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23 – 막장과 작품 사이 (3)
끼익.
차는 건물 주차장에 멈춰 섰고.
김 실장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확정 아니고 미팅이니까 가볍게 만나보고 와.”
“알겠어.”
가볍게 다녀오라는 말과는 달리 김 실장의 걱정 어린 눈빛이 선했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어차피 미팅실 앞에 있을 거긴 하지만 말이야.”
“아유, 미팅하다가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래도… 아무튼, 미팅 때 정신 똑바로 챙기고 잘 하고 와.”
“네네, 알겠습니다.”
김 실장은 마치 내가 어디 잡혀가기라도 할 것처럼.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이 걱정부터 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송동규 감독과 김한나 작가.
평소 그들의 작품을 찾아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본을 읽고 반한 작품이기에.
그 대본을 쓴 작가, 그리고 그 대본으로 작품을 연출할 감독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
더군다나 내 마음을 빼앗은 대본의 주인인 김한나 작가를 만나 작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렇게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대본.
어떤 심정과 생각으로 써내려간 것일까?
기대감을 가득 품은 채, 미팅실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회의실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문 앞.
이곳이 오늘의 미팅 장소였다.
노크를 하자, 이내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그 목소리에 나는 제자리에서 마른침을 크게 삼켰고.
“후우….”
깊은숨을 내뱉은 뒤, 문을 열었다.
항상 감독과 작가를 만날 때면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설렘과 떨림으로 긴장이 배가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자,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는 그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향해 허리를 접었고.
송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건넸다.
“반가워요.”
“네, 처음 뵙겠습니다. 송 감독님.”
그리고 옆에 있는 김한나 작가.
그녀는 긴 웨이브 머리를 찰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쫙 빼입은 투피스 정장.
진한 베이지색의 슬랙스, 크롭 기장의 같은 색 재킷을 걸친 그녀.
거기에 큰 테의 안경을 쓴 김 작가는 세련미를 풍겼다.
“만나서 반가워요, 진희성 배우님.”
“안녕하세요, 김 작가님.”
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준비된 자리에 착석했다.
송 감독과 김 작가는 나란히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들을 마주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는 그 고요함을 깨며 입을 열었다.
“작품 대본 너무 잘 읽었습니다.”
내 말에 김 작가는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에요.”
“첫 페이지부터 몰입력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숨을 죽인 채 한 장, 한 장을 넘기게 되는 마성의 매력이랄까요?”
나는 대본을 떠올리며 한쪽 눈을 찡그렸고.
송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김 작가가 아주 기가 막히게 표현을 했지.”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감독님. 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미팅.
그때, 스태프가 다가와 커피를 건넸고.
“희성 씨, 커피 마시면서 차분히 이야기해 봅시다.”
“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짧은 내 연기에 대한 이야기와 작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여느 작품의 감독과 작가들은 늘 작품에 진심이었지만.
내 앞에 앉은 이들을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상간녀의 유혹’이라는 작품에 유독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듯한 송 감독과 김 작가의 모습.
그들은 다른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대본에 대한 내용이 언급될 때면 더더욱 격해지는 반응을 보였다.
연기와 작품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번 작품에 푹 빠진 듯했고.
나는 그런 그들의 열정에 입을 떡 벌린 채, 대화에 참여했다.
“김 작가님의 대본은 뭐랄까요. 마치 지금 내가 그 상황을 겪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내 말에 뿌듯하다는 듯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 남자 주인공이 되어, 아내에게 배덕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대본과 꿈에서 겪었던 그 감정들을 그녀에게 말했고.
김 작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굉장히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죠?”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김 작가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니까요.”
그녀의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고.
“네?”
“제 이야기, 경험을 그대로 녹여냈어요.”
잠깐만.
그렇다면, 김 작가가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잖아?
애초에 김 실장을 통해 그녀가 예전에 바람을 피운 이야기가 퍼졌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는데.
그녀가 직접 실토를 했고.
나는 당황함을 겨우 삼켜내며 그녀에게 답했다.
“…어쩐지 그래서 리얼리티가 있었나 보네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송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사람들은 다 한 번씩 바람을 피워 보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이 작품에 공감이 될 테고, 공감이 된다는 건 대박이 날 거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
순간, 나는 그들의 대화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섣불리 반박할 수도, 거짓으로 공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무표정한 눈에 입은 애써 웃고 있었고.
송 감독과 김 작가는 서로 깔깔거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맞아요. 사람이 한 명만을 사랑한다는 건, 거짓으로 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렇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죠. 그저 잠시 다른 여자도 동시에 사랑을 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들의 대화에 나는 아무런 말도 끼지 못한 채.
멍하니 눈동자만을 굴렸고.
그들은 대본에서 보지 못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실제 경험담을 쏟아내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마치 아직 읽지 못한 다음 화의 대본 내용 같은 이야기들.
이 사람들… ‘상간녀의 유혹’ 작품을 대하는 마인드 자체가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인성 자체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회생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지만.
냉정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생각해 보자면….
이 드라마는 망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대박이 날 수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아니, 모든 것을 떠나.
최소한 이 드라마의 ‘막장’이라는 장르에서 송 감독과 김 작가라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을 것 같은 대본이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깐 듣기로도 어마어마한 양의 에피소드가 쏟아졌으니까.
이 이야기들이라면, 아주 자극적이고 시청자들이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대본들이 나올 것 같다.
나는 흐린 눈으로 이들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작품… 분명 대단한 성적이 나올 것 같다.
***
탁.
차에 올라타 문을 닫자마자, 김 실장은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 건물을 벗어나며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희성아, 어땠어?”
그의 물음에 나는 몸을 일으켜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형, 나 이 작품 하고 싶어. 아니, 해야겠어.”
내 말에 놀란 듯, 신호가 걸리자마자 김 실장이 몸을 뒤로 돌렸다.
“희성아, 그래도….”
그의 말은 뻔했다.
이 작품을 하지 말라는 것일 테니까.
김 실장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삼켜내는 듯했고.
서로 의견이 조율되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운전을 하고 있는 김 실장과 토론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몇십 분 뒤.
차는 WG 엔터 주차장에 도착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희성아, 방금 미팅한 거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
“형, 알잖아. 애초에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했던 거.”
벨트를 푼 김 실장은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고.
어깨를 높이 들었다 내리며 말했다.
“이거 일일 연속극 아니야. 월화 드라마 미니시리즈야.”
“그게 왜?”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고.
“막장 드라마잖아. 시청률이 가장 높은 미니시리즈 방영 시간대. 너 이거 찍으면, 이미지 손실이 클 거야. 분명해.”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근데 이건 단순히 막장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인간의 본능을 참지 못한 인간들의 밑바닥, 그리고 그로 인한 배신과 절망.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김 실장은 내 말에 한숨을 삼켜냈고.
나는 재차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몇 년 전에 나왔던, 부부의 나라 드라마 기억 안 나?”
“알긴 알지.”
“그거 봐. 그것도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서 한 가정이 아닌 그가 스쳐간 모든 가족의 파탄. 그럼에도 그 드라마, 시청률 대박이었잖아.”
김 실장은 내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드라마가 당시 최고의 드라마로 꼽혔으니까.
차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팽팽한 찬반의 자리에 마주 선 우리.
김 실장은 허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희성아.”
“응?”
“그 작품, 꼭 하고 싶은 거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 무조건 하고 싶어.”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내게 답했다.
“솔직히 이건 내 선에서 알아서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본부장님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이 드라마를 찍기 위해 본부장을 만나야 한다면, 거절할 것이 없었다.
“알겠어. 본부장님께 말씀드려줘.”
“우선 회사에 들어가자. 가서 연락드리고, 계시면 바로 만나보자.”
***
“아… 대본, 몇 번을 읽어도 소름 돋아.”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를 정도로 이 대본을 다시 읽고, 또 읽었고.
그럴 때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이내 대본은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고 있었고.
나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까 작가님한테 이다음 화 대본 좀 보여달라고 할걸….”
다음 화에서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너무나 궁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린 채.
대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희성아, 바빠?”
김 실장이 연습실 문을 빼꼼 열어 내게 물었고.
“아니, 그냥 대본 읽고 있었어.”
그는 내 말에 미소를 지으며, 나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어디 가야 해?”
“올라가자.”
김 실장의 짧은 말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몇 시간 전, 차에서 본부장과 이야기하라던 그의 말.
본부장을 만나 이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표출하고, 설득해야 할지.
그것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긴 심호흡을 하며, 김 실장을 따라나섰다.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곧장 몸을 실었다.
띡-.
김 실장이 층수를 클릭하자,
그의 손끝에 닿은 숫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왜 9층을 눌러?”
나는 손가락으로 불이 들어온 ‘9’를 가리켰고.
“본부장실 7층인데?”
재차 묻는 내 말에 김 실장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아니고, 대표님이 보자고 하시더라.”
“…뭐?”
털썩, 나는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넋을 놓은 얼굴로 김 실장에게 서둘러 물었다.
“대표님이 대체 왜 나를 보자고 하시는 거야?”
“그 드라마 하겠다고 본부장님한테 보고 올렸더니… 곧바로 대표실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커지려는 목소리를 겨우 삼켜내며 말했다.
“아니, 대체 대표님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