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80)화 (80/303)

80화 #17 – 결국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2)

“컷, 오케이!”

유 감독의 목소리가 메가폰 너머로 울려 퍼졌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은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이렇게나 많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들뜬 이유.

오늘이 드라마 ‘요리를 너무 잘해’의 첫 방영 날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금 찍은 신을 끝으로 우리는 야간 촬영을 하지 않은 채 회식 장소로 이동한다.

이번 드라마에는 열정적인 스태프와 배우들이 많은 편이었다.

물론 어느 현장에서나 그러했지만, 비교적 이번 드라마의 감독부터 열정이 대단했다.

유 감독의 첫 입봉작.

거기에 작가는 KTS 공모전에 수상한 작품이었기에.

그 열기는 매 화가 현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 역시 첫 드라마 미니시리즈의 주연이었기에, 늘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드라마 시청률이 가장 궁금하고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유 감독은 역사적인 드라마 1화 방영을 본방송으로 전 스태프와 배우가 함께 보기를 희망했고.

현장을 일찍 마무리하고 회식 장소로 떠나기로 했던 것.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받은 스태프들은 현장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밤 10시에 방영하는 드라마.

회식 장소에 도착하니, 시곗바늘은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찍 와서 든든하게 배 좀 채우고 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정리가 조금 늦었네요.”

유 감독은 우리가 모두 자리를 잡고 나자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합니다.”

조감독은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래. 천천히 식사하고, 가볍게 한잔하면서 함께 모니터링하게요.”

“네.”

그의 말에 식당 안의 스태프와 배우는 합창하듯 소리쳤고.

이내 테이블마다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치익-.

지글지글.

두툼한 선홍빛의 삼겹살이 뜨겁게 달궈진 불판 위에 올라갔고.

그 소리는 마치 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연상케 했다.

“이야, 밖에 비가 내리는데, 안에서 고기 굽는 소리까지 나니까 너무 좋은데요?”

서인우가 창밖의 비를 바라보자, 유 감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근데 첫 방송 날부터 비가 오고 그러냐.”

유 감독의 표정과 말투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드라마 첫 화가 방영되는 날,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둘러 그의 잔을 채웠다.

“감독님,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희성 씨가 주는 술인데, 받아야지. 하하.”

“감독님, 오히려 잘 된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월요일에 비가 오면 다들 집에 일찍 들어갈 거 아닙니까. 그럼 10시에 저희 드라마 보는 시청자 수가 늘지 않을까요?”

유 감독은 내 말을 듣자마자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런가.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좋은 일이 생기지. 희성 씨 말이 맞네.”

금세 기분이 풀린 듯 그는 찰랑이는 술을 입에 털어 부었다.

“아, 선배. 어제 예능 난리 났던데요?”

서인우의 말에 신민영과 유 감독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어제 방영한 예능 ‘미스터리 패밀리’를 말하는 모양이다.

딱 날짜도 잘 맞춰서 드라마 1화 방영 전날 내가 출연한 회차가 나왔고.

생각보다 예능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HS 엔터 특집으로 꾸며졌던 예능은 평소 잘 출연을 하지 않던 송유나로 이목을 집중시켰고.

덕분에 예능 시청률이 다른 회에 비해 2%나 상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KTS라는 이유로 백영훈보다는 내 비중이 많이 편집되어 방영되었고.

자연스레 드라마 홍보까지 이뤄지며, 관심이 그쪽으로 이어졌다.

자막 역시 ‘요리를 너무 잘해’ 제목과 관련된 패러디가 많이 띄워졌지.

유 감독이 서인우의 말에 공감하듯 입을 열었다.

“나 아직 방송은 못 봤는데, 스태프들이 이야기해 주더라고. 희성 씨가 활약을 많이 해서 시청률 잘 나왔다며?”

그의 말에 나는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열심히 하려고는 했는데….”

“맞아요. 저도 기사 봤는데, 희성 씨 출연한다는 이야기에 오늘 드라마 보겠다는 시청자 댓글이 엄청나던데요?”

신민영의 한마디까지.

테이블은 온통 내 이야기로 꾸며졌고.

난 그들의 말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연신 미소를 지었다.

“예능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거 보시고 드라마 봐주시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다들 든든한 배를 부여잡은 채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TV에서 나오는 소리.

“잠시 후 ‘요리를 너무 잘해’가 방영됩니다.”

그 소리에 모두가 떠들던 입을 지퍼로 채운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서둘러 TV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식당 안에 있던 스태프와 배우들이 의자를 돌려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고.

잠시 뒤, 1화 방영이 시작되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식당 안.

모니터링을 위해 뜨겁던 불판 위의 고기는 접시로 옮겨졌고.

화면을 꽉 채우듯 나온 내 얼굴, 그 첫 장면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 희성 씨 엄청 잘 나왔네!”

“뭐야, 희성 씨! 화면발 장난 아닌데? 하하.”

“희성 씨 원래 실물파 배우 아닌가요? 하하하.”

그렇게 우리는 웃고 떠들며 드라마를 즐기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시청률이었다.

부은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지만, 서둘러 내 손은 휴대 전화의 인터넷 창을 클릭하고 있었다.

드라마를 검색하자마자 뜨는 시청률.

‘시청률 8.2%’

나는 1화의 시청률을 보고 덜 떠지던 눈이 휘둥그레졌다.

8.2%면 시작이 좋은데?

그리고 바로 아래 쏟아진 기사들.

[드라마 ‘요리를 너무 잘해’ 시청률 산뜻한 8%대로 시작!]

[떠오르는 신예 주연들. ‘진희성’ 출연 드라마 시청률 8.2% 출발… ‘백영훈’ 6.3%]

[[월화드라마] 요리를 너무 잘해, 시청률 쾌조로 시작… 진희성과 이어진 인물 관계도…]

[진희성… 예능 접수하더니, 드라마까지…!]

기사는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여러 개의 기사를 통해 본 백영훈 주연의 드라마 시청률은 6.3%.

그 숫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휘어졌고.

누워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를 질렀다.

다들 안 될 거라 생각했던 8화짜리 반쪽 드라마.

생각보다 성공적인 스타트였고, 그 성적인 8.2%를 보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작정 기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아직 말 그대로 1화였기에, 이 시작 그대로 마지막까지 끌고 나가야 한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과 댓글 하나하나를 읽어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다졌다.

이대로만 쭉 가자!

***

차에서 내리자 저 멀리 보이는 서인우의 모습.

항상 나를 보고 반갑게 달려왔던 그였기에.

오늘은 내가 서인우에게 다가가기 위해 조심스레 그에게 향했다.

“인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서인우는 앞에 있던 스태프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 심각한 모습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그 분위기를 깨면 안 될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으니까.

더군다나 남의 이야기를 몰래 들을 생각 또한 없었기에.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스태프의 앙칼진 목소리가 내 귓가에 제대로 꽂히고 말았다.

“그거 말이에요. 진희성 씨 싸움 난 거!”

순간.

내게 들려온 이름은 다름 아닌, 나 ‘진희성’이었고.

그들의 대화 주제가 나에 관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인우는 스태프의 말에 놀란 듯 물음을 던졌다.

“무슨 싸움이요?”

“저번 영화 촬영에서 강찬성 씨랑 아주 난리가 났다면서요. 아니, 현장에서 그렇게까지 싸우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고….”

지난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에서 강찬성과의 언쟁이 높아졌던 일이,

그새 스태프들 사이에 퍼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굳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쉬쉬할 필요성도 생각하지 않았지.

스태프는 혀를 끌끌 차며 서인우에게 재차 말을 이어갔다.

“희성 씨,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는 선배한테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잖아요. 인우 씨 보니까 희성 씨랑 가까운 것 같던데, 조심하라고 말해주려고 했죠.”

그 일에 대해 별 감정은 없었지만.

사실 이렇게 뒤에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일일이 찾아가며 변명을 하거나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 또한 들지는 않는다.

다만, 이야기가 와전되어 한발 더 나아간다면 입을 열어야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갑자기.

서인우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근데 제대로 알아보신 건 맞으세요?”

“네?”

“그 이야기 말이에요. 희성 선배 쪽 이야기도 들어보신 건가 해서요.”

“아니, 그건….”

“연예계가 뒷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제가 보고 느낀 희성 선배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더라고요. 물론 저를 위해서 해주신 말이라니까 감사하기는 한데요.”

서인우는 한숨을 참아내며 말을 이어갔다.

“뒤에서 말씀하시는 건 자유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죠.”

“희성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예요. 혹여나 화를 냈다면,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스태프는 서인우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 그럼요. 아마 희성 씨도 이유가 있겠죠. 그 이야기를 해준 선배한테 제가 한번 제대로 물어봐야겠네요. 하하.”

“네, 앞뒤 상황을 다 들어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혹여나 그렇다고 해도 뒤에서 이렇게 전하는 건 좀… 유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태프는 서둘러 서인우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서인우가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자리를 벗어났다.

저 스태프야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서인우… 생각보다 더 괜찮네?

***

“오케이!”

팡-!

팡팡-.

유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스태프와 배우들이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고.

폭죽을 터트리며 샴페인을 오픈했다.

여느 드라마보다 짧았던 촬영 기간.

하지만 그 기간 안에 쌓인 정은 결코 짧거나 얕지 않았다.

돈독하고, 어느 촬영장보다 끈끈했던 현장은 금세 울음바다로 물들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잘 따라와 줘서 너무 고맙고. 이게 끝이 아니니까 앞으로 다른 드라마에서 꼭 또 만납시다.”

그렇게… 우리의 드라마 촬영은 막을 내렸다.

드라마는 월화, 주 2회로 총 8화짜리 드라마.

그러니까 한 달을 꽉 채워 방영하는 드라마였다.

촬영은 오늘부로 끝이 났고, 드라마의 마지막 화는 2주를 남겨 놓았다.

2주 차가 된 지금.

시청률은 무려 10%를 돌파해 10.8%를 달리고 있었다.

반쪽짜리 드라마.

펑크를 메우기 위한 드라마라는 편견들을 모조리 깨부수고.

동 시간대 백영훈의 드라마 시청률을 매 화마다 이기고 있었다.

백영훈의 드라마는 6%로 시작해 여전히 8%에서 고전 중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KTS 드라마의 압승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