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41)화 (41/303)

41화 #10 – 둘 중 하나가 아닌 (3)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사무실.

그 사이로 켜켜이 세워진 파티션들.

이 중심에 내가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바닥을 내려다보니 진회색의 장판 타일이 일렁였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의식을 하고 숨을 들이마셔 봤지만, 아무것도 코로 들어오지 않는 이 기분.

숨을 천천히 마시고 내쉬어도 그 어떤 공기도 들어오고 나가지 않았다.

공기의 순환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싸한 이 느낌.

뭐지….

어디서 이런 감정을 느껴봤던 것 같은데?

잠깐만.

이거 혹시.

맞다.

…꿈이다.

항상 꿈을 꿀 때마다 호흡을 하고 있지만,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가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 또 꿈속이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단번에 눈을 확 떴지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그대로였다.

“민 대리님, 서류 저한테 올려두신 거 맞아요?”

내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

짧은 단발머리에 오피스 룩을 입은 박 주임이었다.

“아까 서류 올려뒀는데?”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사했다.

“이상하다, 다시 한번 찾아볼게요. 그럼 회의 다녀오세요.”

“네.”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회의실로 걸어갔다.

긴 책상이 놓인 회의실.

이미 안에는 직원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민 대리, 여기!”

안쪽에 앉은 손 차장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예, 차장님.”

그의 옆에 착석하며 회의는 시작됐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내 옆에 있는 손 차장이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손 차장의 말에 우리의 시선은 모두 그를 향했다.

“지난주에 보고 드렸던, 대학 병원 건은 이번 주 중에 계약하고 납품하기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그는 빼곡하게 적은 자신의 다이어리를 확인하며 말을 이어갔다.

“견적 금액과 납품 품목은 따로 작성하여 오늘 중으로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손 차장의 이야기가 짧게 마무리되었고.

차례대로 내 순서가 다가와 입을 열려는 순간.

대표가 손을 들며 내 입을 막았다.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

“예, 대표님.”

그는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국동 정형외과, 모던 정형외과에 납품한 게 모두 한 명이 한 거라고 보고받았는데, 맞나?”

대표의 말에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각자 자리에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야, 저 두 군데 병원을 같이 납품했다고?”

“저게 말이 되는 실적인가?”

“이야, 그럼 그 직원은 올해 실적 하나도 걱정 없겠다.”

그들의 떠드는 소리에 더해지는 목소리.

바로 손 차장의 반대 라인이었다.

“참나, 누가 봐도 이사 직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실적인데.”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두 병원을 동시에 영업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사님 정도면 저 실적 가지고 회의 시간에 칭찬한다는 건 좀….”

쾅.

그때, 소란스러운 회의실을 잠재우기 위해 대표가 테이블을 한번 내려쳤다.

“자, 조용.”

대표의 목소리에 시끄럽던 분위기가 단숨에 잡혔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그는 턱으로 내게 일어나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나는 그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지훈 대리가 이번에 아주 큰일을 해냈어. 다들 박수 한번 보내지.”

짝… 짝짝짝.

회의실 안이 손뼉을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찼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활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

그 큰 실적을 낸 장본인이 바로 나였다.

손 차장은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지.

대리 직책으론 절대 따올 수 없는 병원들을 한 큐에 해냈으니.

다들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때, 유일하게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바로 최 대리였다.

나보다 입사가 빠른 최 대리는 현재 만년 대리를 달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보다 실력이 좋은 후배인 내가 눈엣가시겠지.

사사건건 시비에, 나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그는 오늘도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조금 더 찢어냈다.

내 입꼬리가 휘어질수록 그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잠시 뒤, 회의가 끝나고 한 명씩 회의실을 빠져나올 때.

“어이!”

최 대리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굳은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민 대리, 대체 어떻게 따내온 거야?”

“네?”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는 눈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그 병원들 말이야. 네 힘으로 한 거는 맞냐고!”

팟-

젠장.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꿈에서 깨다니.

다시 질끈 눈을 감았지만, 꿈은 이어지지 않았다.

떠오르는 꿈의 기억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대본을 펼쳐들었다.

뭐지?

지금까지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캐스팅이 들어온 역할은 민지훈 대리가 아닌 최 대리 역할이다.

하지만 방금 꾼 꿈에서의 나는 최 대리가 아닌, ‘민지훈’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최 대리 역할을 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지.

스르르 눈을 감고,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재차 떠올렸다.

잠깐만.

나를 연신 쏘아보던 최 대리의 얼굴은 다름 아닌 ‘최서빈’이었다.

…대체 뭐지?

***

회사에 도착하자 김 실장은 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희성아, 스케줄 정리됐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반겼다.

“어때, 얼마나 겹쳐?”

“저번에 이야기했던 대로 드라마 막바지 촬영 한 달 정도만 겹칠 것 같아.”

혹시나 일정이 겹치지 않을 수도 있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 정도 촬영이 겹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터라 그리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강행군이겠지만, 드라마와 영화 준비를 잘만 한다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기에.

의지를 불태웠다.

“이왕 두 작품 모두 하기로 한 거, 잘해내고 싶어.”

김 실장은 내 말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래. 이미 연기 경험이 있으니까, 영화는 천천히 준비하면서 대본을 읽어보면 돼.”

“그럴게.”

“우선 먼저 촬영하는 드라마에 집중하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하게 두 배의 노력으로만 이뤄질 수 없는 것.

그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는 달려야 할 것이다.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곧장 대본 연습에 들어갔다.

점심을 먹자마자 시작한 대본 연습이었지만.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무대에서 그런 실수를 하면….”

지이잉.

그때,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와 대본을 맞춰주던 그는 대본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희성아, 나 잠깐 전화 좀.”

“응.”

통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속으로 다음 대본을 읽어 내려갔고.

그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네, 맞습니다. 아… 그래요?”

긴 통화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지, 김 실장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통화를 이어갔다.

“아니요, 뭐 문제없죠. 연기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걱정 마십시오. 예.”

그의 통화 내용에 읽던 대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내 끊어진 그의 통화.

김 실장에게 곧장 물었다.

“형, 무슨 일 있어?”

내 말에 김 실장이 쓰읍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장 감독 영화 말이야.”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박민준도 합류한다고 전화가 왔어.”

“근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길래 김 실장에게 전화까지 준 거지?

“저쪽 소속사에서 제작사에 너랑 무슨 마찰 같은 게 살짝 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나 봐.”

“박민준 소속사에서?”

김 실장이 실소를 터트리며 답했다.

“어, 그래서 우리는 연기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지.”

“잘했어. 비즈니스에서 사적인 감정을 싣는 게 이상한 거지.”

박민준은 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김 실장은 내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박민준도 희성이 너랑 같은 조연 라인으로 들어온대.”

다시 박민준과 함께해야 한다는 게 반갑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옛날처럼 위기의식이나 긴장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붙었다.

박민준은 대학 동기 중 유일하게 배우로 자리 잡은 인물이었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도 몇 년째 조연에만 머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달랐다.

엑스트라에서 단역, 그리고 현재 조연까지.

점점 성장하고 있기에, 그가 의식되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녀석이 나를 보며 위기의식을 느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미소를 짓고 있자, 김 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영화 대본도 한번 맞춰볼까?”

내 마음과는 달리, 김 실장은 박민준의 출연이 영 걱정되는 모양.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야, 형. 박민준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는 내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우리는 우리 페이스대로 나가자. 나, 자신 있어.”

확신에 찬 내 말투와 표정을 본 김 실장은 이내 얼굴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얼른 이어서 드라마 대본 연습해보자.”

나와 김 실장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려놓았던 드라마 대본을 집어 들었다.

“43신부터 시작하면 되지?”

“응.”

***

여느 날과 다름없이 대본 연습을 하기 위해 회사로 출근했다.

지금까지 연습은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었고.

이른 아침부터 밤이 늦은 시간까지 내 연습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김 실장도 잘해내고 싶다는 내 욕심을 알아차렸는지, 한 번을 빠지지 않고 옆에서 연습을 도와주었다.

대본을 통째로 외울 만큼 연습한 나처럼.

매니저인 김 실장 또한 그 대본을 달달 외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회의를 다녀온다던 김 실장은 몇 시간이 지난 뒤, 연습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무언가.

내게 전달하기 위해 들고 오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고.

김 실장의 눈이 아닌, 그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희성아, 연습 잘하고 있었어?”

“그럼, 근데 그건 뭐야?”

그는 익살스럽게 종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드라마 주조연이랑 단역까지 캐스팅 끝났대.”

“그럼 바로 곧 촬영하겠네?”

김 실장은 또 한 장의 종이를 흔들며 답했다.

“맞아. 대본 리딩 일정도 떴어.”

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심호흡을 했다.

수없이 연습해왔고, 드디어 실전이 다가왔으니까.

너무나도 잘해내고 싶은 마음에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김 실장은 내 앞 의자에 앉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연예계 엑스트라]

-주연: 강찬성 (매니저 황현 역)

-조연: 진희성 (가수 미노 역)

-단역: 한소정 (가수 미노 스타일리스트 역)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스타일리스트 역이라는 글자에 시선을 멈춰 세웠다.

어…?

잠깐.

내 옆에서 함께하는 배역이 한소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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