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6)
“안녕하십니까.”
“네, 왔어요?”
아무도 없는 촬영장.
텅 빈 촬영장에 스태프들부터 한 명씩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어느 팀보다 일찍 자리를 지킨 건, 조명 팀이었다.
바로 어제 조명 사고가 있었으니까.
“조명 제대로 확인한 거 맞지?”
조명 감독은 조명 스탠드를 손으로 흔들며 아래 스태프를 향해 물었고.
그는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조명 감독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어제 진짜 큰일 날 뻔한 거 알지? 아니, 이미 큰일이 난 거긴 한데. 희성 씨 아니었으면, 유나 씨 머리로 떨어질 뻔했다고.”
이미 조명 감독에게 수차례 혼이 났던 스태프.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면, 하아…. 진짜 말도 안 나온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됐어. 나도 한 번 더 확인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으니까. 이거 내가 한 번 다시 보게 내려봐.”
“또 확인하시게요?”
“당연하지. 이제 또 그런 일 있으면, 너나 나나 이 바닥에서 절대 일 못 해.”
조명 감독의 말에 그는 서둘러 스탠드를 내렸다.
“예, 바로 내리겠습니다.”
“오늘 특히나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지?”
“네, 더 신경 쓰겠습니다.”
조명 팀을 지나가는 연출팀.
연출팀 스태프 두 명이 빠르게 조명 팀을 훑으며 옆으로 빠져 걸어갔다.
“어휴, 어제 잠들기 전까지 조명에 희성 씨 이야기뿐이었어요.”
“맞아요. 진짜 희성 씨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걸요.”
그들은 조명 팀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희성 씨가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휴, 상상도 하기 싫다.”
“그것보다 유나 씨 머리로 떨어졌으면, 진짜 더 큰일 났던 거 아닙니까?”
“그렇죠. 유나 씨 성격에, 다치기까지 했어 봐요.”
그들은 송유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다. 어제 유나 씨 연기 봤죠?”
“당연하죠. 어제 유나 씨 때문에 NG 엄청나게 많이 났잖아요.”
전날 촬영장에서 진희성이 병원으로 떠난 후, 촬영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진희성이 의식을 찾은 뒤에야 촬영이 재개되었지.
하지만 촬영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송유나는 조명 사고가 난 이후.
이상하리만큼 멍해진 얼굴과 얼어붙어 버린 말투로 연기를 이어나갔고.
그 모습에 당연히 홍 감독은 연신 NG를 외칠 수밖에.
송유나가 얼이 빠진 듯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녀의 온 신경이 진희성에게 가 있었던 탓이다.
자신을 위해, 진희성이 온몸을 던져 구해 냈으니까.
송유나는 진희성이 걱정되는 마음에 온 신경이 병원에 가 있었지만.
그녀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놀라서, 진정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치부하는 스태프와 주변 사람들의 말에.
송유나는 그냥 맞는 척을 하며, 그렇게 시선을 돌렸다.
“유나 씨도 놀랄 만하지.”
“네, 저 같아도 내내 얼이 빠져 있을 것 같긴 해요.”
“예,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유나 씨도 자신을 구해준 희성 씨한테 고맙거나 미안한 마음을 느끼기는 하겠죠?”
평소 그녀가 보여준 면이 있기에.
다들 걱정하는 사람은 진희성뿐이었다.
“뭐… 아무리 차가운 사람이라도, 몸 던져서 자신을 구해줬는데. 그러지 않을까요?”
“유나 씨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잖아요.”
이에 그는 대답 없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송유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촬영장에 도착했다.
전날과 별반 달라진 것 없는 표정과 말투.
“오빠, 나 먼저 내린다.”
“응, 짐 챙겨서 바로 갈게.”
송유나는 최 실장을 뒤로한 채 현장으로 걸어갔고.
저 멀리에 홍 감독과 진희성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녀는 서둘러 발길을 옮겨 진희성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를 발견한 홍 감독과 진희성.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유나 씨.”
그들의 인사에 송유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꾸벅거렸다.
“네, 안녕하세요.”
인사 후, 별다른 이야기 없이 진희성과 홍 감독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신에서 유나 씨 몸을 한 손으로 받쳐야 하는데, 괜찮겠어?”
홍 감독의 말에 진희성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하죠.”
“아니, 희성 씨 어제 어깨 다쳤잖아. 아니면 반대 팔로 해볼래?”
그의 말에 진희성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감독님 말씀처럼 반대쪽에서 촬영하면 영 각도가 안 예쁘게 나올 것 같습니다. 제 어깨, 정말 괜찮아요.”
진희성의 열정에 홍 감독은 흐뭇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안에는 은은한 걱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야 촬영을 위해서 잠깐 희성 씨가 고생해주는 건 너무 고마운데, 바로 어제 어깨 부상을 당한 상황이라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홍 감독의 말에 진희성은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며 답했다.
“보세요. 어제 병원도 다녀오고, 밤에 찜질도 했더니 감쪽같습니다. 하하.”
진희성의 말에 홍 감독은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어휴, 내가 희성 씨 때문에 못 산다. 하하하.”
그러고는 진희성의 어깨를 조심스레 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촬영해보고, 너무 무리인 것 같다 싶으면 바로 말해.”
“예, 알겠습니다.”
홍 감독이 옆에 서 있던 송유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나 씨도 여기 신에서 희성 씨 몸에 기댈 때, 조금만 몸에 힘주고 버텨줘. 희성 씨 어깨 아프니까.”
그의 말에 송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럼 준비하고 바로 촬영 들어갈게요.”
홍 감독은 촬영 준비를 위해 자리를 옮겼고.
진희성 역시 자신의 매니저에게로 발길을 움직였다.
송유나는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진희성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괜찮은 건가…?”
작게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진희성에 대한 걱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진희성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송유나의 모습.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손에 있던 대본을 펼쳤다.
“괜찮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안 아플 수가 없겠지. 오늘은 정신 차리고 연기하자.”
송유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뒤.
“레디, 액션!”
카메라 앞에 선 진희성과 송유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홍 감독의 사인에 카메라에는 빨간 불이 들어왔고.
서로의 대한 마음을 어렴풋이 확인한 그들은 애틋한 눈빛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럼 어제 병실에 들어온 이유가 나 때문이에요?”
진희성은 촉촉한 눈으로 송유나에게 물었고.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제가 뭐 하러 그 병동으로 갔겠어요.”
그때.
쾅!
효과음을 통해 비상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병원 직원들에게 걸릴세라 놀란 송유나가 계단 끝에서 발을 헛디뎠다.
“어머!”
송유나는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넘어질 듯한 자세를 취했고.
곧바로 진희성은 송유나의 몸을 낚아챘다.
넘어지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붙잡았다.
숨결이 들릴 듯이 가까워진 그들의 사이.
“괜찮…아요?”
진희성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송유나의 얼굴에 밀착한 채 말했고.
송유나는 진희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대사를 해야 하는 송유나.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병실에…. 그러니까….”
“컷, NG!”
송유나의 대사 실수였다.
홍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진희성은 송유나를 감싸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고.
송유나는 고개를 숙여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대사를 어버버해 버린 그녀.
송유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발그레해진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냈다.
‘뭐야… 너무 가까이 마주 보고 있어서 그런 건가? 얼굴이 왜 빨개져. 나… 왜 이러지?’
홍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송유나를 향해 외쳤다.
“유나 씨, 방금 감정선 진짜 좋았는데. 한 번도 대사 이렇게 틀린 적 없으면서, 어제오늘 왜 그러지?”
“다시 하겠습니다.”
송유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진희성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같은 시간, 펜션의 한 방 안.
오늘 촬영이 없는 단역 배우들은 한 방에 모여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민규는 내일 촬영이야?”
“어, 나는 어제랑 내일 촬영이고. 오늘 하루 쉬는 날.”
“그거 드라마 시작한 거 모니터하신 분?”
그들은 각자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고.
그때.
문을 열고 소리치며 들어오는 박철민의 모습.
“나는 왜 안 불렀어!”
그는 부리나케 달려와 김민규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얼른 와, 철민아.”
박철민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순식간에 모든 단역 배우의 시선을 빼앗았다.
“어제 촬영장에 계신 분, 손?”
그의 말에 김민규와 몇 명이 손을 들었고.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확인한 박철민은 무릎을 꿇어 허리를 높인 채 입을 열었다.
“크으, 그럼 나머지 분들은 어제 그 엄청난 순간에 안 계셨던 겁니까?”
그의 말에 손을 들지 않은 단역 배우들은 눈을 초롱거리며 말했다.
“뭔데요?”
“어제 어마어마했는데, 이걸 맨입으로 하기 너무 아까운 이야기라니까요?”
박철민은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양,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어제 촬영장에서 우리 희성 선배님과 유나 선배님이 촬영을 하고 있었어요.”
그의 말에 손성진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잘라냈다.
“우리 희성 선배님? 하하, 너 희성 선배님한테 ‘우리’라는 단어 붙이는 사이 맞냐?”
손성진의 말이 끝나자, 박철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소리쳤다.
“당연하지. 희성 선배님은 내 롤 모델이시라고. 나는 현장 가면, 희성 선배님부터 인사드린다니까?”
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박철민은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 희성 선배님이 연기를 멋지게 이어가는데…!”
그는 자신의 무용담을 펼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재연을 펼쳤고.
“맞다, 민규도 어제 거기에 있었지?”
“응.”
“일어나 봐. 네가 유나 선배님 역할 해.”
“그렇게까지 재연한다고?”
김민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박철민의 옆으로 향했다.
“여기서 조명이 팍! 떨어진 거죠.”
앞에 관객처럼 앉은 단역 배우들은 한껏 집중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근데 우리 희성 선배님이 진짜 아이언맨처럼. 파바박! 달려가서 유나 선배님을 감싸 안았어요!”
“이야…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진짜… X 쩔었어요.”
박철민의 격한 반응.
하지만 그 말에는 전혀 거짓이 없다는 것을 보탠다는 듯이 김민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희성 선배님, 진짜 대박이셨어.”
“나 진짜 그거 보고 희성 선배님한테 한 번 더 반했잖아.”
김민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근데 더 대박인 거 알려줄까?”
그의 말에 모두 김민규에게로 시선이 옮겨졌고.
“유나 선배님 머리를 받칠 때, 땅에 머리가 부딪칠까 봐 희성 선배님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쌌어.”
“긴박한 그 와중에?”
김민규는 머리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어, 근데 뭔 놈의 손바닥은 또 그렇게 큰지. 나 진짜 선배님한테 완전 반했어.”
그들은 쉬지 않고 진희성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고.
“쩔었다. 나중에 메이킹 필름 나오면 대박 나겠는데?”
“맞네. 카메라 계속 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이야, 꼭 나왔으면 좋겠다. 나도 희성 선배님 보고 싶은데?”
그들은 진희성에게 빠진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고.
“근데 유나 선배님은 괜찮으시대?”
손성진의 물음에 박철민은 손을 허공에 가로저으며 답했다.
“야, 말도 마. 유나 선배님 성격… 알잖아.”
그의 말에 손성진은 단번에 말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근데 그래도 자기를 구해준 건데, 화낼 일도 없을 거 아니야.”
“아니야. 희성 선배님이 병원에 가자마자, 자기 매니저한테 머리 헝클어졌다고 짜증을 내더라니까?”
박철민의 말에 모두 놀란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희성 선배님 덕분에 안 다쳤는데, 그 와중에도 짜증이라니. 진짜 한결같은 성격이시다.”
그들은 다시 진희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