올리며, 술잔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