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85)화 (85/303)

85화 #17 – 결국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7)

“희성아, 여기!”

집 근처에 있는 호프집.

친구들과 자주 다니던 동네의 작은 가게였다.

이명진이 손을 뻗어 내게 소리쳤고.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명진은 재차 나를 불렀다.

“진희성. 희성아, 왔어?”

이명진의 큰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고.

몇몇 테이블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그 드라마 배우 아니야?”

“맞네. 진희성… 그 요리를 너무 잘해 드라마에 나왔던…!”

“헐, 미스터리 패밀리 봤어?”

“당연하지.”

“거기에 저 배우도 나왔잖아. 진짜 웃겼는데.”

이명진이 쏘아 올린 목소리에 술집의 많은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로 고정되었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서둘러 안쪽 테이블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야, 우리 연예인 오셨다.”

“조용히 좀 해, 인마. 너 때문에 다 쳐다보잖아. 희성아, 네가 안쪽에 앉아.”

이명진과 신현수는 오늘도 장난스레 티격태격했고.

“일부러 보라고 소리친 거지. 우리 중에 제일 잘된 동창 아니냐.”

“그건 그렇지. 하하.”

“주변의 애들한테도 희성이랑 친구라고 했더니, 안 믿더라.”

“희성아, 우선 얼른 앉아. 한잔하자.”

나는 그런 동창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우리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곧장 내 앞으로 500짜리 맥주잔과 수저, 젓가락이 세팅되었고.

앞에 앉은 친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에 지온이랑 명진이는 봤는데, 현수는 오랜만이다.”

내 말에 신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야, 나는 너 자주 보는 거 같다.”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현수가 재차 입을 열었다.

“요즘 TV만 틀면, 희성이 너 나오던데. 그래서 오랜만에 봤는데도 매일 보는 느낌이야. 하하.”

신현수의 말에 다들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을 부딪쳤다.

“그래서 언제 다시 서울 올라가는 거야?”

“야, 그럼 너 송유나랑도 친해?”

“인마, 당연하지. 송유나랑 희성이랑 같은 소속사잖아.”

“맞네. 이번에 예능도 우정 출연으로 송유나가 나온 거라면서?”

친구들의 쉴 새 없는 질문 폭탄에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고.

양손을 뻗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우리 얼마 만에 만났는데, 서로 안부부터 좀 묻자. 하하.”

내 말에 그들은 실소를 터트렸고.

그제야 시끄럽던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그래도 오늘 희성이가 주인공인데, 희성이 먹고 싶은 거로 시키자. 뭐 먹을까, 희성아?”

박지온이 내게 메뉴를 건네며 물었지만,

난 건네받은 메뉴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다 오고 나서 시키는 게 낫지 않아?”

내 말에 박지온이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되물었다.

“다 왔는데, 누구 또 와?”

그의 물음에 오히려 궁금한 건 나였다.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은 내 앞에 있는 박지온과 이명진, 신현수 세 명.

거기에 가장 중요한 박민준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박민준이 안 왔고, 잠깐 화장실을 간 것처럼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민준이도 온다고 했잖아.”

내 말에 이명진이 탄식을 내뱉으며 답했다.

“아, 민준인 바빠서 못 온다고 하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아쉬움이 터져 나왔다.

“…아쉽다.”

보고 싶었는데. 물론 박민준의 얼굴을 보지 못해 나오는 아쉬움은 절대 아니었다.

그가 나락으로 떨어진 순간부터 연예계에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성황리에 드라마를 마친 나를 보면 박민준이 뭐라 할지 너무나도 궁금했는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

“맞네. 민준이도 본가 왔다고 했잖아?”

박지온이 이명진에게 물었고.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응, 근데 모르지. 바쁘다고 못 온다는데, 그냥 알았다고 했지.”

신현수는 이명진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놔둬. 민준이 쪽팔려서 안 나오는 거겠지.”

그의 말에 그 누구도 놀라거나 그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맞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크게 공감하듯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고.

이내 박민준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 민준이 첫 주연이었는데, 완전 나락으로 빠져들었잖아. 그러게, 애초에 역사 왜곡 드라마는 하면 안 됐지.”

“아휴, 민준이도 참 안됐어. 결국은 주연 한 번 못해보고 쭉 쉬게 생겼네.”

그들은 박민준의 이야기를 나누며 한숨을 짧게 내쉬다가,

이내 농담 섞인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데, 안 온 자식은 놔두고. 우리 희성 배우님 얘기나 하자.”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친구끼리 자꾸 배우님… 배우님 좀 하지 마. 쑥스럽게, 하하.”

서둘러 메뉴를 펼쳐 그들에게 내밀었다.

“얼른 시켜.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동안 고향 못 내려온 것도 있고. 오늘은 내가 한턱 쏠게.”

내 말에 모두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 진짜?”

“그럼.”

“크으, 역시 잘나가는 연예인은 다르다니까?”

“맞아. 민준이 이 자식은 한 번을 안 샀는데….”

그들은 꼽사리 끼듯 박민준의 이야기를 집어넣으며, 메뉴를 고르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런 박민준이 나 역시 떠올랐다.

지난 동창회에서 한껏 오른 어깨로 내게 다가와 나를 누르려고 했던 모습.

내게 내뱉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런 박민준은 이제 없다.

그저 그보다 위로 오른 내가 있을 뿐.

연거푸 마신 술에 맥주잔이 몇 번 더 서빙되었고.

안주 역시 빈 접시가 늘어나고 있었다.

“봐. 나는 우리 희성이가 이렇게 잘될 줄 알았어.”

“맞아. 박지온은 항상 희성이가 빵 뜰 거라고 했지.”

박지온과 신현수는 의자에 기댄 채 입을 열었고.

나를 바라보며 박지온이 물었다.

“그래서 희성이 너, 다음 작품은 뭐로 할 거야? 이번에는 영화로 가냐?”

“음… 아직 정해진 건 없어서. 고민 중이야.”

“그럼 요즘은 뭐 하고?”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아직 한 번도 쉰 적이 없어서, 여행이나 조금 다니다가 일하려고.”

내 말에 신현수가 기대고 있던 등을 떼며 말했다.

“크으, 배우 팔자 좋다.”

그는 그대로 맥주를 들이켰고.

나는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풀며 그에게 답했다.

“현수가 나 오래 못 봐서 기억이 안 나나 본데… 나 무명 시절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가?”

“그럼, 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내 말에 박지온이 옆에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지. 희성이 이 자식, 연기하면서 아르바이트 진짜 많이 했다.”

신현수는 입을 벌린 채 탄성을 내질렀다.

“오… 아니,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잘됐잖냐.”

나는 앞에 놓인 맥주를 들었고.

그대로 친구들과 잔을 부딪쳤다.

곧장 술은 우리의 식도를 적혔고.

나는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작게 읊조렸다.

“…더 잘돼야지.”

***

깜깜한 어둠 속.

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스산한 나무들과 규칙 없이 높게 솟아오른 풀들뿐이었다.

의존할 거라곤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보름달과 몇 개의 별들.

나는 큰 지프차에 올라탄 채 무거운 핸들을 양손으로 꽉 쥐고 있었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꿈이다…!

꿈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까지 이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꿈이라는 것도 잊은 채,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빨려 들어가듯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트도 켜지 않은 차.

눈앞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차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 공간을 서둘러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동차 계기판에 보이는 빨간 불.

‘연료 부족’이었다.

젠장.

이 산골 한복판에서 이대로 차가 멈춰 버린다면 답도 없는데….

-치직… 치지익.

작게 켜둔 라디오는 차의 움직임에 따라 신호가 터질 때면 작은 소리가 나왔다 나오지 않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여러분….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소리가 끊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 좀비가 도심을 점령…. 치직-.

라디오에서는 치직거리는 소리와 말소리가 섞여 나왔고.

조급한 마음에 라디오를 손바닥으로 툭 내려쳤다.

-불빛에 예민하다고 했던 좀비들은 소리에도 반응을 한다는 말이…. 치직, 치직….

그대로 라디오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서둘러 한 줄기의 빛 같았던.

그리고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던 라디오를 손바닥으로 치기 시작했다.

“왜 안 나오는 거야, 왜….”

계속해서 기계음만을 내는 라디오를 주먹으로 쾅쾅 내려쳤다.

“나는 여기서 대체 어떻게 하라고…!”

두려움에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절대 아니었다.

이곳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심호흡을 한 뒤, 마른침을 삼켜냈다.

그리고 다시 차를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고,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분명 정보를 줄 거야. 내가 들을 수 있는 곳은 라디오밖에 없….”

그때, 볼륨을 높였던 라디오에서 높은 주파수의 기계음이 터져 나왔고.

그 소리에 눈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서둘러 소리를 줄였지만.

다다다다다-.

누군가가 차를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커지기 시작했고.

와다다다-!

재빠르게 달려오는… 아니, 한 명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좀비 떼가 분명했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쿠아아아아-.”

“흐어아아아아!”

괴이한 소리를 내며 무섭게 달려오는 좀비들.

그들의 찢겨진 옷 사이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초점을 잃은 동공,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사나운 치아와 줄줄 흐르는 끈적한 검붉은 피.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물리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

그 하나뿐이었다.

서둘러 라디오 전원을 끄고 숨을 죽였다.

맞아.

라디오에서 좀비가 소리에 예민하다고 했어.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 좀비는 빛에만 반응한다고 했기에, 라이트를 끄고 달렸던 것인데….

서둘러 가방을 뒤적였고, 안에 있는 비상 용품을 꺼내 들었다.

버튼을 누르면 귀가 찢어질 만큼 큰 소리를 내는 호신 용품.

범죄자가 나타났을 때 주위를 끌기 위한 제품이었지만, 지금은 좀비를 유인하기 위한 최고의 물건이 될 터.

좀비들은 꺼진 라디오에 안면 근육을 움찔거리며 두리번거리고 서 있었고.

운전석 쪽으로 몰린 좀비들을 뒤로한 채, 조수석 창문을 살짝 열어 호신 용품을 멀리 던졌다.

-삐이이!

숲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뿜어내는 작은 호신 용품에 좀비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고.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숨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땀범벅이 된 몸은 두려움에 부르르 떨려왔고.

자꾸만 새어나오는 딸꾹질을 어떻게든 참기 위해 숨을 참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팟-!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

그 탓에 젖어버린 옷과 침대 시트.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샤워실로 향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아직 드라마나 영화 준비 중인 것도 없었고.

오디션 예정인 것조차 없는 지금.

대체 그 꿈은 왜 꾼 거지?

꿈에서 봤던 저 내용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도, 대본으로 읽어본 적도 없었다.

…뭔가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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