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27 – 연말의 온도 (4)
찰칵, 찰칵-.
셔터 음은 끊이지 않았고.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애쓰며,
부릅뜬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꺄아, 진희성이다!”
“잘생겼다!”
수많은 사람들.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이며 앞을 향해 걸어갔고.
바닥에 쫙 깔린 붉은 레드 카펫.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포토 존으로 다가갔다.
수십 개의 카메라 플래시는 포토 존에 서 있는 내게로 향했고, 나는 어느새 그 불빛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을 감거나 얼굴을 찌푸릴 수는 없었다.
그 모습 그대로 기사에 실릴 테니까.
최대한 밝은 얼굴을 유지하며 손을 흔들었다.
“오른쪽 좀 봐주세요, 희성 씨.”
“왼손으로 하트 만들어 주세요.”
“앞에 보고 윙크 한번 해주세요!”
기자들의 요구에 맞춰 갖가지 표정과 포즈를 취하며 임했고.
드디어 레드 카펫의 사회자인 유현우가 내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희성 씨. 지금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MBS 시청자 여러분과 팬분들을 위해 인사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스태프가 건네준 마이크를 잡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MBS 시청자 여러분. ‘상간녀의 유혹’의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네, 이번에 신인상 후보에 오르셨는데, 소감 한마디 여쭐게요.”
그는 밝게 웃으며 내게 물었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리고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에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우선 수상 여부를 떠나, 이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 쟁쟁한 후보분들이 많으셔서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메인 카메라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며 익살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인상을 주신다면, 거절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하하.”
내 말에 유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이번 신인상 후보에 오르신 드라마 ‘상간녀의 유혹’에서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불륜남. 사랑해서는 안 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나쁜 남자를 연기해 주셨는데요.”
그의 말에 곳곳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고.
유현우의 말에 공감하듯 플래시와 카메라 셔터 음이 연이어 터졌다.
“그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음… 드라마가 방영할 때, 식당에 가면 그 인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초반에는 반찬을 놓아주실 때도, 제가 아닌 일행 쪽으로 밀어 주시더라고요. 하하.”
유현우가 내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죠. 초반에는 워낙 캐릭터가 바람남. 천하의 못된 캐릭터로 나왔으니까, 저 같아도 희성 배우님이 오시면 괜히 노려봤을 것 같아요. 어떻게… 기분이 나쁘셨을 수도 있겠어요.”
그의 말에 나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그렇게 몰입해서 저를 미워하셨던 건, 제가 그만큼 잘 소화해 냈기에 그렇게 봐주셨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습니다.”
유현우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과 팬 여러분께 연말 인사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MBS 시청자 여러분, 올 한 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열심히 달려오신 만큼, 남은 연말은 가족들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하게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올 한 해 안방을 뜨겁게 달궜던 신인상 후보 진희성 배우님을 만나 봤습니다. 조금 이따가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요.”
나는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는 스태프의 안내를 받았다.
스태프의 지시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들려오는 환호에.
걸어가는 내내 가슴이 웅장해졌다.
***
아직 불이 환하게 켜진 이곳.
MBS 무대는 TV로 보았을 때보다 더 크고 높은 듯했다.
매년 TV로만 보던 이 장소에 내가 직접 왔다는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나고 있었다.
“이야….”
입구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안을 살펴보았고.
신인상 후보인 나는 여러 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빨리 입장한 편이었다.
쟁쟁하고 높은 상의 후보일수록 나중에 입장했으니까.
아직 자리에 앉은 사람은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나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고.
고개를 돌리며 아는 사람을 찾던 가운데.
“…어?”
저 멀리 보이는 한 사람.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감독님!”
내 부름에 장호철 감독이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소리쳤다.
“아이고, 우리 희성 씨.”
“감독님, 잘 지내셨죠?”
“그럼. 희성 씨는 내가 여기저기서 작품으로 많이 만났지. 하하.”
장 감독은 나와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에서 만난 인연이 있다.
그 작품이 큰 흥행을 하지는 못했다.
흥행 보증 수표였던 최서빈의 주연에도.
영화에서 늘 부진한 성적을 냈던 강찬성의 징크스라 불리며, 엄청난 관객 수가 나오지는 않았지.
그 이후 늘 충무로에만 머물던 장 감독은 올해 처음으로 드라마에 도전을 했다.
물론, 늘 영화에만 있기에 그 드라마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장 감독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서빈이랑 또 같이 작품 했더라고?”
“아, 맞습니다.”
“그거 아주 난리가 났던데? PBC 방송사이긴 한데, 거기도 후보 올랐지?”
그의 말에 나는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예, 감사하게도 인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하하하, 내가 이런 배우와 함께했다는 게 너무 영광이구먼.”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그때 감독님이 저를 데리고 해주셔서 제가 영광이죠. 그때 제가 있으니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던 거잖습니까.”
“아유, 우리 희성 씨는 겸손하고 말까지 이렇게 잘하니까, 앞으로 더 쭉쭉 올라갈 거야.”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와 악수를 주고받은 후,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서인우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인우야, 왔어?”
“어, 우리 신인상 배우님 아니야? 하하.”
서인우가 너스레를 떨며 내 몸을 쓰다듬었다.
“그냥 후보인데 무슨…!”
우리가 하하 호호 떠들며 대화를 나누던 그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민영이 입구에서 들어와 우리에게로 향했다.
신민영과 어색한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불편하고 멀어진 사이인 전 남자 친구, 서인우가 있었지.
그들은 서로의 눈을 겨우 피하고 있었고.
다른 자리에 앉고 싶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상간녀의 유혹’이라고 적힌 한 줄의 라인.
그곳에 각자의 이름이 부착되어 있었고.
내 옆에는 신민영, 그리고 그 옆은 서인우의 자리였으니까.
서인우는 그녀를 모른 체하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선배 아니면, 누가 신인상을 받아. 딱 선배 거야.”
“됐어, 인마.”
나는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아냈다.
또 다른 신인상 후보에는 신민영도 있고.
아무리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들, 굳이 그녀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웅성거리는 이곳.
수많은 배우들과 감독, 작가들이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나와 서인우, 신민영도 이름을 찾아 자리에 앉았고.
그때.
“희성 씨!”
앞쪽에서 여전히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장 감독이 손을 뻗어 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모든 이들의 시선은 나를 향했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네, 감독님.”
“잠시만.”
그는 뻗은 손을 흔들어 자신에게 와달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장 감독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희성 씨, 내가 너무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아… 네.”
장 감독은 뒤를 돌아 재차 손짓하며 내게 말했다.
“사실, 희성 씨한테 인사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한테 부탁을 하더라고. 괜찮지?”
그의 말에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그러자 이내 그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실크 소재의 블랙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모두 올려 머리를 묶고 있었고.
얼굴을 보는 순간,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지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제가 희성 배우님 너무 팬이라, 장 감독님과 친분이 있다고 해서 인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아유, 저도 팬입니다. 이번에 장 감독님과 드라마 찍으셨잖아요. 잘 봤습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듯 내게 물었다.
“어머, 그것도 보셨어요?”
“당연하죠. 장 감독님이 드라마 찍으셨는데, 당연히 봤죠. 지현 님 연기도 너무 잘 봤어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저는 희성 님이 예전에 단막극으로 하셨던 시계공과 무희 있잖아요. 그때부터 팬이 돼서….”
민지현은 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장 감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어깨에서 손을 빼며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팬이라, 앞으로 좋은 기회가 있으면 꼭 함께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게 말했고.
나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저도 너무 좋죠. 다음에 꼭 함께 호흡을 맞췄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자신에 손에 들린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민지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저 혹시….”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녀는 휴대 전화의 화면을 열어 자신의 몸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민지현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서둘러 그녀의 전화를 받아 들었다.
“아, 그럼요.”
서둘러 번호를 저장한 뒤,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눈웃음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봬요. 오늘 신인상 꼭 타시길 제가 응원하고 있을게요.”
“하하, 감사합니다.”
민지현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
자리로 돌아오던 그때.
아직도 입구에서 배우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 배우들 사이에 송유나가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HS 엔터에 있을 때도 회사에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회사를 옮기고 난 후, 더욱 그녀를 만날 일이 없었다.
함께 촬영하지 않는 이상, 송유나를 만날 기회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녀와 막역하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송유나는 붉은색의 펑퍼짐한 드레스를 손으로 잡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이내 내 쪽으로 다가올 때쯤.
나는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유나 씨, 안녕하세요.”
늘 반갑게 인사해도 돌아오는 대답이 쌀쌀맞고 차가운 건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일인지,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오랜만이네요.”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답.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길을 보내고 사라졌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인사를 받는 그녀의 태도에 놀랄 수밖에.
그렇다고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고.
나는 홀로 걷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유나 씨 잘 지냈어요?”
“네… 뭐 똑같죠.”
“이번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데, 축하드려요.”
송유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1월에 했던 드라마라, 수상은 기대 안 해요.”
“그래도….”
송유나는 앞을 향해 걸어가며 슬쩍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그나저나 이번 드라마 연기 잘 봤어요.”
“…….”
그녀의 입에서 칭찬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감사해요.”
금세 송유나의 자리에 도착했고.
그녀는 내게 다른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을 찾아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뭐지?
예전보다 온화해진 느낌이랄까.
그녀가 나에게 갑자기 태도가 바뀔 만한 일은 없었는데.
그저 연말이라 그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