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49 – 미스 캐스팅 (3)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 내 대사가 끝나자마자 천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짝짝-
배우들의 박수가 대본 리딩실을 가득 메웠고.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손뼉을 부딪쳤다.
“고생하셨습니다.”
천 감독은 여러 배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대본 리딩 때, 제가 많이 끊기도 하고 좋지 않은 소리도 적잖이 했는데. 다 작품이 잘되길 바라서 하는 이야기니까, 너무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의 말에 배우들은 미소로 화답했다.
감독이 배우들에게 피드백하는 것도, 쓴소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 배우가 싫어서가 아닌, 함께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한 것이니까.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디렉팅하는 사람이 감독이기에,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 또한 당연했지.
천 감독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들 배역에 조금 더 몰두해서 연기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우리는 합창하듯 입을 모아 답했고.
그는 고개를 들어 옆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은 크랭크인 때 만날 거 같아, 오늘 고사를 지낼까 합니다. 다 들으셨죠?”
천 감독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이야기 들었습니다.”
“예, 그럼 잠시 정리하시고 장소를 옆으로 옮기시죠.”
천 감독은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고사상이 차려진 옆방으로 향했고.
나는 대본을 정리하고 다른 배우들과 함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방에 차려진 고사상.
화려하고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갖출 건 모두 갖춘 듯했다.
상 위에 놓인 돼지머리부터 몇 가지의 과일들.
그리고 ‘턴테이블’ 대본까지.
배우들은 줄을 서듯 길게 늘어서 있었고.
천 감독이 가장 먼저 고사상 앞으로 다가가 준비해 온 봉투를 꺼내놓았다.
“우리 턴테이블 잘되게 해주십시오. 열과 성을 다해 찍어 보겠습니다.”
그는 그대로 큰절을 올렸고.
나 역시 미리 챙겨둔 지폐가 담긴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흐르고.
어느덧 밖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길었던 대본 리딩 탓에 해가 져버린 지 오래.
곧 저녁 시간이 다가왔지만, 따로 회식은 잡혀 있지 않았다.
간단히 고사상에 올려놓은 음식을 집어 먹었고.
함께 작품을 이어갈 배우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다.
“역시 희성 씨네요. 연기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함께 호흡을 맞춰보니까 대단하던데요?”
연예계에서 무려 20년이 넘는 경력을 갖춘 박희재 배우가 내게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 선배님.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선배님과 이번 기회에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내가 영광이죠. 앞으로 잘해봅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선배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그럴까?”
“예, 그럼요.”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리를 이어갈 무렵.
내게 다가오는 WG 엔터 배우들.
“선배님.”
평소 그들과 대화를 길게 나눠본 적은 없었다.
작품을 같이 해본 배우도 없었고.
그저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를 나눈 경험만 있을 뿐.
몇 시간 전, 대본 리딩실에서 처음 그들과 인사를 나눴지.
“선배님, 오늘 연기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크으, 맞아요. 진짜 존경합니다.”
그들의 칭찬에 나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고.
이어 그들을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드러냈다.
“다들 오늘 고생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천 감독님을 믿고 작품 하는 배우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피드백 받은 내용들 꼭 숙지해서 연습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을 향해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정말 나로 인해 캐스팅이 된 거냐고.
화장실에서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지만, 차마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들 중에서 정확한 팩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으니까.
괜히 분란을 만드는 건 아닌가 싶어 말을 아끼던 그때.
이훈빈이 오른손을 자신의 이마에 붙이고 경례를 하며 내게 말했다.
“희성 선배님,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와 아부 섞인 말투.
그의 말이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이유가 궁금했다.
내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무슨 충성이요?”
그러자 이훈빈이 주변을 쓰윽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살폈고.
옆에 있는 WG 엔터 배우들을 손으로 당기며 내게 말했다.
“저희요. 선배님 덕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충성을 다해서 선배님 모시겠습니다!”
“그게 무슨….”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나리가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선배님이 그동안 저희 회사에서 길을 잘 닦아주셨잖아요. 덕분에 저희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도 WG 엔터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들은 내게 한마디씩 감사를 표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 덕분에 캐스팅이 됐다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는 배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배우도 있기에.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찝찝함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꼭 확인해야만 했다.
이들의 캐스팅 목적을.
연기를 잘하고, 배역과 맞다는 이유로 캐스팅이 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나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캐스팅이 된 것인지 말이다.
혹여나 이유가 후자라면, 그건 정말 ‘미스 캐스팅’이었을 테니까.
몇십 분 뒤.
“그럼 크랭크인 때 뵙겠습니다. 오늘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자리가 마무리되고 하나둘 빠져나갈 무렵.
김 실장 역시 내게로 다가왔다.
“희성아, 고생했어.”
그는 내 옆에 놓인 가방을 챙겼다.
“선배님, 저희 들어가 보겠습니다.”
WG 엔터의 후배들이 다가와 내게 허리를 접었다.
“그래, 다음에 봐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의 인사 끝에 여전히 함께하는 ‘감사’의 표시.
하지만 그 감사에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다.
“희성아, 우리도 이제 가자.”
김 실장은 턱으로 문밖을 가리켰고.
나는 그런 김 실장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형, 미안한데, 먼저 차에 가 있을래?”
“왜, 무슨 일 있어?”
“나 감독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가려고.”
내 말에 김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천 감독과 몇 번 만나기도 했고.
주연 배우와 감독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알겠어. 그럼 주차장에 있을 테니까, 이야기 끝나면 전화해.”
“응, 그럴게.”
김 실장은 먼저 건물을 빠져나갔고.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천 감독에게로 향했다.
* * *
대본 리딩실.
북적이던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천 감독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 대본 리딩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무슨 할 말이….”
천 감독이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고.
여전히 그의 말투와 표정은 내게 거리를 두는 듯 보였다.
나를 바라보며 웃고는 있지만, 늘 내게 보여주던 그 인자한 웃음은 아니었다.
어딘가 어색하고 낯선 눈빛은 내게 불편함을 느끼는 듯 보였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 말에 천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놓인 대본을 바라보았다.
“근데 희성 씨 연기는 좋아서, 피드백할 게 없는데?”
나는 그가 바라보고 있는 대본을 손으로 감췄다.
“연기 말고, 캐스팅에 대해서요.”
내 말에 그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고개를 들고 천 감독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캐스팅하실 때, 혹시 WG 엔터에 영향을 받은 거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내 말에 천 감독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 인상이 찡그려진 게 아니라,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대본 리딩에 와서 보고 놀랐거든요. 이렇게 WG 엔터 배우들이 많이 캐스팅된 걸 보고요.”
내 말이 끝나자 천 감독은 잠시 답을 망설였다.
그러고는 내 시선을 피한 채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런 천 감독을 향해 나는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제가 모르는 일이 그사이에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서요. 혹시 캐스팅 단계에서 제가 모르는 회사의 관여가 있었던 건가요?”
내 물음에 천 감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듯했다.
그 모습에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천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저도 뭔가 찜찜해서 이렇게 여쭤보는 겁니다.”
천 감독은 이후 연거푸 몇 차례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운을 뗐다.
“실은 희성 씨를 주연으로 배역 정하고 나서 WG 엔터에서 연락이 왔는데….”
천 감독은 고민하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리액션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한참 이어진 그의 답.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이 점점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내 주연 캐스팅으로 인해 WG 엔터 배우들이 덩달아 캐스팅된 거니까.
물론 그들의 능력이 출중하고, 천 감독 역시 그들을 원했다면 문제가 없지만.
오늘 대본 리딩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맡게 된 배역은 천 감독이 원하던 캐스팅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섭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전후 사실을 듣고 나자, 심기가 불편해지는 건 당연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이 화를 천 감독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건 WG 엔터 회사 내부의 일인 것이고.
오히려 내가 천 감독에게 보여야 할 태도는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내 말에 그가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보아하니 희성 씨도 모르게 진행된 거 같은데.”
그는 그제야 내가 이 캐스팅에 연관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됐는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제가 회사랑 다시 이야기 좀 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천 감독은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캐스팅도 다 끝났고, 더군다나 대본 리딩까지 오늘 마쳤잖아요. 그냥 좋게 좋게 마무리하죠.”
“그렇긴 하지만….”
천 감독은 정말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WG 엔터 소속이니, 믿을 만한 엔터 아닙니까. 제가 오늘 피드백도 다 했고, 배우님들이 알아서 잘해주시겠죠.”
그의 말에도 나는 회사를 향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배우들이 오늘 대본 리딩에서 수차례 피드백을 받을 정도로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그 태도에 천 감독도 불편함을 느끼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이건 단순히 회사에서 배우를 추천했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맞지도 않은 배역에, 억지로 꽂아 넣은 게 문제였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화를 진정시키려 했다.
“저도 이 작품에 진심입니다, 감독님. 정말 열심히 잘해보고 싶은 작품이고, 앞으로 촬영하면서 오늘 같은 사태를 계속 겪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나보다 더 불편한 마음을 품고 있었겠지.
“제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크랭크인 전에 제가 다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천 감독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머리를 흔들었다.
* * *
차에 올라타자마자 김 실장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뭐야. 감독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단번에 내 표정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김 실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까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럼 얼른 출발할게, 집에 가서 좀 쉬어.”
“응.”
차는 곧바로 출발했고.
눈을 스르르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분노가 차오른 상태였기에, 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이대로라면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이 앞설 테니까.
하지만 도무지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형.”
내 부름에 김 실장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응, 뭐야. 말해봐.”
“집 말고, 회사로 좀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