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1)화 (11/303)

11화 #3 – HS 엔터테인먼트 (2)

“앞으로 잘해봅시다.”

박 팀장은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팀장님.”

그는 내 말에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그럼… 그럴까?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얼굴도 볼 테니 말이야.”

“네, 저도 그게 편합니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러자고.”

그때, 박 팀장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손을 튕기며 말했다.

“아, 희성아. 지금 혼자 살고 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그 집은 어때, 살 만해?”

“예, 혼자 살기에 충분합니다.”

뭐, 좁고 방음도 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큰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사치였다.

“그래, 당장 이사할 필요가 없으면 조금 더 지내보자. 급한 건 아니니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지금 집을 그대로 사용하면 돼. 월세는 회사에서 내고, 후일 정산에 포함될 거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딩동.

1층 로비에 멈춘 엘리베이터.

“최 실장이 희성이 집까지 좀 데려다줘.”

“예, 그럴게요. 가요, 희성 씨.”

그들의 대화에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전 지하철로 갈게요.”

“에이, 그래도 우리 소속 배우가 됐는데, 태워다줄게.”

“아닙니다. 오늘 들를 곳이 있어서요.”

“그런 거였어? 알겠어, 그럼 조만간 연락할게. 조심히 가.”

“네, 가 보겠습니다.”

박 팀장과 최 실장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HS 엔터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길.

몇 시간 전에 이 문으로 들어설 때와는 너무 다른 기분이다.

이제 이 회사가 내 회사라니!

내가 대한민국의 3대 엔터 회사에 입성하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뒤를 돌아 HS 엔터 사옥을 한번 훑어본 뒤 긴 심호흡을 했다.

소속 회사가 생겼으니, 더 넓은 세상에서 연기를 할 수 있다.

더 많은 기회가 생길 테니까.

더 좋은 기회, 좋은 배역이 다가왔을 때 그걸 잡으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곧장 걸어가는 지하철.

사실 들를 곳은 따로 없었다.

생각도 정리할 겸 천천히 집으로 가고 싶었기에, 약속이 있다고 둘러댔던 것이지.

무엇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이 기분을 온전히 홀로 즐기고 싶었다.

계약서 봉투를 품에 꼭 쥐고 걸어가던 나는 한편에 서서 슬쩍 계약서를 확인했다.

‘HS 엔터테인먼트 전속 계약서.’

글씨만 봐도 짜릿했다.

상단에 적힌 제목만을 본 뒤, 다시 대봉투 안에 고이 넣었다.

순간 가슴이 웅장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계약했구나!

다시금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계약서를 꺼내놓았다.

HS 엔터테인먼트 전속 계약이라니.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디에라도 전화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아직 드라마가 잡힌 것도 아니고, 그저 계약만 한 것이기에.

물론 계약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자랑거리이기는 했다.

성대한 파티라도 열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파티라고는 홀로 자축하는 파티뿐.

나는 곧장 휴대 전화를 열어 배달 앱을 클릭했다.

최근 들어 가장 먹고 싶었던 족발, 보쌈.

오늘은 그 두 가지가 모두 있는 족보 세트를 선택했다.

그리고 평소라면 한참을 망설인 끝에 누르지 못했을 그 메뉴.

오늘만큼은 막국수 추가까지 하며 제대로 먹부림 플렉스를 했다.

…설렌다.

이게 행복이지, 별다른 게 행복이겠는가.

주문 완료 창을 확인하자마자 냉장고로 걸어가, 며칠 동안 연기한다고 참았던 맥주를 꺼냈다.

치익.

안주가 도착하기 전부터 맥주 캔을 따서 벌컥벌컥 마시는 이 기분.

빈속에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따끔따끔한 강한 탄산의 느낌.

크으.

환상이었다.

주문한 지 오십 분이 될 무렵.

드디어 눈앞에 펼쳐진 족보 세트와 맥주.

그리고 바로 앞에 대본 대신 올려둔 계약서와 백화점 상품권.

기분이 짜릿하다 못해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백화점 상품권 백만 원.

송유나를 돕고 보답 받은 이 상품권으로 뭘 하면 좋을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백화점 명품이었다.

이제 진정한 배우의 길로 접어드는데, 명품 하나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부푼 마음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고개를 들어 집을 살펴보자, 이내 그 마음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래, 명품은 무슨.

생활비로 아껴두자.

아직 사치 부릴 때가 아니지.

사치는 막국수로 충분해.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HS 엔터와 계약을 했지만, 오늘 역시 편의점으로 출근을 했다.

계약은 계약이고, 생활비는 필요했으니 말이다.

아직 드라마나 영화 같은 스케줄이 딱히 없었기에, 굳이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지이잉.

그때 울리는 전화기.

[발신인: HS 엔터 박한웅 팀장]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팀장님!”

-어, 희성아. 바쁘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곧 전화 한 통 갈 거야. 김지훈 실장이라고. 얘가 앞으로 희성이 네 매니저가 될 거야.

“제 매니저요?”

-그럼. 배우한테 매니저가 있어야지.

“와, 신기하네요. 매니저라니.”

-하하, 신기하기는. 아무튼, 어지간한 건 김 실장한테 말하면 케어해줄 거고, 만약에 말 못 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하면 돼. 그럼 바로 해결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팀장님.”

딸랑.

통화를 하는 사이에 들어오는 두 명의 손님.

그 둘은 다행히 과자 매대로 다가가 수다를 떨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당장 계산대로는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근데 지금 밖이야? 주변이 어수선하네.

“아… 저 지금 알바 중입니다.”

내 말에 박 팀장이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알바? 그만둔다고 해.

“네?”

-이제 영화, 드라마 조연하고 주연까지 꿰차서 천만 배우가 되어야 하는데, 바쁘지 않겠어?

박 팀장의 말에 나는 허리를 접으며 큰 소리로 답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팀장님!”

-하하, 그래. 열심히 달려보자, 희성아.

전화를 끊자마자 기쁨을 주체할 틈도 없이 재차 울리는 휴대 전화.

모르는 번호였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지훈 실장이라고 합니다.

“예, 방금 팀장님께 연락받았습니다.”

-오늘 바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

집 근처 조용한 카페.

마침 오전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라 저녁이 되기 전,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있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안쪽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앉아 있는 한 사람.

저 사람이 김 실장인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희성 씨 맞으시죠?”

“아, 네!”

“반갑습니다. 김지훈 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입니다.”

김지훈 실장.

키는 178 정도에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HS 엔터에서 보았던 박 팀장의 푸근한 인상과는 달리, 무쌍에 날카로운 눈매.

전반적으로 따뜻한 느낌이 아닌 예리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한마디로 일이라면 꼼꼼하고 철저하게 해낼 것 같은 스타일.

그리고 그의 옆에는 묵직한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앉으실까요?”

“네.”

우리는 가벼운 악수를 나눈 뒤 착석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장님은 나이가 어떻게….”

“저는 서른입니다. 희성 씨는 스물여섯이라고 알고 있는데, 맞으시죠?”

“예, 맞아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괜찮습니다.”

“에이, 그래야 저도 편해요.”

그제야 김 실장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희성 씨도 말 편하게 해.”

“그럴게요. 아니, 그럴게. 형.”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일 이야기 좀 시작해볼까?”

“좋아.”

“앞으로 활동할 때 알아야 할 사안들을 간단하게 알려줄게.”

그의 말에 몸을 앞으로 당겨 귀를 기울였다.

“촬영갈 때는 시간이 정해지면 집 앞으로 픽업하러 갈 거야. 헤어, 메이크업은 전부 숍에서 하는 거니까 간단히 세수만 하고 나오면 돼.”

“세수만?”

“응, 머리도 숍에서 다 감고 시작하니까. 촬영장에서의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케어할 거고.”

촬영 현장에 가려면 방송국에서 나오는 단체 버스만 타던 내게, 이런 호화로움이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혼자 활동할 때는 출연료 협상도 직접 했잖아. 그것도 이제 회사에서 하니까, 희성이 너는 연기에만 몰두해주면 돼.”

“맞네. 항상 내가 직접 했는데….”

사실 협상이라고 보기도 민망하긴 했다.

뽑아주기만 하면 최저 시급을 못 받아도 감사했으니까.

“현장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거든.”

바로 어제까지도 이런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하루 만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앞으로는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이제 아무 오디션이나 보러 가면 안 돼. 그렇다고 하고 싶지 않은 작품을 하라는 건 아니야. 나랑 같이 오디션 볼 작품을 고르고 하는 거지.”

“형도 같이 봐주는 거야?”

“그럼, 이제 너한테 맞는 역할. 어떤 작품을 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있는지 회사에서도 함께 봐줄 거야. 차기 HS 엔터의 유망주가 될 몸인데, 아무 작품이나 할 수는 없지.”

차기 유망주….

진짜 연예인이 된 느낌이었다.

물론, 이제 시작이다.

벌써 기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아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제 희성이 너는 연기 외에 신경 쓸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돼. 널 위해 움직이는 스태프, 회사가 있으니까.”

김 실장의 이 말이 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연기 외에 신경 쓸 일이 없다라….

항상 연기를 하기 위해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했다.

연기를 하기 위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한 컷의 신을 찍기 위해 이틀을 밤새며 현장에서 대기해야 했던 수많은 나날들.

헤어, 메이크업을 받으러 숍에 가는 것?

그건 사치를 넘어 꿈도 꾼 적이 없었다.

고작 한 컷을 위해 숍에 들르기라도 하면 오히려 엄청난 적자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토록 하고 싶던 연기, 오로지 연기만을 위해 살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시점에서 궁금함이 들었다.

박 팀장의 말대로 당장 편의점을 그만둔다고 해서 스케줄이 잡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무슨 돈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거지?

돈을 떠나, 당장 하루 내내 할 일이 없는데….

“형, 근데 나 이제 섭외는 어떻게 되는 거야? 꽂아주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뭐 사소한 배역들은 회사에서 꽂아줄 수도 있지만, 아직 필모가 아예 없어서 안 될 거야. 일단 조연 정도부터 따내야지. 그것도 회사에서… 그리고 내가 할 일이고.”

“그럼 나는 당장 무슨 일부터 해야 하는 거지?”

“너는 당장 내일부터 정신없이 바쁠 거야.”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내일 프로필 촬영부터 해야 해. 그래야 프로필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뿌릴 거니까. 그 뒤에는 작은 배역부터 필모를 쌓아갈 거고.”

“작은 배역… 어떻게?”

그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내려두었던 쇼핑백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한눈에 보아도 엄청나게 묵직해 보이는 쇼핑백.

“이게 뭐야?”

“대본.”

“…어?”

김 실장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이제부터 오디션 볼 작품을 골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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