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269화 (269/303)

269화 #49 – 미스 캐스팅 (2)

점점 더 가까워지는 대본 리딩실.

약속된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가빠지는 숨을 참기 위해 심호흡을 했고.

그 모습을 본 김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희성아, 혹시 떨려?”

김 실장의 물음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의 다 와가니까 약간 떨리네.”

내 말에 김 실장이 피식 웃음을 보이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에이, 이런 베테랑이 떤다니까 신기하네.”

“당연하지. 형, 나 최근 작품 들어갈 때도 대본 리딩 때 엄청 떨었잖아.”

“그건 할리우드였잖아. 게다가 네가 할리우드에서 주연으로 들어가는 첫 작품이었고.”

그의 말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휘듯 웃으며 답했다.

“나한테는 여기나 할리우드나 똑같아. 더군다나 이번 작품은 느낌도 좋아. 그만큼 정말 최선을 다할 거기도 하지만.”

우리는 한 층을 더 올라가 저 멀리 보이는 대본 리딩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작품은 없었지.”

“응, 근데 이번 작품은 느낌이 좀 다르네.”

“그래?”

김 실장과 대화를 나누며 걷던 도중.

어느새 우리는 대본 리딩실 앞에 도착했다.

[대본 리딩 – ‘턴테이블’]

굳게 닫힌 문에 붙은 글자를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후… 긴장되네.”

김 실장은 내 숨소리에 덩달아 떨리는지 긴 숨을 내뱉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할 수 있어.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고 와.”

“응.”

문고리에 손을 얹었고.

손잡이를 스르륵 돌리자마자 안에서 문고리를 세게 당기는 힘에 몸이 휘청였다.

“어… 어?”

중심을 잡기 위해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았고.

내 앞에 서서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

“안녕하십니까!”

그는 복도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인사에 나는 누군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답한 뒤.

어딘가 낯익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양손을 뻗어 대본 리딩실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뭐지… 어디서 봤는데….’

하지만 그에게 누구냐고,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연예인끼리 작품을 함께하지 않았어도.

각자 TV, 영화 등 매체에 나오며 서로의 얼굴이 익숙한 건 당연하니까.

다만 후배거나, 신인, 혹은 많은 작품을 하지 않았다면.

서로 통성명을 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게 보편적이기는 하다.

먼저 이름을 묻는 게 불쾌할까 싶은 마음에, 나는 내 이름을 알리며 인사하려 했다.

“저는 진희….”

그때.

“희성 씨, 왔어요?”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온 천 감독 탓에 대화의 흐름이 끊겨버렸다.

“네, 감독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그는 내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오늘 잘 부탁해요.”

“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그럼 쉬었다가 이따가 봅시다.”

천 감독은 이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대본 리딩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의문스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알던 천 감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랄까.

천 감독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그와 마주칠 때면 천 감독은 늘 내게 악수를 건네고는 했다.

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도 말이지.

더군다나 함께였던 김 실장에게도 악수를 건네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오늘 내게 보여주는 저 어색한 미소와 무언가 미지근한 말투는, 자칫 나에게 화라도 났나 싶었지만.

그 역시 오늘의 대본 리딩이 긴장될 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고개를 휙 가로저었다.

‘주연-진희성’

내 이름이 적힌 가장 안쪽 자리.

이름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고.

자리를 벗어나 텅 빈 천 감독의 자리를 바라보자, 다시금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어색하게 휘어지던 입꼬리.

입과는 달리 웃지도 않던 눈까지.

첫 만남에서도 내게 친근하고 달가움을 표하던 천 감독이었지만.

오늘은 분명 내게 약간의 거리감을 표출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와 거리를 두는 이유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채 그와의 만남을 떠올렸지만, 단번에 생각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그와 나빴던 기억은 없었으니까.

“안녕하세요.”

고민을 하던 순간.

내게 인사를 해오는 다른 배우들.

그들의 인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내 답인사에 신인으로 보이는 듯한 배우가 수줍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저… 희성 님 팬이에요!”

“정말요?”

“네, 시계공과 무희 작품 보고 팬 돼서 항상 응원하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같이 작품을 찍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도 영광이네요. 제 작품을 좋아해 주신 배우님과 함께 연기를 하게 돼서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와,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팬이라는 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그녀의 당찬 인사에 주변 선후배 배우들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비웃음은 섞이지 않은.

포부가 드러난 순수한 당당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이지.

그들이 떠난 후.

이후에도 대본 리딩실로 또 다른 배우들이 등장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내 시선을 앗아간 이들은 다름 아닌 우리 회사 식구들이었다.

그러니까 WG 엔터의 소속 배우들.

남녀 상관없이 WG 엔터의 소속 배우들은 내게로 다가와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고.

나는 그때마다 가장 경력이 오래되고, 나이가 있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먼저하며 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임호철, 신나리, 채서현, 백승균….

내가 눈에 익고 이름을 아는 배우들만 하더라도 벌써 4명이었다.

그들은 나와 인사를 나누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WG 엔터의 배우들을 바라보며 의뭉스레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이렇게 우리 엔터 소속 배우들이 많지?’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었다.

당장 시작할 대본 리딩이었지.

서둘러 신경을 털어낸 뒤, 대본에 집중했다.

* * *

“네, 좋아요. 그럼 다음 신 이어가 볼게요.”

대본 리딩이 한참 이어지고 있었고.

어느덧 초반부를 넘어섰다.

천 감독의 사인에 시작된 다음 신.

나는 대본을 바라보며 빠르게 감정을 잡았다.

“들어봐. 이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이야.”

양손을 허공에 내밀며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사를 내뱉었고.

내 대사에 맞춰 상대 배우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대체 뭔데 그렇게 화가 나서 들어온 거야?”

“그러게. 누가 뭐라고 했어?”

그들의 대사에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내 말을 가로막으며 터져 나오는 음성.

“야, 확실해?”

“…뭐?”

상대 배역의 목소리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답했고.

그는 대본을 다 외웠는지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항상 네 잘못이고, 실수였잖아. 또 우리를 네 감정 쓰레기통이나 만들려는 건 아니냐고!”

순간.

“…….”

대본 리딩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대사를 틀린 것도, 연기가 과한 것 또한 아니었다.

저 배우는 대본에 충실한 연기를 내뱉었고, 감정에도 충실했지.

하지만 대본 리딩실이 고요해진 것 역시, 그의 연기 때문이었다.

천 감독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음… 의도한 바대로 연기는 맞는데….”

그의 말에 배우는 고개를 돌려 천 감독을 바라보았고.

천 감독은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배역에 조금 맞지 않는 거 같아서요. 차라리 힘을 풀어버리고 화를 내볼래요?”

그의 피드백이 떨어지자, 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네, 다시 해보겠습니다!”

배우는 당찬 목소리로 눈빛을 반짝였고.

나는 그런 그를 흘긋거리며 앞에 놓인 이름을 확인했다.

‘조연-이훈빈’

그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소리 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이훈빈… 그 역시 나와 같은 회사인 WG 엔터 배우였다.

처음 대본 리딩실에 들어왔을 때, 문 앞에서 반갑게 내게 인사했던 배우.

낯이 익어서 누군가 했지만, 이름을 들으니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든 배우를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회사에 새로운 배우가 들어오면 늘 이름을 체크하고는 했으니까.

몇십 분 뒤.

대본 리딩은 계속 이어졌고.

늘 대본 리딩이 그렇듯 중간중간 흐름이 끊겼다.

그리고 끊는 흐름마다 천 감독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그의 피드백은 이곳에 있는 배우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연기 잘하는 건 알겠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천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를 끊으면서 요구하는 사항은 모두 똑같았다.

맡은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 톤이나 말투라는 것.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작가도,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감독이라서가 아니었다.

천 감독의 말을 백번 이해하는 것이었다.

맡은 배역과 무언가 어색하게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

‘미스 캐스팅’.

딱 이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천 감독이 대본 리딩을 끊고, 피드백을 날릴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미스 캐스팅의 느낌을 풍기는 배우들은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전부 ‘WG 엔터’의 배우들이라는 것.

“아… 아니, 다른 톤으로 연기해 볼래요?”

또… 여지없이 WG 엔터의 배우였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내가 WG 엔터였고.

하필이면 자꾸만 천 감독의 눈총을 받는 배우들이 같은 회사 식구들이라니.

괜스레 얼굴이 붉혀졌지만, 나는 그들에게 내려지는 피드백을 함께 들으며 대본 리딩을 이어갔다.

* * *

계속 끊기는 대본 리딩에 시간은 점점 지체되었다.

“하아… 우리 잠시 쉬었다가 뒤에 내용을 이어가 봅시다.”

천 감독의 이야기로 휴식 시간이 생겼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하고 있던 몸을 축 늘어뜨렸다.

배우들은 쉬는 시간을 틈타 몸을 풀러 밖으로 나가거나.

화장실을 가는 배우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몇 시간가량 이어진 대본 리딩의 피드백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 쉬는 시간이 흐른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화장실 다녀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향한 화장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다들 화장실을 다녀간 덕인지,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자마자 세면대로 다가갔고.

쏴아아-

흐르는 물에 손을 씻던 그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배우들의 대화였다.

얼핏 듣기로는 서너 명 정도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고.

열린 문틈으로 그들의 대화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 대본 리딩, 왜 이렇게 빡세냐.”

“그러게. 자꾸 톤이 안 맞는다고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네.”

대화 내용을 잠깐만 들어도 어떤 배우들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같은 피드백을 받은 이들은 모두 WG 엔터의 배우들이었다.

워낙 천 감독의 호통을 받았기에, 힘듦을 서로 토로하는 건가 싶던 순간.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잘해야 하는 거 알죠?”

“뭐, 당연히 잘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주연이 진희성 선배님이잖아요. 먹칠하지 않으려면 우리 똑바로 해야 한다고요.”

“그건 알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연기하게 된 건, 다 희성 선배님 덕이잖아요.”

“네? 그게 무슨….”

그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닦던 손을 멈추며 대화에 집중했다.

“여기에 WG 엔터, 우리가 이렇게 우르르 들어온 이유. 회사에서 다 힘쓴 거잖아요. 우리가 진희성을 주연으로 줄 테니, 조연 배우들을 전부 꽂아줘라, 이거죠.”

“어쩐지. 그래서 우리 회사 배우들이 많았구나?”

“이 바닥이 다 그렇죠. 듣기로는 오늘 안 온 조연 캐릭터에도 WG 엔터 배우들 더 있을 거라던데?”

툭-

나는 틀어져 있던 수도를 눌러 잠갔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한숨을 삼켰다.

내가 아무리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회사에서 내 이름을 이런 식으로 이용한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조금 전 대본 리딩에서 봤던 미스 캐스팅의 냄새를 풍기던 배우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회사의 윗선들을 곱씹으며 주먹을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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