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55)화 (55/303)

55화 #12 –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4)

“민지훈 씨, 거기서 누가 일 처리를 그딴 식으로 합니까?”

내뱉은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목을 풀었다.

“흠흠.”

다시 심호흡을 한 뒤, 허공을 바라보며 빠르게 몰입했다.

“민지훈 씨, 거기서 누가 일 처리를….”

똑똑.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고, 김 실장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희성아, 연습하고 있었어?”

“응.”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네 상대 배역으로 연습 좀 도와줄까 하고.”

“그럼 고맙지.”

이미 대본의 내용은 다 외운 상태였기에, 하나 있는 대본을 그에게 넘겼다.

그러자 김 실장은 대본을 보는 대신에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희성아, 좀 쉬었다가 해.”

그가 건네준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재차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오전부터 너무 쉬지도 않고 연습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점심은 먹고 하지. 벌써 2시가 넘었다.”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장 내일이 영화 크랭크 인인데, 더 열심히 연습해야지.”

내 말에도 그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심각해진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희성아.”

“응?”

“혹시 무슨 일 있어?”

그의 말에 눈썹을 들썩이자, 김 실장은 더욱 얼굴이 굳어졌다.

“오늘 표정이 안 좋아서,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말해 봐.”

“별거 아니야.”

그가 걱정할세라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역시 매니저는 매니저였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을 캐치한 모양이다.

사실 오전에 회사로 출근해 영화 대본을 읽기 시작했는데.

왠지 모르게 영 불편한 마음이 가득했고, 쉽게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탓에 쉬지 않고 꼬박 4시간을 연습했지만, 불안한 감정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겨우 참아내며 나를 달래듯 말했다.

“내일 촬영이라 불안해서 그래?”

대답 대신 미소만 짓자, 김 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떨 거 없어. 원래 잘해왔잖아.”

“그렇긴 한데….”

이상하리만큼 영화 촬영이 걱정됐다.

뭐랄까.

예전, 카메라 울렁증이 심했을 무렵의 그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긴장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느낌이랄까.

한참 카메라 울렁증이 심했다가, 해소된 이후로는 이런 걸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다시 느껴지는 거지?

맞은편에 앉은 김 실장을 바라본 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 내가 맡은 최 대리라는 배역에 대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공부했다.

즉, 배역에 대한 이해도는 물론이고 대본 소화조차 넘치도록 연습했지.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지금 뭐가 부족한 거지.

김 실장은 내려놓았던 대본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쓰윽.

곧장 대본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잘할 테지만, 걱정이 되는 거면 연습하자.”

그의 말에 나는 감았던 눈을 번뜩 떴다.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는 김 실장.

용기를 주려는 그의 표정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하자, 연습!”

그제야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렸고.

“거기 페이지 접어둔 부분에 최서빈, 그러니까 민지훈 역을 해주면 돼.”

“알겠어.”

다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배역에 빠르게 몰입했다.

그리고 김 실장을 쏘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민지훈 씨, 거기서 누가 일 처리를 그딴 식으로 합니까?”

김 실장은 대본을 바라보며 다음 대사를 읊조렸다.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최선? 하, 회사에서 최선은 필요 없어요.”

페이지 서너 장을 몇 번 반복한 뒤에야 우리는 연습을 멈출 수 있었다.

김 실장은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희성아, 너 평소처럼 잘해. 걱정하지 마.”

“그런가?”

“응, 오히려 연기가 점점 더 느는 거 같은데?”

연기가 더 늘었다는 말에도 가슴속의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이러지.

카메라 울렁증도 아니고….

그때, 문득 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꿈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꿈을 꾼 이후로 내가 앓던 카메라 울렁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카메라 울렁증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배역을 완벽히 소화하고, 마치 그 역할에 빙의가 된 것처럼 연기했지.

카메라 울렁증이 사라지면서 꾸었던 꿈들은, 내 배역과 관련된 배경이거나 직업이었다.

하지만 이번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와 관련된 꿈은 조금 달랐다.

꿈에서의 내 배역은 최서빈이 맡은 ‘민지훈’ 역이었고.

실제로 내가 맡게 된 배역은 민지훈이 아닌, ‘최 대리’.

처음으로 내 배역과는 다른 꿈을 꾼 것이다.

이 불안한 마음이 결국 꿈 때문인가…?

잠깐만.

결국, 꿈은 내 전생이었다.

그러니까 모두 내가 겪었던 과거의 삶이란 것.

그런데 이번 배역은 겪어보지 못한 전생이기에, 이해도가 부족한 건가?

괜스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은 내 온몸을 휘어 감았고.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겨우 그 마음을 털어냈다.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겪어 봐야지만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구태여 전생과 연기를 엮을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잘하면 되는 것이다.

***

“안녕하십니까.”

영화의 첫 촬영 날.

예정 시간보다 무려 3시간이나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장 감독과 스태프들이 도착해 있었고.

배우는 나뿐이었다.

“어, 희성 씨 왔어?”

“네, 감독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그럼.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첫 촬영 날이잖습니까.”

그러자 장 감독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역시 내가 처음부터 알아봤어. 요즘 희성 씨 같은 배우가 없다니까.”

“아닙니다, 감독님. 그런데 오늘 고사 지내는 거 맞죠?”

원래 대본 리딩을 할 때, 고사를 지내고는 한다.

하지만 당시에 워낙 바쁘고 정신이 없어 급히 대본 리딩을 마무리했지.

그 뒤에 전달된 이야기로는, 오늘 현장에서 고사를 지낸다고 들었다.

첫 촬영은 무려 대부분의 출연진이 등장하는 떼 신.

어차피 출연진 모두가 등장하기에, 첫 촬영 현장에서 고사를 지내기로 한 것이다.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그럼요. 그럼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하시는 거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인 박스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에 돼지머리랑 다 세팅되어 있지.”

“예, 그럼 저는 열심히 연습하다가 오겠습니다!”

“그래. 이따가 보자고.”

장 감독은 스태프의 부름에 뒤를 돌았고.

나는 현장의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두 시간이 지날 무렵.

차량이 한두 대씩 현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다들 오나 보네.”

김 실장이 들어오는 차를 보며 내게 말했다.

“그러게. 다 도착하면 고사부터 지낼 것 같더라.”

그때, 차에서 내린 박민준이 내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촬영장에서 가장 먼저 만난 배우가 하필 박민준이네.

입을 꾹 다문 채 박민준이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항상 그랬듯 그는 내게 시비를 걸어 왔으니까.

하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굳은 얼굴로 서 있었고.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쓰윽.

순간 빠르게 시선을 옮겨간 박민준의 눈동자.

그는 재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척, 목을 가다듬으며 장 감독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희성아!”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르는 누군가.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최서빈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와 눈을 맞춘 뒤 허리를 접었다.

“어, 일찍 왔네.”

“하하,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우리 벌써 같이하는 두 번째 작품이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 영화, 잘해보자.”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손을 맞잡아 흔들었고.

“희성이 너랑 연기하면 쫘악 몰입되는 게 있잖아.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넵.”

“서빈 씨!”

장 감독이 최서빈을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예, 감독님.”

그는 장 감독에게 답한 뒤, 나를 바라보았다.

“이따가 촬영 때 보자.”

“네.”

현장 한쪽 공간에 마련된 고사상.

커다란 상에 올려진 나무 제기 위에는 몇 가지의 과일.

그리고 북어, 시루떡, 편육 등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돼지머리까지.

길게 늘어진 병풍 앞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고사가 시작되었다.

오늘 현장에 참석한 스태프, 배우와 매니저들까지.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고사상 앞으로 모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를 잡았고.

가장 먼저 장 감독이 고사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희 영화, 백만 터지게 해주십시오!”

장 감독은 온 마음을 담아 인사한 뒤, 절을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연 배우 최서빈의 차례.

그를 시작으로 배우들이 차례로 줄을 섰다.

너무나도 많은 인원 탓에 한 명씩 할 수가 없었고.

주연 배우들.

다음으로는 조연에서 연배가 있는 선배님들이 무리 지어 절을 올렸다.

그리고 찾아온 주연급 조연 배우들.

바로 내 차례였다.

앞으로 걸어 나가기 전, 옆에 서 있는 김 실장에게 몸을 기울였다.

“형.”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다가왔고.

김 실장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나 5만 원짜리 좀 빌려줘. 차에 지갑을 두고 왔어.”

김 실장이 내 말에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냈고.

내 손안으로 5만 원짜리 한 장을 밀어주었다.

“자, 다음은 배우들! 앞으로 오실게요.”

스태프의 말에 나와 박민준을 비롯한 조연 배우 3명이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박민준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가장 왼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장 감독을 흘긋거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관객들이 영화관에 쏟아지게 해주십시오!”

내 왼편에 선 박민준은 몸을 내 쪽으로 돌려 지갑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만 원짜리 두 장.

2만 원을 꺼내 세로로 접은 뒤, 고사상으로 걸어갔다.

돼지머리 입에 2만 원을 고이 꽂은 박민준은 흐뭇한 얼굴로 내 옆을 지나쳤다.

다음으로 내 차례가 왔고.

현장에 있는 온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희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열심히 촬영할 테니. 대박 나게 도와주십시오!”

고사상 앞에 허리를 접은 뒤.

앞으로 걸어가 5만 원권 한 장을 박민준이 꽂았던 2만 원 위에 올렸다.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뒤돌자 보이는 박민준과 장 감독의 얼굴.

장 감독은 흡족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고.

박민준은 돼지머리의 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눈동자를 굴리던 박민준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

“자, 영화 첫 장면은 전체가 출연하는 떼 신이니까, 되도록 한 번에 끝낼게요!”

“네!”

조감독의 말에 우리는 자리에 선 채로 합창하듯 답했다.

크랭크 인을 떼 신으로 찍는 경우는 드물긴 하나, 뭐 영 없지는 않은 편이다.

대사가 오가는 중요한 신이 아닌, 주요 인물들이 모두 회사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단순한 장면.

걷다가 넘어지거나, 로봇처럼 걷지만 않는다면 크게 NG가 날 리 없다는 뜻이지.

“레디, 액션!”

촬영에서 힘을 북돋아주는 첫 신.

별 탈 없이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기분 좋게 오케이입니다!”

장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부딪쳤다.

“다음 신은 우리 최서빈 배우. 순조롭게 슛 들어가 봅시다.”

그러자 최서빈을 제외한 모두가 바삐 촬영장에서 빠져나갔고.

나는 한쪽에 자리를 잡곤 최서빈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레디, 액션!”

장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최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역시 최서빈의 몰입력은 다시 봐도 감탄을 자아낸다.

“하아, 다른 메디컬에서 물건을 넣었다는 게 말이 돼?”

최서빈의 독백으로 신이 시작됐고.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은 최서빈을 향했다.

“분명… 리베이트가 있었던 거야.”

…어?

이어지는 최서빈의 대사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톤이 조금 아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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