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40 – 그녀들의 의도 (8)
에블린은 그렇게 라운지를 떠났고.
나는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들어 빤히 바라보았다.
‘1702’
“이게 대체….”
카드를 손에 쥔 채 이리저리 보던 나는 곧장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거 호텔 카드키잖아?”
에블린이 내게 주고 간 카드는 그녀가 머무는 호실의 카드키임이 분명했다.
호텔을 통째로 빌린 것이 아닌, 한 층에 나누어 머물기로 되어 있었고.
나 역시 17층이었으니까.
그녀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내게 자신의 방 카드키를 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충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마음이 순수하게 이야기를 하자고 부른 건 아니라는 것을….
에블린의 끈적한 눈빛.
의미심장한 말투와 표정까지.
더군다나 이제 방에 올라가 무엇을 할지까지 물어본 그녀였기에.
나를 방으로 부르기 위해 자신의 방 카드키를 준 이유는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다는 것일 터.
나는 손에 들고 있는 ‘1702’ 카드키를 빤히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런 게 미국식 유혹인 건가…?”
그리고 앞에 놓인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후.
카드키를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카드키를 챙겨 넣기는 했으나, 그녀의 방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여나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그녀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에블린에게 이성적인 마음은 단 1g도 없었지.
물론 그녀도 내게 이성적인 마음이 가득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
혹은 그저 하룻밤을 즐기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전자도, 후자도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그녀의 방에 가는 것도.
그리고 그녀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도 모두 끌리지 않았다.
나는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1만 년이나 살았는데… 이런 육체적인 끌림에 갈 리가….”
진희성의 몸으로 살게 된 건 오래이지는 않았으나.
내 삶은 벌써 1만 년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육체적인 끌림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아니, 육체적인 끌림 그 자체가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내게 남은 건 1년이 채 남지 않았는데, 이런 일에 흥미가 생길 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끌끌 찼고.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내일 다른 시사회를 하러 긴 비행을 해야만 했고, 이제 이 술자리가 즐겁지만은 않았다.
호텔 방으로 향하며, 주머니 속 카드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라운지를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으로 향했고.
1701.
1702.
에블린이 있는 1702호 앞에 서서 그녀의 호실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은 문에 고정한 채, 손은 주머니 속 카드키를 만지작거렸고.
나는 이내 한숨을 삼켜내며 그 방을 지나쳐 1711호인 내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에서 나오는 길.
호텔 앞에 준비된 차량에 몸을 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밝은 미소와 함께 차에 올라타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희성 씨, 좋은 아침!”
“잘 잤어요?”
그들 역시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에블린,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옆을 지나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어젯밤.
나는 그녀의 카드키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다.
호텔 라운지 바에 카드키를 그대로 두고 간다면, 혹시나 다른 이가 그 카드키를 주워 그녀의 방으로 향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드키를 그곳에 두고 올 수는 없었다.
주머니 속에 고이 챙겨온 카드키.
내 방에 가지고 간 뒤, 그대로 체크아웃을 하게 되는 것도 이상했지.
카드키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기 위해 방 앞을 서성였지만, 그녀와 그 상황에 만나 카드키를 돌려주는 것 또한 못할 짓이었다.
결국, 나는 늦은 밤.
로비로 향해 카드키를 주웠다며 그곳에 맡겼다.
그리고 지금, 에블린을 마주한 것이다.
그녀는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로 나를 흘긋 바라보았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불편한 동행으로 우리를 태운 차량은 호텔을 벗어나고 있었다.
다음 시사회를 위해 탑승한 전용기.
한국에서 인도로 올 때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해 타고 왔지만.
이제부터는 제프리 감독,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과 함께 계속 전용기를 타고 움직이기로 했다.
나와 김 실장은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이야, 할리우드 스케일은 진짜….”
김 실장이 혀를 내두르며 전용기 안을 빠르게 살피자,
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작게 읊조렸다.
“형, 우리 이제 할리우드 스케일 이야기하는 것도 입 아픈 거 아니야?”
“그건 맞지. 진짜 모든 게 다 놀랍다. 뭐만 하면 다 예상이 안 돼. 전 세계 시사회인 것도 놀라웠는데, 전용기 타고 다니는 시사회라니.”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러게. 이러니까 세계에서 유명한 배우가 된 것만 같다.”
내 말에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조만간이지. 이번 영화 나오기만 하면, 너 월드 스타 되는 건 시간문제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였지만, 서둘러 그의 입을 막듯 소리쳤다.
“아, 형. 누가 들으면 비웃을지도 몰라.”
장난스레 던진 내 말에 그는 진지한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다.
“에이, 난 진심인데?”
“뭐?”
“이번 작품이 정말 할리우드로 올라가는 발판인 거지. 앞으로 나도 더 바빠질 준비, 그리고 영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앞으로 영어 쓸 일이 많아질 테니까 말이야.”
김 실장은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했고.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어. 형이 열심히 영어 공부하는 만큼, 그 영어 써먹을 수 있게 내가 더 열심히 연기해볼게.”
그는 주먹을 쥐고 허공에 뻗으며 말했다.
“그래, 희성아. 월드스타 매니저 한번 만들어줘라.”
“하하, 알겠어.”
이내 전용기는 이륙하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전용기.
헤드폰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김 실장이 내 팔을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성아, 나 잠깐 일정 확인 좀 하러 다녀올게.”
그는 저 멀리에 앉은 스태프를 눈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했고.
“응, 다녀와.”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옮겼다.
다시 눈을 스르르 감으려던 그때.
또다시 내 몸을 치는 사람.
나는 헤드폰을 낀 채로 입을 열었다.
“왜?”
툭툭-.
내 말에 대답 대신 몸을 두드리는 사람.
결국, 헤드폰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멈춘 채 눈을 떴고.
내 앞에는 김 실장이 아닌, 에블린이 서 있었다.
“희성 씨, 잠깐 이야기 좀….”
그녀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끼고 있던 헤드폰을 떼어냈고.
에블린은 주변을 쓰윽 살펴본 뒤 내 옆자리에 앉았다.
김 실장이 가자마자 곧바로 온 것으로 보아, 그녀는 김 실장이 자리에서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젯밤의 일로 그녀와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했지만.
그렇다 할 만한 답을 찾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벌써 그녀와의 독대를 가져버리게 된 것이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그녀에게 돌렸고.
에블린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컨디션은 좀 어때요?”
“뭐, 나쁘지 않아요. 에블린은요?”
내 말에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저는 그다지 좋지 않아요.”
“왜요?”
“어젯밤 기다리다가 지쳐 잠들었거든요.”
드디어 어제 상황에 대해 서론을 여는 그녀.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초조함을 드러냈고.
에블린은 내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희성 씨.”
“네.”
“어제 왜 안 왔어요?”
에블린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며 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그녀가 재차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희성 씨, 여자 친구 없지 않아요?”
“예, 여자 친구 없죠.”
내 답에 에블린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그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뭐야, 그럼 대체 뭐예요?”
“…….”
뭐라고 설명해야 그녀가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번 일로 그녀와 차갑게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시작한 전 세계 시사회 투어.
매일 그녀를 보고, 밥을 먹고, 술도 마시고.
함께 일도 하며 웃어야 하기에, 그녀와 서먹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여지를 주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었다.
다시 내게 카드키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앞으로도 수없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녀의 마음을 단번에 거절하되,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방법.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답을 망설였고.
에블린은 입술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코를 찡긋거렸다.
“내가 희성 씨 스타일이 아닌 거예요?”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생각.
곧장 마음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
나는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말아 넣은 채 주변을 살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제스처였지.
그 모습에 에블린도 덩달아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변을 바라보았고.
나는 이내 그녀의 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블린, 혹시 내가 지금 할 이야기… 평생 비밀로 간직해줄 수 있어요?”
내 말에 그녀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더니,
커다래진 눈망울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뭔데요?”
“저… 사실 여자 안 좋아해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저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흠칫 놀란 것이 티가 났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한 느낌이 풍겨왔다.
그러고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에블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을 때까지 희성 씨 비밀은 꼭 지킬게요.”
“고마워요. 우리 좋은 친구로 남아요.”
내 말에 그녀는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에블린에게 에둘러댄 변명.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마음을 거절하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상처는커녕, 오히려 나를 존중하고 응원하는 듯 보였지.
내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지,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 멀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의 모습.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 또한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
며칠간 빡빡하던 전 세계 시사회, 무대 인사가 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국에서의 일정.
“꺄아!”
시사회 극장은 그 어떤 나라에 비해도 이만큼의 환호성은 견줄 수가 없었다.
“희성 오빠!”
나를 향해 소리치는 팬들.
그리고 제프리 감독의 팬들과 리암, 에블린 등 여러 배우들의 팬들까지.
환호로 가득 차버린 이곳에 놀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프리 감독과 여러 배우들은 한국 영화 팬들의 환호에 놀라움과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는 듯 보였다.
온 나라를 돌며 무대 인사를 할 때와는 달리.
나는 고향에 온 듯한 평온한 이 기분에 연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러분, 저희 영화가 마음이 아픈 사건을 다룬 영화지만. 그 안에 슬픔과 더불어….”
이번 무대 인사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설명을 이어갔고.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팬들은 환호했다.
“네!”
“오빠, 저 개봉하면 10번 볼 거예요!”
팬들의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보이며 소리쳤다.
“고마워요. 저희가 열심히 찍은 영화니까, 즐겁게 관람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포함한 배우와 제프리 감독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손을 흔들었다.
극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숨을 길게 내뱉었다.
길었던 시사회 일정이 모두 끝남과 동시에.
마침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이제…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