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32 – 한솥밥 먹는 사이 (4)
침대에 기대 얼굴에 마스크 팩을 올리자마자 울리는 휴대 전화.
지이잉.
[발신인: 김지훈 실장]
김 실장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서둘러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희성아. 혹시 자고 있어?
“아니, 곧 자려고 지금 팩하고 있어.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내일 데리러 가는 시간 잊었을까 봐.
“에이, 안 까먹었지. 몇 달 만에 하는 스케줄인데.”
김 실장은 내 말에 웃으며 답했다.
-우리 드라마 촬영 끝나고 거의 세 달 만에 하는 스케줄이라, 혹시 잊어버렸을까 봐 걱정돼서.
“하하, 아니야. 드디어 제작 발표회를 하는 건데, 어떻게 잊어.”
-그래서 이제 팩하고 자려고?
“응,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서는 건데, 예쁘게 보여야지.”
-알겠어.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테니까, 일찍 쉬고 내일 보자.
“어, 내일 봐.”
오랜만에 하는 스케줄.
남원에서 열심히 찍었던 사전 제작 드라마 ‘닥터’의 제작 발표회였다.
촬영이 끝난 후, 다음 작품을 고르지 않고 충분한 휴식을 즐기고.
드라마로 인해 찌웠던 살을 빼고, 연기 연습에 매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3개월이라는 기간이 훌쩍 지났고.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설 내일을 기다리며, 나는 서둘러 잠을 청했다.
***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미 주차장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배우들.
“안녕하세요.”
나는 서둘러 그들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보냈다.
몇 개월간 지방에서 함께 먹고 자고 촬영을 하며 가까워진 배우들이었지만.
그만큼 긴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따로 만남이 있거나 하진 않았고.
그랬기에 조금은 어색하고 서먹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머, 희성 씨!”
“헐, 희성 선배님?”
하지만 그 어색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색한 기류가 풍겼던 그들의 사이에 내가 등장하자, 그들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빠르게 훑었다.
“잘 지내셨어요?”
“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조연이었던 박하솔이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와 모두를 향해 답했다.
“촬영 때 쪘던 살, 열심히 다시 복구시켰습니다. 하하.”
그 옆에 있던 조연 배우 조충민이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선배님, 그럼 지금 몇 kg까지 빼신 거예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며칠 전에 쟀을 때, 85kg인가? 나왔어.”
“헐, 선배님 키가 185 정도 되셨죠?”
“아니, 나 183이야.”
조충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183에 85kg라기엔, 더 날씬해 보이시는데요?”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사실 몸무게 수치로는 많이 안 빠졌거든. 헬스를 좀 했는데, 지방이 타고 근육이 붙어서 그런지 몸무게는 많이 안 줄었어.”
“이야, 그럼 진짜 이거 다 근육이에요? 저 선배님 팔 한 번만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넉살을 떨며 내게로 다가왔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부끄러운데? 하하.”
그는 서둘러 내 팔을 손으로 주물럭거렸고.
이내 감탄을 쏟아냈다.
“우와, 선배님, 팔이 완전 돌덩이인데요?”
“어휴, 됐어.”
“정말이에요.”
조충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의 말에 박하솔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내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살 빼셨어요? 저도 좀 알려주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음… 적게 먹고 운동 많이 했죠.”
“역시. 안 찌려면 안 먹어야겠죠?”
박하솔은 눈썹을 늘어뜨렸고.
“하솔 씨는 뺄 살도 없으시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작품 끝나고 쉬면서, 너무 쪘어요. 다음 작품 하기 전까지 좀 빼야 하는데, 다이어트는 평생 해도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맞아요. 왜 살 빼는 건 이렇게 힘들까요?”
배우들은 나를 보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때.
차에서 내려 입구로 다가오는 마지막 배우.
송유나였다.
내 앞에 있던 박하솔이 먼저 보고는 그녀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유나 선배님, 오셨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빠르게 다가온 송유나는 내 바로 앞에 서 있었고.
“유나 씨, 오랜만이에요.”
내 인사에 송유나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
그녀가 내 몸을 뚫어져라 보며 눈을 연신 깜빡였고.
“유나 씨?”
내 부름에 그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건, 회사 헬스장.
송유나가 WG 엔터에 입사하기 위해 찾아왔던 그날.
내가 운동을 막 시작했을 때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3개월 만에 만난 나는 굉장히 달라진 몸으로 지금 이렇게 앞에 서 있고.
그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내 모습에 놀란 모양이다.
“저… 유나 씨?”
나는 송유나의 눈을 보며 이름을 불렀고.
송유나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내 부름에 갑자기 멍하던 눈빛을 지워내고.
서둘러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은 뒤, 내게 소리쳤다.
“아, 왜 앞을 가로막고 그래요?”
송유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 옆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다.
***
“안녕하십니까, 오늘 드라마 ‘닥터’의 제작 발표회 사회를 맡게 된 박진행입니다. 그럼 길게 끌지 않고, 바로 닥터의 감독님과 배우님들 모셔서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사회자 박진행의 멘트와 동시에 우리는 발길을 옮겼다.
“그럼 드라마 ‘닥터’의 홍인혁 감독님, 주연을 맡은 진희성 배우님과 송유나 배우님. 그리고 박하솔 배우님과 조충민 배우님, 장태준 배우님을 모셔 보겠습니다!”
우리가 무대에 등장하자,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져 나왔고.
무대에 올라서서 우리는 다 함께 허리를 접으며 인사를 보냈다.
인사와 동시에 터지는 카메라 셔터.
박진행이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이크는 의자 뒤에 각자 준비되어 있습니다. 먼저, ‘닥터’의 감독을 맡아주신 홍인혁 감독님의 인사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홍 감독은 다소 굳게 얼어버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드라마 ‘닥터’를 소중하게 찍어낸 홍인혁 감독이라고 합니다. 저희 드라마 닥터는….”
그는 대사를 외우듯 무대 아래서부터 준비한 멘트를 쏟아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입니다.”
짝짝짝.
박수와 함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드라마 ‘닥터’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고요. 사전 제작으로 이뤄진 이번 드라마는, 저희가 모두 지방에서 합숙을 하며 촬영했습니다. 그만큼 저희의 친분과 합이 드라마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드라마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며 말을 이어갔고.
기자들은 나를 거짓 없이 담아내며, 제작 발표회의 포문이 열렸다.
몇십 분간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이후 기자들은 드라마 내용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네, 마이크 들고 있는 두 번째 줄의 기자분!”
박진행이 기자를 지목했고.
기자는 나를 바라보며 물음을 보냈다.
“진희성 배우님은 촬영 당시, 포동포동한 이미지를 풍기셨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오늘 모습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시네요. 무슨 변화가 있으셨던 겁니까?”
기자의 물음에 박진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안 그래도 포스터에 진희성 배우님과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진희성 배우님이 사뭇 다른 이미지이시긴 했어요.”
내 등 뒤의 커다란 포스터.
그곳에는 살이 잔뜩 찐, 그러니까 촬영 당시의 내 모습이 담긴 포스터가 아주 크게 붙어 있었다.
나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아, 제가 살이 많이 빠졌죠?”
내 말에 기자들은 웃음 대신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누르기 시작했다.
“드라마 배역에 맞춰 몸을 만들어 촬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사전 제작으로 3개월의 촬영을 마친 후에 곧바로 운동을 좀 했습니다.”
박진행은 나와 포스터를 번갈아 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이야, 그럼 촬영 끝나고 나서 지금 몸으로 만드신 거예요?”
“네.”
“와아! 대단하십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운동을 좀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는 송유나가 곁눈질로 나를 흘긋거리며 바라보았고.
내가 마이크를 내려놓자, 곧바로 기자들은 서둘러 타자를 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
“드라마 ‘닥터’의 성공적인 시작을 위하여!”
“위하여!”
우리는 식당이 울리도록 크게 소리치며, 잔을 허공 높이 들어 올렸다.
챙-.
잔은 각자의 앞사람 술잔에 부딪쳤고.
차디찬 술은 그대로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제작 발표회가 끝난 후, 곧바로 회식 장소에 도착한 우리.
제작 발표회에는 홍 감독을 포함해 주연인 나와 송유나.
그리고 조연 배우 3명밖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남원에서 촬영이 끝난 후, 제대로 된 회식을 하지 않았던 우리는 오늘을 위해 모두 자리에 참석했다.
함께 촬영했던 스태프와 단역 배우들까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에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기에 정신이 없었다.
“다들 잘 지냈어?”
촬영 당시 많은 대화를 나눴던 단역 배우들의 테이블로 다가가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고.
그들 역시 누구보다 나를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선배님,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우리는 연달아 술잔을 부딪치며, 몇 개월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벌써 회식을 시작한 지 5시간이 흘렀고.
2차, 그리고 3차로 이어진 회식에 그 많던 사람들은 이제 소수만 남게 되었다.
3차 술집에서 잡은 테이블은 고작 3개.
다들 집으로 향하고, 남은 인원은 11명뿐이었고.
나는 자리에 앉으며 남은 사람들을 둘러보다 눈을 의심했다.
11명이라는 적은 숫자에 놀란 것이 전혀 아니었다.
다만, 그 11명의 사람에 송유나가 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것이지.
눈까지 비비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송유나가 3차에 남아 있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항상 1차, 아니 그동안 송유나는 회식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가끔 오더라도 1차가 끝이 나기 전에 늘 집에 가고는 했으니까.
그런 송유나가 지금 이 3차의 자리에 남아 있다니!
믿기지 않을 수밖에.
그렇다고 그녀가 술을 많이 마셔서 얼떨결에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송유나의 얼굴은 빨개지거나, 술에 취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사람들과 좀 어울리고 싶은 건가?
나는 그런 송유나의 태도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앞에 앉은 단역 배우 정아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선배님, 저번에 촬영 끝나고, 몰디브 가셨죠?”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선배님 SNS에서 봤죠.”
“아, 그거 글 내렸는데 봤어?”
“네, 안 그래도 그거 왜 갑자기 내리셨나 궁금했어요. 사진 진짜 예뻤는데, 왜 글 삭제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냈다.
당시 악플에 게시물을 하루 만에 내렸는데, 그걸 확인한 모양이다.
“사실… 거기에 악플이 달려서, 자꾸 신경 쓰여서 그냥 삭제해 버렸어.”
내 말에 김민규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말했다.
“선배님한테 악플을 다는 사람도 있습니까?”
“어휴, 당연하지. 뭐, 악플을 크게 신경 안 쓰려고 하기는 하는데. 그 게시물에 부모님 사진을 같이 올렸거든. 그랬더니, 부모님 욕을 쓴 악플러가 있더라고.”
김민규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주먹을 테이블에 내려치며 소리쳤다.
“부모님 욕이요?”
“어, 진짜 악플러들 너무하더라.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길래, 그렇게 부모 욕을 쓰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
내 이야기를 들은 배우들은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런 놈들은 진짜 고소를 먹어야 한다니까요?”
“부모님 욕하는 건 진짜 못 참죠!”
“맞아요. 그래야 정신을 차려요. 선배님, 악플러 고소하셨어요?”
그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그 악플러가 다는 악플을 그동안은 참고 참다가, 부모님 욕에 나도 눈이 돌아서 결국 고소했어.”
“잘하셨어요. 그런 놈들은 진짜 법의 맛을 보여줘야 해요.”
“맞습니다. 악플러들 직접 얼굴 보고, 혼쭐을 내줘야 한다니까요!”
“진짜 악플러들은 철퇴를…!”
배우들은 내 악플에 몰입해 잔뜩 찡그린 얼굴로 한참 토론을 펼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