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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21)화 (121/303)

121화 #23 – 막장과 작품 사이 (4)

딩동.

엘리베이터는 금세 9층 대표실에 도착했고.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하게 만나게 되는 WG 엔터의 대표.

처음 WG 엔터로 이적 후, 단 한 번 얼굴을 봤다.

그것도 아주 잠깐.

그마저도 혼자가 아닌, 다른 배우들과 함께였을 때 인사만 나눈 게 전부였지.

WG 엔터의 박서원 대표의 얼굴은 실물보다 TV, 여러 매체를 통해 보는 것이 더 많았다.

워낙 연예계 대기업인 회사였기에.

이미 한국에서는 배우들만큼이나 유명했다.

“하아….”

긴장이 가득한 숨을 내뱉자, 김 실장은 옆에서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떨려?”

내게 묻는 그 역시 나와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떨리는 손과 흔들리는 초점까지.

“어, 근데 형도 그런 것 같은데?”

“후우… 나도 박 대표님이랑 이렇게 독대하는 거 처음이거든.”

그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끊어 내쉬었고.

긴장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느새 우리의 발길은 대표실 문 앞에 멈춰 섰고.

나는 크게 침을 삼킨 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커다란 대표실의 모습.

진한 색의 고급스러운 중역 책상이 눈에 들어왔고.

그 옆으로는 각종 상패와 사진들이 책장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엄청난 양의 상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고.

박 대표는 커다란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어서 와. 희성이랑 김 실장, 대표실에는 처음인가?”

170 중반으로 보이는 박 대표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미소 뒤로 보이는 카리스마는 우리를 압도하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굳이 하지 않아도, 그에게서 풍기는 아우라는 입을 떡 벌리게 했고.

박 대표의 인사에 나와 김 실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리를 접었다.

“네, 처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우리는 그에게 소리 높여 인사를 했고.

박 대표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턱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나와 김 실장은 서둘러 그가 가리킨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고.

박 대표는 소파에서 자신의 자리에 몸을 기대며 앉았다.

칼각이 잡힌 정장 바지.

거기에 먼지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고 반짝이는 구두.

박 대표는 빤질거리는 구두를 신은 채 다리를 크게 꼬았고.

우리는 자연스레 무릎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WG 엔터 오니까 어때, 괜찮은가?”

박 대표는 온화한 얼굴로 나와 김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고.

우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행복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김 실장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고.

나 또한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적극적으로 밀어주시고, 회사의 연습 환경도 너무 좋아서 매일같이 출근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도 큰 표정 변화가 없는 박 대표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다행이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정적.

분명 본부장을 만나 드라마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설득하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앞에 있는 사람은 본부장보다 훨씬 높은 대표.

박 대표에게 내가 먼저 드라마를 하고 싶다고,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더군다나 나를 이렇게 직접 부른 건, 드라마에 출연을 말리기 위함이라는 것일 터.

이렇게 날카로운 눈빛과 강단 있는 목소리의 박 대표를 내가 어떤 식으로 설득해야 하지?

나는 말라가는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

그때.

탁-.

박 대표는 챙겨둔 대본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그 대본은 역시나, ‘상간녀의 유혹’이었다.

그는 다시금 몸을 소파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하고 싶다고?”

박 대표의 얼굴에서는 여유로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당연히 여기서 긴장이 되는 것은 그가 아닌, 설득을 해야 할 나였지만 말이다.

오히려 너무나도 평화로운 그의 모습을 보니 나는 한층 더 떨려왔고.

그렇다고 해서 주눅이 든 채, 이 드라마를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우고 고개를 돌려 박 대표를 바라보았다.

“네, 꼭 하고 싶습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옅게 올렸고.

이내 아랫입술을 내밀며 눈썹을 들썩였다.

“본부장한테 듣자 하니, 저 드라마는 희성이한테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걱정을 하던데?”

역시나.

박 대표도 내가 출연하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 등줄기에서는 땀이 한 방울 흘렀고.

나는 이 대본이 박 대표의 마음에 들도록 설득하기보다는.

내가 왜 이 작품이 하고 싶은지, 왜 해야만 하는지를 진솔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대표님.”

“응, 말하게.”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이 드라마의 소재가 불륜이라는 건 맞습니다.”

그는 내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처럼 이 작품에 제가 출연한다고 해서 제 이미지가 실추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시선을 대본으로 옮겼고.

대본을 펼치며 말을 이어갔다.

“그저 자극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타락. 그리고 그 벼랑 끝에 선 모든 이들을 정말 자세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열변을 토하듯 말하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박 대표를 바라보았다.

작품에 대해 설명하던 내 눈은 어느새 반짝이고 있었고.

“지금껏 연기를 하며 생긴 제 선한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방면의 연기도 소화해낼 수 있는. 그런 배우가….”

갑자기.

박 대표가 손바닥을 들어 내 앞으로 뻗었고.

그의 제스처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말을 이어갈 동안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았던 박 대표이기에.

나는 그의 손짓에 당황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시에 나와 김 실장의 시선은 박 대표에게 고정되었고.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입을 움직였다.

“…음, 그럼 한번 해봐.”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내내 조용히 있던 김 실장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대표님!”

그러자 박 대표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배우가 하고 싶은 작품이 있고, 이걸 이렇게나 하고 싶어 하는데. 말릴 이유가 있나?”

“그래도….”

김 실장은 말을 끝맺지 못했고.

박 대표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그렸다.

“그러려고 우리 회사에 온 거 아닌가?”

***

“와아… 대표님이 말려주시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바로 오케이라니.”

김 실장은 넋이 나간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나 그럼 그 작품에 들어가는 거지?”

김 실장은 연습실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표님이 지시한 건데, 누가 말리겠어. 기왕 들어간 거, 꼭 드라마 대박 나야 한다?”

나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김 실장에게 말했다.

“형, 당연하지!”

김 실장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상간녀의 유혹’ 대본을 펼쳐들었다.

“다시 읽어보게?”

내 말에 그는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응, 이제 이 드라마에 출연해야 하잖아. 제대로 다시 읽어봐야지.”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페이지를 한 장 넘기던 김 실장은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맞다, 희성아!”

순간 놀란 나는 몸을 움찔거렸고.

김 실장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어갔다.

“좀 전에 대본 가지러 갔다가 들었는데, 저번에 서빈 씨가 나한테 보냈던 대본 있지?”

“블랙맨?”

“어, 그거 출연 확정됐다더라고.”

내가 거절한 드라마에 최서빈이 결국 출연하기로 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내 자리에는 누가 들어오는 거지?

“그럼 다른 주연은?”

내 물음에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건 안 물어봤는데. 어차피 나 대본 한 부 더 뽑으러 가야 하는데, 가서 물어봐야겠다.”

“같이 가자.”

“그래.”

내 자리에 들어올 배우, 최서빈과 함께할 배우가 누구일지 너무나 궁금한 마음에.

김 실장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그대로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드라마는 수목이더라. 우리 거는 월화고. 다행히 경쟁은 안 하겠어.”

이번에는 최서빈과 동 시간대의 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비슷한 시기에 영화 개봉을 하며 경쟁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플 정도니까.

“진짜 천만다행이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사람.

최서빈이었다.

평소 회사에 오지 않는 그였기에,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최서빈은 내 부름에 눈을 깜빡였고.

옆에 있던 김 실장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의 태도.

나는 서둘러 그에게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오늘 바쁘십니까?”

최서빈은 내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차디찬 그의 반응.

처음 겪는 낯선 최서빈의 말투에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괜찮으시면, 저녁에 항상 가던 술집에서 술이나 한잔….”

“나 오늘 선약이 있어서.”

“아….”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게 거절을 한 뒤, 최서빈은 김 실장에게 인사를 하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함께 드라마를 찍자는 걸 거절한 뒤로 그는 변해 버렸고.

그의 냉랭한 태도에 나는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불편하네.

***

♬♪♫-.

쾅쾅거리는 비트 소리.

쉼 없이 번쩍이는 조명들이 문 앞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미러 클럽>

커다란 로고가 건물 입구에 붙어 있었고.

그곳으로 차 한 대가 멈춰 서자, 정장을 입은 남성이 차 앞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그의 응대를 받으며 내린 임하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애들 다 왔어?”

“네, 다 도착하셨습니다.”

임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클럽 안으로 데려갔다.

♪♫-.

임하준이 도착한 커다란 룸.

그 안에는 밖과는 다르게 음악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오오, 우리 스타 오셨네!”

임하준의 친구들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그를 향해 소리쳤고.

“이 새끼들, 나 빼고 벌써 양주 깠네.”

“에이, 너 온다고 방금 세팅한 거야.”

임하준은 그대로 가장 안쪽 자리로 걸어가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고.

어둑한 조명 아래 테이블에 넘치도록 세팅된 양주와 음식들.

심장을 쾅쾅 울리듯 들려오는 음악 소리.

임하준은 금세 이곳의 분위기에 취한 듯 보였다.

“자자, 하준이 왔으니까 한잔하자.”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날 무렵.

임하준의 친구인 신민환이 그를 향해 큰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너 요즘 프로포폴은 안 하냐?”

그의 질문에 임하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친. 그거 저번에 기사 났잖아.”

“오, 임하준! 한 번 걸렸다고 안 하나 보네?”

비아냥대듯 말하는 신민환을 향해 임하준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모르면 입 닥쳐. 그거 병원 가서 해야 돼. 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에이, 연예인들은 다 집으로 불러서 하던데?”

“나 한 번 들켜서 의사들이 다 거절하니까 못 해. X발.”

신민환은 입술을 쭉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고.

임하준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신민환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네가 연예인에 대해서 뭘 알기나 하냐?”

순식간에 살벌해진 분위기.

옆에 있던 장재혁이 그들의 사이로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야야, 됐어. 서로 언성 높이지 말자.”

“아니, 저 자식이….”

임하준의 팔을 잡은 장재혁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옆에 있던 가방을 눈으로 가리켰다.

“됐고, 우리 이제 슬슬 할까?”

룸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 가방으로 향했고.

장재혁은 서둘러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내가 이번에 좀 어렵게 구해온 거다, 이 자식들아.”

그의 말에 신민환이 술을 입에 털어 부으며 답했다.

“그래, 프로포폴보다 대마초가 훨씬 더 좋더라.”

“맞지. 이건 병원 안 가도 된다고.”

임하준은 씨익 미소를 지었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장재혁에게 물었다.

“야, 밖에 애들 입단속은?”

“X발. 여기가 내 클럽인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

“재혁아, 얼른 꺼내 봐.”

잠시 뒤.

룸 안에 있던 이들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소파에 널브러진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읊조렸다.

“흐아아… X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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