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40)화 (40/303)

40화 #10 – 둘 중 하나가 아닌 (2)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선명했던 꿈.

가수의 꿈을 꾼 것도 벌써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 어떤 꿈도 꾸지를 않았다.

그리고 영화에서 맡은 영업 사원 역할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에서의 가수 역할 꿈을 한번 꿨으니, 영화 배역인 영업 사원 꿈도 한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했다.

하지만 며칠 내내, 그리고 낮잠을 자도 1분조차 꿈을 꾼 적은 없었다.

그 꿈을 꾸기 위해 몇 날 며칠 대본을 읽었고, 잠자기 직전에도 대본을 손에 쥐었다.

상상하며 눈을 감았지만, 전혀 비슷한 꿈조차도 나오지 않았지.

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내가 대본을 읽으며 상상하고, 온종일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꾸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영업 사원 꿈도 꿔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어떤 이유로 꿈을 꿀 수 있는 걸까.

규칙이라도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꿈은 나에게 어떤 힘을 주는 거지….

무슨 작용을 하길래, 내 몰입도가 강해질 수 있는 걸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희성아?”

“어, 형.”

김 실장이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불렀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응.”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대답을 이제야 하는 거야?”

“잠깐 다른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그가 흥미롭다는 듯 몸을 당기며 물었다.

“뭔데?”

실제로 하던 꿈 생각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형, 우리 드라마 있잖아.”

“연예계 엑스트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드라마에서 내가 맡은 가수 역할의 모델이 누군지 알아?”

김 실장은 내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모델이….”

그렇게 한참 생각을 하다 자신의 다이어리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연신 페이지를 넘기던 김 실장은 무언가를 찾았는지 고개를 벌떡 들었다.

“찾았어?”

“응.”

“누구야?”

내 예상과는 달리, 김 실장의 고개는 가로저어졌다.

“없어.”

“뭐?”

“없다고. 그냥 창작으로 만든 역할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꿈에서 ‘권찬’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보고 들었는데.

그럼 대체 내가 꿨던 가수 꿈은 뭐지?

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생각에 잠기자, 김 실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근데 배우 역할은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데?”

“작가가 애초에 임훈 배우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더라.”

나는 입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실제로 임훈 배우를 그 배역에 넣고 싶어서, 섭외 진행 중이라고 들었거든.”

“아, 그럼 가수 역할은 정말 모델이 없었던 거네.”

그는 내 말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 배우 역할은 있었던 게 분명한데, 가수 역할도 있었으면 말해줬을 거야.”

“하긴, 그랬으면 그 가수에게 배역을 부탁했을 수도 있겠고.”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가수 역할의 모델을 말 안 해줬을 리가 없지.

그럼 진짜 창작으로 만든 캐릭터라는 건데….

나는 다시 대본을 뒤적였다.

이미 끝까지 몇 번이고 읽었던 대본이지만, 또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내 역할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말인즉, 실제 권찬 역할이 아니라는 뜻.

더더욱 꿈에 대한 의문점이 피어났다.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

프라이빗한 한식집.

모든 곳이 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곳은 절대 어떤 사람들이 왔는지 서로 알 수가 없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룸에는 최서빈이 홀로 앉아 있었다.

“선배님!”

“어, 희성아. 왔어?”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그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나는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일찍 온다고 왔는데, 먼저 와계셨네요.”

“촬영이 생각보다 금방 끝나서 좀 일찍 왔어.”

그는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그럼 더 일찍 올 걸 그랬네요.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내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배님, 촬영은 다 끝나신 겁니까?”

“아직. 그래도 며칠만 더 찍으면 마무리라서, 여유 있는 편이야.”

그는 음식을 한 젓가락 먹으며 내게 물었다.

“술도 한잔할까?”

나는 옆에 있는 벨을 누르며 미소 지었다.

“좋죠!”

가볍게 술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연기로 넘어갔다.

“그래, 작년 영화제가 재밌었어.”

“정말요?”

한국에서 열리는 영화제들.

나는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

참석을 할 만큼 유명한 상업 영화를 찍어본 적도 없었고.

혹여나 찍더라도 비중을 차지할 조연 역할을 못 했을 테니까.

흥미로운 주제에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어, 작년에 거장 감독들 영화가 좀 많이 개봉했잖아?”

“맞습니다. 그래서 배우 라인업도 굉장히 탄탄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작년 영화제에 올라온 영화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워낙 감독들이 유명했고, 주연 배우들 역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지.

그렇기에 그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던 조연 배우들까지, 톱 배우 라인으로 올라가는 건 기본.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들까지 있으니까.

더불어 영화로 인해 작년 광고업계는 영화배우들이 휩쓸었을 정도다.

최서빈은 내게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희성이도 영화제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어?”

그의 한마디에 내 의욕은 불타올랐다.

영화제.

항상 나와는 거리가 먼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배우들.

수많은 카메라와 그들의 팬들.

그 사이를 여유롭게 걸어가 포토월에 서서 찍힌 사진과 기사를 수없이 보았었지.

질투가 나서 배가 아프거나 부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나도 언젠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단지 그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을 뿐.

나는 눈을 이글거리며 답했다.

“네, 그래야죠.”

그와 잔을 부딪친 후.

한 번에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안주 대신 다짐을 내뱉었다.

“선배님, 저 열심히 연기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최서빈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러더니 시선을 옮겨 앞에 놓인 음식을 집어 들었다.

“너 연기 잘해, 인마.”

“예?”

“너 같은 스타일의 연기는 처음이야.”

최서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랄까… 왠지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

톱스타인 그의 연기 평가에 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 살이 될 테니까.

“뭔가 끌리는 연기력이야.”

그의 극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얼굴이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항상 이야기의 뒷부분이 중요하다.

핵심을 알려주려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눈빛.

“이유는 모르겠어.”

“네?”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역시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굴리기에 바빴다.

“연기를 잘하기는 하는데, 온 세상을 뒤집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마음 같아서는 휴대 전화를 열어 메모하고 싶을 정도.

톱 배우에게 받는 일대일 연기 수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정도의 수업이라면 수십, 아니 수백만 원은 줘야 할 터.

“아직 모든 면이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함께 호흡을 맞춰봤던 배우 중에서는 가장 몰입력이 뛰어나.”

그는 홀로 소주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희성이 너 혼자 몰입하는 게 아니라, 상대 배우까지 그 몰입력에 휩싸이게 만드는 능력이랄까?”

정확히 그게 내 연기 능력이라는 걸 인지해본 적은 없었지만.

최서빈의 말을 듣고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몰입력이 최상이라는 건, 단순히 연기의 완성도를 떠나 그 이상의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니까.

“네가 연기한 걸 봐도 마찬가지야. 쟤는 대체 뭐가 다르기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어.”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 그 이상의 인사였다.

최서빈은 내 대답에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더 나은 연기를 하고 싶다면 말이야….”

그의 칭찬에 뜨거울 정도로 벅차올랐던 가슴을 차갑게 눌러내고, 차분히 귀를 기울였다.

“남의 연기를 보면서 배울 필요는 없어. 그저 네가 연습하고 촬영한 걸 보면서….”

최서빈과 나는 술자리라는 것도 잊은 채.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눴다.

음식이 식어갈 때까지.

추가로 시킨 술병이 비워질 때쯤.

최서빈은 내게 술을 따라 부으며 말했다.

“이번 장 감독님 영화, 같이하자.”

그의 눈빛에는 진심이 묻어 있다 못해 흐를 지경이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최서빈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거지?

물론 나 역시 그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작품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을 뿐.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한 터라, 대답을 망설이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난 네가 꼭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의 작품을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었다.

모든 작품이 대박을 치지는 않았으나.

드라마는 항상 이슈가 되었고, 영화 역시 손익 분기점은 늘 넘겼지.

그러니 그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톱 배우가 된 것 아니겠는가.

최서빈과 함께 작품에 들어간다면, 나 역시 손해 보는 것은 없을 터.

게다가 그와 작품을 함께한다면 잃는 것보다 배울 점이 많을 테니까.

***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

수차례 반복되는 연습에 입 안이 말라갔다.

물을 입에 머금고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이미 대본은 완벽할 정도로 숙지가 끝났다.

하지만 대사를 숙지하는 것과 연기를 연습하는 것은 다른 문제.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순식간에 몰입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

날이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똑똑.

들려오는 연습실 노크 소리에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네.”

대답과 동시에 열리는 문.

“희성아, 연습 중인데 미안하다.”

김 실장이 코를 찡긋거리며 조심스레 들어왔다.

평소 홀로 연습을 할 때면 잘 들어오지 않지만, 급한 일이 있는 모양.

그걸 알기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무슨 일인데?”

그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대본 두 개를 내밀었다.

“이제 우리 슬슬 결정해야 해.”

김 실장이 말하는 선택은 바로 드라마와 영화.

두 작품 중 선택을 해야 하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김 실장이 아닌 대본을 바라보았다.

중대한 결정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기에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 대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김 실장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게 맞는 거 같아.”

“응?”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의지에 가득 찬 얼굴로 답했다.

“두 작품 다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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