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27 – 연말의 온도 (3)
“PBC, MBS… 둘 다.”
김 실장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정말 둘 다라고?”
그에게 되묻는 내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PBC와 MBS의 시상식.
물론 내가 아닌 주변에서는 이번 연말을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하기는 했지만.
기대한 만큼 실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설레지 않고 있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시상식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일 거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하지만 김 실장의 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어느새 쿵쾅거리는 심장 탓에 숨까지 가빠오고 있었다.
흥분한 나를 알아차렸는지, 김 실장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빛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응, 거짓말 아니고, 정말 두 방송사에서 다 연락이 왔어.”
“하아… 이런 날이 오다니….”
너무나 기쁘고 가슴이 벅차왔지만.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배우를 시작하면서부터 늘 꿈꿔왔던 시상식이라는 무대.
그곳에 내가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나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계속해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고.
김 실장이 연습실 한쪽에 놓인 생수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항상 고생 많았지만, 올해는 특히나 더 열심히 했잖아. 그 결과인 거야.”
건넨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격양된 마음을 다독이며 심호흡을 길게 한 후에야 김 실장을 향해 말했다.
“연말에 방송사 어디든 시상식 가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두 곳에서 다 초대를 받을 줄은 몰랐네.”
그제야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답했다.
“더 대박도 알려줄까?”
“뭐야, 뭐가 더 있어?”
몸을 김 실장 쪽으로 당기며 그의 대답을 경청했다.
“MBS는 신인상 후보고, PBC는 인기상 후보에 올랐어.”
“…미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서둘러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봐. 내가 올해 연말은 따뜻할 거라고 했잖아.”
김 실장이 밝게 웃고 나를 기특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내가 꿈꾸던 완벽한 후보였다.
주연을 맡았던 MBS 드라마 ‘상간녀의 유혹’에서 신인상 후보.
엎어질 뻔했던 PBC 드라마 ‘블랙맨’에서는 인기상 후보.
물론 두 가지 다 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단 하나도 받을 거라는 확신조차 없지.
하지만 이미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영광스러웠다.
시상식에 갈 수 있다는, 초대를 받았다는 자체가 내게는 행복이었지.
배우가 된 이후로 연말 시상식을 꿈꿔온 게 벌써 몇 년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니까.
김 실장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상 받게 된 거 축하한다.”
나는 그의 손을 툭 치며 답했다.
“에이, 축하는 무슨. 아직 후보잖아.”
“그래도 모르는 일이지. 두 개 다 받을지도?”
그의 말에 손을 뻗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휴, 그러지 마, 형.”
말과는 다르게 배시시 올라가는 입꼬리.
나는 피식 웃으며 작게 읊조렸다.
“근데 상상만 해도 좋기는 하다….”
“나도. 희성이 네가 상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떨려.”
시상식 날을 상상하며 행복에 젖어 있던 그때.
나는 서둘러 휴대 전화의 일정표를 열었다.
“형, 그래서 시상식은 언제야?”
“28일이랑 31일.”
“어디 방송사가 28일인데?”
“MBS가 28일. 31일이 PBC야.”
나는 일정을 체크하며 말했다.
“31일에는 PBC 방송국에서 새해를 맞이하겠네. 설렌다.”
***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길거리는 정점을 찍은 듯했다.
온 거리에는 반짝이는 조명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캐럴은 말할 것도 없었지.
한파가 온 날씨였지만, 길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푹 눌러쓴 모자, 커다란 마스크를 낀 채 공원을 걷고 있었고.
긴 패딩으로 몸까지 칭칭 감으니 나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자기야, 나 추워.”
“여기 내 주머니에 손 넣어.”
내 옆을 지나가는 한 커플.
그들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꼭 붙어서 길을 걷고 있었다.
밤새 내린 눈에 바닥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미끄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붙어서 걷는 거야?
그들을 흘긋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또 다른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우리 트리 축제 갈까?”
“너무 좋아. 자기랑 가는 거면 어디든 좋지. 헤헤.”
…….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 시선 끝에도 사랑하는 연인이.
저쪽으로 눈을 돌려도 또 다른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추운데 다들 왜 밖에 나와서 이러고 있는 거야.
휘이잉-.
그때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에,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확실히 겨울이 되니까 춥고, 쓸쓸했다.
“유독 이번 겨울이 더 추운 것 같네….”
옆구리가 시린 이 기분.
이 느낌은 추운 겨울 탓인지, 솔로인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여자 친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 자신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지금 사랑이라는 걸 생각한 거야?’
배우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돈, 오디션, 배역 등.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었기에, 생계와 연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떻게 배역을 따내지?
이번 달에는 무슨 돈으로 먹고살아야 하지?
이런 생각뿐, 다른 생각은 사치였고 내 머릿속에 맴돌지도 않았지.
그런데 이제 그 외에 다른 생각을 하고, 바라는 것도 생기는 걸 보니까.
내가 배우라는 직업과 생계를 유지하는 이 삶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배우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뿌듯함으로 끝낼 뿐.
그렇다고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은 아직 없었다.
단지 이럴 때면, 연애라는 감정이 살짝 피어오를 뿐이었지.
아직 나는 연애보다 성공에 목이 말랐다.
내가 배우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지, 아직 내가 원하는 단계까지 오르지는 못했으니까.
연애는 나중에 내가 원하는 자리까지 오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최서빈 정도의 위치까지 오르려면, 지금 내게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애라는 건 사치일 테니까.
***
슈트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자, 김 실장이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희성아, 이제 출발하자.”
“응, 가자.”
“어, 얼른 차 타.”
나보다 더 긴장한 듯한 김 실장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형, 긴장돼?”
“후… 좀 떨리네.”
김 실장은 아침부터 틈이 날 때마다 심호흡을 했고.
나 역시 긴장한 탓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김 실장을 보며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
“형이 나 대신 다 떨어서 그런지, 나는 이제 긴장이 풀렸어. 하하.”
“그래, 내가 긴장할 테니까, 너는 당당하게 들어가.”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려 안전벨트를 한 나를 확인하고, 액셀을 밟았다.
“희성아, 멘트 연습은 했어?”
그는 핸들을 양손으로 꽉 쥔 채 내게 물었고.
“무슨 멘트?”
“신인상 타면, 수상 소감 이야기해야 하잖아.”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상 타는 거 확정된 것도 아닌데, 뭐.”
“그래도 갑자기 받아서 올라가면 머릿속이 새하얘질 텐데?”
걱정스레 묻는 김 실장이 룸 미러를 통해 내게 물었고.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사실… 준비하기는 했어.”
그러자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잘 했어. 막상 올라가면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대본 외우듯이 계속 내뱉으면서 연습해둬.”
그는 내가 이미 신인상을 받을 거라 확신했고.
그런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점점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물론 수상을 하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김 실장의 말 이후로 차 안에 묘한 긴장감이 맴돌면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몇십 분 뒤.
차는 MBS 방송국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고개를 내밀고 봐야 보일 정도로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형, 왜 여기에 멈춰?”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고.
김 실장은 내게 실시간 방송을 재생시켜 내밀었다.
“MBS 연기 대상 레드 카펫, 생방송으로 해서 진행될 거야. 그래서 차례대로 입장하는 거라, 여기서 기다렸다가 신호 받고 입구로 이동할 예정이야.”
“아… 그럼 그때 차로 이동하는 거야?”
“응, 차가 워낙 많아서, 연락받고 입구로 옮겨서 거기서는 혼자 바로 입장하면 돼. 레드 카펫에서 사진 찍고 간단한 인터뷰가 있을 거고.”
“알겠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휴대 전화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직 레드 카펫 입장식은 시작하기 전이었고.
‘MBS 연기 대상 레드 카펫’이라는 커다란 문구만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켜냈다.
아직 차에서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미 차 밖은 연기 대상의 열기로 가득했다.
기자들은 레드 카펫 쪽에 있지만.
MBS 입구에 있는 수많은 팬이 웅성거리며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고.
비록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숫자에 환호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중간중간 들리는 함성은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때.
휴대 전화의 화면이 전환되며, 마이크를 들고 있는 남성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MBS 연기 대상 레드 카펫 생방송 진행을 맡게 된 유현우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프로그램에서 진정성 있는 MC로 자리 잡은 사회자였다.
“올해 MBS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작년에 이어 연기 대상을 받게 될 분은 누구일지, 그리고 어떤 배우분들로 올해를 가득 채웠을지. 한 분, 한 분 만나 보겠습니다!”
나는 정차되어 있는 차 안에서 몸을 앞으로 당겨 김 실장과 함께 화면을 바라보았다.
“형, 시작했어. 같이 보자.”
“응, 나 너무 떨린다.”
김 실장이 심장을 쓸어내리며 말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물을 건넸다.
“아직도 떨려?”
“당연하지. 오프닝을 여는 가수인가 보다. 얼른 보자.”
우리는 그렇게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생방송을 쳐다보았다.
방송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 스태프가 김 실장에게 신호를 보냈고.
나는 다시 몸을 의자로 기대었다.
“희성아, 이제 간다.”
“하아… 응.”
차는 앞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내 심장도 다시 쿵쾅대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차는 이내 다시 멈춰 섰고.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스태프를 보며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진희성 배우님, 준비하실게요.”
“네.”
김 실장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 역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긴장을 풀라는 말과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응원이 담겼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스태프는 내가 앉은 문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김 실장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성아, 문 열게.”
“…응.”
순간, 적응할 새도 없이 곧장 눈을 강타하는 카메라 플래시들.
팟-!
찰칵, 찰칵.
“와아!”
들려오는 팬들의 환호성.
그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
계속해서 플래시가 펑펑 터지고 있었고.
“꺄아, 진희성이다!”
“희성 오빠!”
한순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 바로 아래부터 이어진 새빨간 레드 카펫.
어느새 침을 삼킬 수도 없을 정도로 입 안이 사막처럼 말라 있었고.
“후우….”
숨을 길게 내뱉은 뒤, 밖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차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