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31 – 기회는 운명처럼 (5)
“레디, 액션!”
홍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진희성과 송유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빠르게 배역에 몰입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로 모두 그들에게 집중했고.
카메라는 진희성의 작은 눈빛 하나, 송유나의 시선 하나라도 놓칠세라 빠르게 움직였다.
진희성은 자신이 맡은 배역과 하나가 된 듯, 숨소리에도 스태프들의 시선을 훔쳐갔다.
“하아….”
한숨을 쉬는 진희성은 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런 행동에 대한 내용은 대본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몸을 최대로 꺾어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는 그의 답답함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묘사였고.
그 행동에 홍 감독은 뿌듯한 얼굴로 카메라에 비치는 진희성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저거지!”
홍 감독은 오늘도 진희성의 연기에 감탄하며 입술을 올리던 그때.
지이익-.
철컥.
지이이이익.
조명을 매달고 있는 조명 스탠드 끝 나사가 살짝 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헐거워진 구멍에서 나사가 툭 떨어지고 말았다.
“어… 안 돼!”
그 나사를 보고 놀라 소리친 스태프.
하지만 이 상황을 알 리가 없는 홍 감독은 스태프의 목소리가 카메라에 담겼기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순간.
나사가 빠지자 자연스레 뜨겁게 달궈질 대로 달궈진, 커다란 무게를 견디지 못한 조명이 스탠드에서 툭 떨어졌고.
“피해…!”
스태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
하늘을 바라보며 대사를 내뱉던 진희성 역시, 조명이 흔들거리는 것을 포착했다.
그러나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조명.
그 조명은 진희성의 시야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었고.
조명이 떨어질 위치는 다름 아닌, 그의 앞에 서 있는 송유나의 위치였다.
진희성은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빠르게 그녀의 앞으로 달려갔다.
“…어?”
송유나는 갑자기 자신을 와락 껴안는 진희성의 태도에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진희성은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감싸 안았다.
퍽-!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이 모든 건, 몇 초 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커다란 조명이 진희성의 어깨에 부딪치며 그대로 데구루루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돼!”
“희성아!”
조명이 떨어지자마자 현장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스태프, 홍 감독, 김 실장, 송유나의 매니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송유나를 꽉 감싸 안고 있는 진희성.
그리고 그 안에 움츠리고 있는 송유나까지.
그들은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웅크린 채 있었고.
김 실장이 빠르게 달려와 송유나를 안고 있는 진희성의 몸을 끌어당겼다.
“희성아, 괜찮아?”
김 실장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고.
목소리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툭-.
김 실장이 진희성의 몸을 돌리자, 그는 의식을 잃었는지 손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희성아… 희성아!”
그 모습을 본 김 실장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고.
이내 목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119… 구급차 불러요, 빨리.”
그의 말에 가장 가까이 있던 스태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전화를 걸었고.
송유나의 매니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의식을 잃은 진희성에게 다가갔다.
“희성 씨, 눈 떠봐요.”
“희성 씨, 내 목소리 들려?”
그리고 최 실장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송유나에게 다가갔고.
송유나는 시퍼레진 입술을 파르르 떨며 진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나야, 괜찮아?”
최 실장의 목소리에도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여전히 진희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송유나의 몸에 커다란 담요를 덮으며 말했다.
“유나야, 내 목소리 들려? 나 잘 보이고?”
최 실장의 말에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겠다, 우리도 같이 구급차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유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는 멀쩡해. 하나도 안 다쳤어.”
“그래도 놀랐으니까….”
“나 정말 괜찮아. 나 좀 일으켜줘.”
“응, 그래도 혹시 아프면 꼭 말해.”
최 실장은 담요를 감싸고 있는 송유나를 꽉 잡아 일으켰다.
“여기요!”
빠르게 온 구급차.
스태프는 손을 흔들어 구급대원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이내 진희성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모습에 스태프, 배우 너 나 할 것 없이 우르르 구급차가 떠나가는 것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희성 씨는 괜찮을까?”
“조명 무게가 엄청날 텐데, 특히 위에서 떨어진 거라 충격이 클 거야.”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어떡해….”
몇몇은 눈시울을 붉히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진희성이 병원으로 이송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
깜깜한 어둠 속.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두통보다 심한 건, 왼쪽 어깨였다.
무언가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아파오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고.
눈을 감은 채 온 얼굴을 찡그리자, 귓가에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희성아…!”
“으윽.”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신음이 터져 나왔고.
“희성아, 내 목소리 들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선명해졌다.
“희성아!”
팟-!
소리에 이끌려 몸에 힘을 잔뜩 주고 눈을 뜨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
하얀 천장,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목소리.
그리고 하얀 커튼으로 둘러싸인 이곳.
“희성아, 나 보여?”
눈앞에 커다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형.”
김 실장이었다.
그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내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응, 보여.”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얼굴로 내 손을 끌어 자신의 볼에 올렸다.
“당연하지, 형을 왜 못 알아봐.”
내 말에 닭똥 같은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볼에 올리고 있던 내 손에 김 실장의 눈물이 닿았고.
나는 그 촉감에 몸을 떨며 소리쳤다.
“아악, 어깨.”
“아, 맞다.”
김 실장은 내 손을 다시 침대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으며 말했다.
“너 진짜 큰일 날 뻔했어.”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고.
김 실장은 침대 옆 작은 의자에 앉아 내게 말을 이어갔다.
“어쩌자고 갑자기 송유나를 막아서 네가 대신 조명을 맞아. 너 기절까지 했어.”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순식간에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다.
“맞다, 조명.”
“어, 이제 기억났어?”
“응, 연기하다가 하늘을 봤는데 갑자기 조명이 떨어지더라고. 그게 유나 씨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내가 안 막으면… 유나 씨 진짜 큰일 났을 거야.”
내 말에 김 실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어쩌자고 몸으로 막았어. 너도 쓰려졌었어. 기절했다고, 인마.”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방법밖에 없었어.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뭐라셔?”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대. 뼈에 문제도 없고. 진짜 천만다행이지. 거기서 각도만 조금 틀어졌으면, 너도 어깨가 아니라 머리에 맞을 수도 있었다고.”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달아 숨을 내쉬었고.
나는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어깨에 맞게 컨트롤한 게 내 순발력이지. 하하.”
“농담할 일이냐?”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뼈에 문제가 없으니까, 다행이네.”
“그렇긴 하지. 깁스 안 해도 된다고 하고. 진짜 위험했어.”
김 실장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아픈 데는 더 없어?”
“어, 오히려 이렇게 병원에서 한숨 자니까, 몸도 더 개운한데?”
“그래도 더 아플 수 있으니까, 조금 더 누워 있다가 가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형, 걱정할까 봐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아. 평소에 운동을 해서 그런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답했다.
“근육통처럼 살짝 욱신거리는 거 빼고는 전혀 문제없어.”
“젊어서 그런 건가,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 건가. 진짜 대단하다.”
“하하, 근데 촬영은?”
내 말에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잠시만, 다들 걱정하시겠다. 우선 너 깨어났다는 연락 좀 하고 올게.”
그는 서둘러 휴대 전화를 들고 한쪽 귀퉁이로 걸어가 통화를 했고.
잠시 뒤 내게로 다가온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걱정되는 마음에 촬영 중단하고 있었나 봐. 괜찮다니까, 이제 촬영 재개한대.”
“다행이네. 우리도 얼른 가자.”
“우리는 좀 쉬고 가도 돼. 오늘 희성이 너 촬영분 미뤘다니까, 이 수액만 다 맞고 가자.”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리며 남은 수액을 바라보았고.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침대에 몸을 기대 누웠다.
“알겠어. 괜히 나 때문에 촬영이 멈춰서 죄송하네.”
“아니야. 너 아니었으면, 촬영장 더 난리였을 거야.”
“그래도.”
김 실장이 내 몸 위로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촬영장 걱정은 말고, 몸 걱정부터 해. 얼른 눈 좀 더 붙여.”
“알겠어.”
***
“형, 오늘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나 차 정리만 하고 올라갈게. 먼저 호텔 들어갈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그럴게.”
“아프면 바로 전화하고, 필요한 거 있어도 연락해.”
“아이고, 알겠습니다. 하하.”
평소에도 워낙 나밖에 모르는 김 실장이었는데.
몸이 다치자 그의 걱정은 배가되었고.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차에서 한 발짝 내리며 발길을 옮겼다.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내 방이 있는 층수를 클릭했다.
호텔이 그리 큰 건물은 아니었기에.
배우들이 머무는 층과 감독과 일부 몇 명의 스태프가 머무는 층이 달랐다.
딩동-.
금세 도착한 엘리베이터.
천천히 한 발을 내디뎠고.
끝에 위치한 내 방을 향해 걸어가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
미간을 찌푸려 눈에 힘을 주자, 그 실루엣이 선명히 보였고.
내 문 앞에 등을 기댄 채 발을 꼼지락대는 송유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나 씨가 왜 내 방 앞에 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내 방으로 향했고.
송유나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내가 다가가고 있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흠흠.”
갑자기 내가 나타나면 놀랄 거라 생각해, 인기척을 내기 위해 헛기침을 했고.
그 소리에 몸을 움찔거리며 놀란 송유나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왔어요?”
“네, 방금요.”
송유나는 내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켜 자신의 양손을 조물거리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내 눈이 아닌 어깨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고.
나는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답했다.
“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저기 그….”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송유나는 몸을 배배 꼬듯 자신의 양손을 연신 조물거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었다.
“저… 그….”
그녀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한 발짝 다가갔고.
“아, 아니에요!”
송유나는 내 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빠르게 나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달리듯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