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17 – 결국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3)
똑똑.
“들어와.”
“대표님, 아까 말씀드렸던 분석 자료 가져왔습니다.”
강 본부장이 임종주 대표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그래, 우선 앉지.”
그들은 대표실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자리했고.
임 대표는 소파 옆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여기 차 두 잔 좀 가져다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에 따뜻한 차 두 잔이 놓였다.
강 본부장은 임 대표를 향해 서류를 내밀었다.
“대표님, 이번 배우들 시청률 표입니다.”
그는 서류를 말없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한 손에는 서류를, 다른 한 손에는 찻잔을 잡은 채.
천천히 음미하던 그때.
임 대표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얘가 백영훈보다 성적이 좋네?”
“네?”
강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임 대표는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진희성’.
강 본부장은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백영훈과 동 시간대 드라마가 겹쳐서 걱정했는데, 드라마 두 개 전부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였고.”
그 역시 진희성이란 이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특히 진희성 시청률이 꽤 괜찮게 마무리됐습니다.”
“얘가 펑크 난 자릴 메우는 드라마 찍은 거 아니었나?”
임 대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고.
강 본부장은 곧장 종이를 넘기며 답했다.
“네, 그래서 처음에는 걱정을 했는데, 여기 보시면 첫 시청률이 8.2%에서….”
그는 진희성에 대한 자료를 펼쳐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들의 대화 주제는 진희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임 대표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맞습니다. 이번에 HS 엔터 특집으로 예능에도 나갔는데, 송유나 만큼이나 진희성의 화제성이 뛰어났습니다.”
임 대표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잠시 뒤 그의 입이 열렸다.
“강 본부장.”
“예, 대표님.”
그리고 진희성의 사진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얘는 좀 잡아 둬야겠다.”
그러자 강 본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머리를 흔들었다.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계약서라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 대표가 입을 열었고.
“근데 말이야.”
그의 입꼬리는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진희성, 얘 신인이잖아?”
“맞습니다.”
“그럼 머리 크기 전에 묶어둬야지. 애들이 좀 자리 잡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컨택이 들어올 거라고.”
임 대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아무것도 모를 때 빨리 계약해서 아예 묶어놔 버려. 무슨 말인지 알지?”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강 본부장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네, 계약서 준비하겠습니다.”
***
“희성아, 고생 많았다.”
김 실장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드라마 8화, 그 마지막 방송이 막을 내렸고.
화면에 광고가 뜨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형이 고생 많았지.”
“하하, 아무튼 이번 드라마는 끝까지 루즈한 부분 하나 없이 너무 재밌었다.”
그는 TV 전원을 끄며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둘이 모니터링하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맞아. 예전에는 자주 봤는데 말이야.”
좁은 집이었지만, 모니터링을 할 때면 항상 김 실장을 초대했다.
그 역시 당연하다는 듯 우리 집에서 함께했지.
그리고 우리는 늘 그랬듯이 축배를 들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치킨 시킬까?”
“좋지.”
“오랜만에 맥주도 한잔하자.”
서둘러 배달 어플로 주문을 한 뒤, 그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형, 이번 작품 진짜 좋았던 것 같아.”
그는 내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처음에 하지 말자고 말렸던 나를 후회한다.”
김 실장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고.
그에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회사 입장에서 봤을 때는 당연히 말릴 만했지. 시청자들도 알잖아, 반쪽짜리 드라마라고.”
“사실 그렇게 보기는 했지. 보통 그런 드라마가 잘 안 되기도 했고.”
김 실장을 향해 너스레를 떨 듯 말했다.
“그럼 이제 내 안목을 믿어주는 건가?”
“당연하지. 네 안목은 늘 믿었어, 인마.”
그와 함께 웃음을 터트리며 현장에서의 일들을 회상했다.
한참 뒤, 치킨이 뼈만 남을 무렵.
김 실장은 배가 부른지 등을 벽에 기대었다.
“희성아.”
“응?”
“너 진짜로 쉬지도 않고 일한 거 알지?”
그의 말에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김 실장의 말이 맞았다.
HS 엔터에 들어와 첫 배역을 맡을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소속사 없이 단역과 엑스트라를 할 때부터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배역이 없을 단역 시절에는 매일같이 아르바이트도 했으니까.
하지만 단역으로라도 배역이 잡히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연기를 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회사 소속으로 온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배역이 끝나고 곧장 다른 배역 오디션을 찾기에 바빴다.
연예계는 작품에서, TV에서 보이지 않으면 대중들에게 곧장 잊힌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당연한 것이다.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만다.
나를 대체할 사람, 배우는 많고 많으니까.
무엇보다 연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물론 지친 몸에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필요했지만, 그만큼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좋았다.
오히려 연기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내게는 더 힘든 일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HS 엔터에 들어온 뒤, 가장 오래 쉬었던 게….
아마 본가에 내려갔던 2박 3일일 터.
그뿐이었다.
“그러네.”
“이번에는 얼마나 쉴 거야?”
그의 말에 눈동자를 굴리자, 김 실장이 서둘러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안 쉬고 또 바로 일하면 너 정말 큰일 나.”
걱정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에 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림도 없지.”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한층 더 고민에 빠진 얼굴로 물었다.
“…진짜로 안 쉬고 일하려고?”
그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조금 쉬려고.”
“그래, 잘 생각했어. 이번에는 좀 길게 쉬면서 재정비도 하고….”
김 실장이 반갑다는 듯 소리쳤지만,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딱 한 달만.”
“뭐?”
“한 달만 쉬고. 바로 일하고 싶어.”
그는 나를 못 당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대단하다. 그래도 이번엔 한 달이나 쉬니까 됐어. 그리고 네가 쉬어야 나도 좀 쉬지.”
“그러네. 형도… 한 달이면 되지?”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하, 그럼. 조금 더 쉬어도 되고.”
김 실장과 나는 잔에 남은 마지막 맥주를 입에 털어 부었다.
“크으, 희성아. 그리고 이번 출연료도 곧 입금될 거야.”
***
머리를 질끈 묶고 컴퓨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는 키보드에 양손을 올렸다.
“아이디는… 박순희12.”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서둘러 로그인을 했고.
곧장 팬 카페를 클릭했다.
[진희성 배우 공식 팬카페 – ‘진희성수기’]
메인 화면을 가득 채운 진희성의 사진.
‘진희성수기 – 진희성 배우님은 평생 성수기. 진희성 배우 공식 팬 카페.’
커다란 글씨와 함께 여러 장의 진희성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야, 우리 오빠 드라마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금방 카페 회원 수 늘잖아?”
박순희는 뿌듯한 얼굴로 신입 회원 정보를 훑었다.
이상한 점은 없는지, 혹시나 안티팬은 아닌지 철저히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늘 그렇듯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은 채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했다.
“우리 희성 오빠, 팬 카페 들어와서 늘어난 회원 수 보고 놀라시는 거 아니야? 헤헤.”
그녀는 메인에 걸린 진희성의 사진을 바라보며 헤실거렸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드라마와 예능을 캡처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오빠 사진 업데이트하고….”
‘드라마 – 요리를 너무 잘해’라고 써진 게시판을 클릭하려던 그녀는 바로 아래에 있는 ‘내 배우 자랑하기’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앗, 잘못 눌렀….”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아이디 하나.
‘정여진’.
정여진이라는 아이디로 올라온 글이 게시판을 도배하듯 몇십 개가 줄을 이루고 있었고.
박순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디를 떠올리려 눈동자를 굴렸다.
“분명 이렇게 많은 글을 올리는 사람이라면, 카페 등급이 높을 텐데. 왜 이렇게 낮지?”
그녀는 서둘러 정여진의 글을 클릭했고.
정여진이 올린 가장 첫 게시물은 진희성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 달린 질문 하나.
‘희성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게시판의 특성상 사진에 멘트를 하나씩 달아야 했고.
박순희는 그녀의 글에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지으며, 다음 글을 클릭했다.
다른 진희성의 사진.
그리고 아래에 달린 질문.
‘희성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은?’
.
.
.
‘희성 오빠가 싫어하는 여자 스타일은?’
‘희성 오빠가 살고 있는 집 건물 공동 현관 비밀번호는?’
‘희성 오빠가 덮고 자는 이불 색깔은?’
‘희성 오빠 집의 냉장고 색깔은?’
‘희성 오빠네 집 초인종 모양은?’
‘희성 오빠가 매일 입는 잠옷은?’
뭐야… 얘 대체.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글을 보던 박순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의 팔에는 소름이 쫘악 돋았다.
그녀는 서둘러 정여진 회원의 프로필을 확인했고.
정여진이 팬 카페에 가입한 지는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두 달이면, 우리 희성 오빠한테 빠지게 된 지 얼마 안 됐다는 건데….”
그리고 박순희는 다시 정여진이 올린 사진을 훑어보았다.
“…….”
이내 그녀의 온몸에는 재차 소름이 돋고 말았다.
“이거 다 처음 보는 사진이잖아…!”
정여진이 올린 사진은 기사 사진이나 TV, 영화에 나온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즉, 누군가가 진희성의 사진을 찍은 후 언론에 올리지 않은 미방영분이거나.
정여진이 직접 찍은 사진이라는 뜻이다.
진희성이 찍힌 사진의 구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절대 화보나 행사장에서 사진작가가 찍은 게 아니라는 것을.
박순희는 누구보다 진희성에 대한 사랑이 크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보지 못한 새로운 진희성의 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웬만한 기사, 미방영분 영상과 HS 엔터에서 올리는 사진은 모조리 자신이 팬 카페에 직접 올렸으니까.
박순희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정여진의 아이디를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기자 아니면 파파라치인 건가?”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사생팬?”
박순희는 정여진이 올린 사진과 게시물 화면을 캡처했고.
“혹시 모르니까, 오빠 회사에 조심하라고 보내 줘야겠다.”
HS 엔터의 공식 메일에 그것들을 첨부하기 시작했다.
***
지이잉.
오랜만에 알람 없이 잠을 청하는 휴일.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도 깨지 않았는데, 결국은 전화 벨소리에 눈이 떠지고 말았다.
손을 더듬거리며 잡은 휴대 전화는 연신 진동이 울리고 있었고.
살짝 뜬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발신인: 김지훈 실장]
내게 휴식을 권유했던 김 실장이 아침부터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거지?
중요한 일이란 생각에 서둘러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여보세요?”
-희성아, 자고 있었어?
“아니야. 일어났어.”
-아, 오늘 회사 좀 나와야겠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이 번뜩 떠졌고.
“무슨 일 생긴 거야?”
놀란 목소리로 묻는 내게 김 실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드라마 잘됐잖아. 그래서 대표님이 계약서 조정해 주신대!
김 실장의 말에 결국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그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재차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되물었고.
김 실장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 이제 돈 많이 벌 거라고!
나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수화기 너머 김 실장에게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겨우 그 소리를 삼켜냈다.
돈을 떠나, 회사에서 먼저 내게 계약 조건을 바꿔 주겠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쟁쟁한 배우들이 넘쳐나는 HS 엔터.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어마어마한 회사.
그곳에서 드디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