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대호의 호수비로 1회 초를 무사히 마친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은 1번 타자 정대호부터 1회 말 공격에 들어갔다.
팡!
“볼!”
팡!
“스트라이크!”
타석에 선 대호는 미국 팀 선발 조시 그레함의 투구를 유심히 살폈다.
94마일의 투심 패스트볼과 고속 슬라이더, 그리고 써클 체인지업의 쓰리 피치 투수라고 알려진 조시 그레함은 일본전에 선발로 던졌던 에드밀러 디아스와 비견되는 미국의 원투펀치였다.
‘제구가 좋네!’
조시 그레함은 내셔널리그에 속한 애틀란타 워리어스 산하 트리플A인 귀넷 스트라이퍼스 소속으로 2033시즌 6월쯤에 콜업 되는 선수다.
팡!
“스트라이크!”
방금 들어온 패스트볼로 인해 볼카운트는 1B 2S가 되었다.
‘오늘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은 평범하네.’
투수가 던진 공에 대한 판정이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평범하다 느낀 대호는 스윙 자세를 취했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니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탁!
“파울!”
바깥쪽으로 꽉 차게 들어오는 공을 커트했다.
그냥 놔둬도 볼이 될 확률이 높기는 했지만, 살짝 애매한 감이 있었고 이런 건 그냥 파울볼로 만드는 게 더 편했다.
팡!
“볼!”
대호의 선구안은 스탯의 보정 효과를 받아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명백히 볼이라고 판단되는 공에는 전혀 배트를 가져가지 않고 애매한 코스로 날아오는 것만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투구 수가 아홉 개를 넘어 있었다.
“타임!”
막 투수가 공을 던지려고 자세를 잡았을 때, 대호가 느닷없이 손을 들며 타임을 요청했다.
심판은 대호의 타임 요청을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막 투구를 하려던 조시 그레함은 이것 때문에 리듬이 깨지고 말았다.
‘윽!’
경험이 많은 투수라면 일단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면, 심판이 타임을 선언하더라도 자신의 투구 리듬을 생각해 그대로 팔을 휘둘렀을 테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호, 이것 봐라!’
타임을 요청하고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던 대호는 그것을 보았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갑자기 꽉 깨문 입술.
일련의 행동은 투수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찌익!
대호는 손잡이에 그립 가드 스프레이를 뿌리고 타석으로 돌아와 타격 자세를 잡았다.
‘나한테 너무 많이 던져서 짜증 났나 본데, 근육이 놀랐나?’
단순히 투구 리듬이 깨졌다는 말 하나로는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젠장!’
조시 그레함은 허리 쪽 근육에 약간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투구를 해야 하기에 이를 참고 공을 던졌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따아악!
다다다다!
배트를 휘두르고 배트에 공이 맞는 느낌을 받은 대호는 그대로 1루를 향해 달렸다.
팟!
1루를 돌아 2루로 향하던 대호는 고개를 살짝 틀어 공의 향방을 찾았다.
‘3루까진 무리겠군.’
막 유격수가 공을 잡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탓.
무난하게 2루 베이스를 밟고 설 수 있었다.
팡!
대호가 2루에 도착하고 1초 정도 뒤에 2루수 글러브에 공이 들어왔다.
“대한민국 1번 타자 정대호 선수, 우익수 앞 안타로 2루에 진루합니다.”
“정대호 선수, 미국의 선발투수 조시 그레함 선수와 10구에 걸친 접전 끝에 2루타를 만들어 냈습니다.”
“정대호 선수는 정말이지 센스가 넘치는 선수입니다.”
하구연 해설 위원은 조금 전 2루타를 치고 여유 있게 2루 베이스를 밟은 대호를 칭찬했다.
2루에 진출한 대호는 잠시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하고는 손에 끼고 있는 장갑을 교체했다.
타격용으로 사용하는 두꺼운 장갑이 아닌 슬라이딩을 해도 손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줄 부드러운 장갑으로 말이다.
스윽!
시합이 재개되고 대호는 베이스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채 리드를 가져갔다.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3루로 뛸 수 있게 준비를 한 것이다.
보통 선수라면 견제에 잡힐 수도 있지만, 대호의 반사 신경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
팡!
“세이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스코어링 포지션에 발 빠른 주자가 나가자 투수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닌 듯, 조시는 타자에게 공 한 번 던지지 않고 2루에 연속으로 견제구를 던졌다.
2루 주자에게는 좀처럼 견제구를 던지지 않는다.
자칫 뒤로 빠지게 되면 점수로 연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데, 조시는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호에 대한 견제를 한 것이다.
이는 조시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더그아웃에서도 사인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습적인 견제구임에도 이미 상대의 동작을 보고 어떻게 할지 짐작한 대호는 속지 않았다.
팡!
“볼!”
휙!
“세이프!”
타자에게 공 하나를 던지고 바로 견제구가 또 다시 날아왔다.
하지만 대호는 이번에도 속지 않았다.
‘이것 봐라?’
투수는 물론이고 미국의 더그아웃도 자신을 견제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대호는 지금 자신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상대의 의도를 깨달은 대호는 1루 더그아웃을 향해 사인을 보냈다.
‘흔들어 보겠습니다.’
상대 투수와 코칭스태프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대호 역시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미 추인수 감독에게 그린 라이트를 받아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뛰어도 되는 상태였다.
한편 2루에 있던 대호로부터 사인을 받은 이강철 코치는 타석에 있는 2번 타자 이중호에게 전달받은 정보를 토대로 지시를 내렸다.
‘대호가 투수를 흔들려고 하니, 좋은 공이 오면 때려!’
미국의 더그아웃에서 2루에 진루한 대호를 잡기 위해 작전을 건 것처럼, 한국도 작전을 걸었다.
팡!
“볼!”
볼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였다.
주자에게만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타자에게는 제대로 된 공을 던지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뛴다.’
포수에게서 공을 돌려받은 투수를 보며 대호는 2루 베이스에서 조금 더 멀어지면 뛸 것처럼 액션을 취했다.
그런 대호의 모습에 조시는 인상을 찡그렸다.
자꾸만 신경을 거스르는 대호의 존재가 너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도루를 하든지 말든지 관심을 끄고 그냥 타자와의 대결을 통해 아웃 카운트를 올리면 좋겠지만, 더그아웃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더그아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 4일 전 대호를 풀어 놓았다가 어떤 참사를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악!
역시나 타자보다 주자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다른 곳에 신경이 쏠린 선수의 공 정도는 충분히 칠 능력이 되는 사람이 바로 이중호였고, 그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 것이었다.
한편, 타격음이 들리자마자 대호는 바로 스타트를 끊었다.
‘기회야!’
더군다나 맑은 소리를 들어 보면 홈 승부를 봐도 될 듯했다.
타석에 있던 이중호 또한 공을 때리고 바로 1루로 향했다.
그러고 나서 대호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뛰는 모습을 확인하고, 곧바로 2루로 뛰었다.
촤악!
대호는 공을 잡은 우익수가 홈으로 송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최대한 포수와 멀어지기 위해 포수의 왼쪽으로 크게 돌아 슬라이딩을 하며 몸을 틀었다.
눈앞에서 포수가 몸과 미트를 사용해 막아 내는 모습이 보였지만, 대호는 살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홈 플레이트를 터치했다.
“세이프!”
심판이 세이프를 선언하자 포수는 급히 몸을 틀어 2루에 있는 이중호를 잡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홈 승부에 가 있는 상황에서, 타자 주자는 이미 2루 베이스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홈에 신경 쓰지 않고 아웃 카운트를 올리는데 집중했더라면…….’
포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쓴물을 삼켰다.
짝!
아슬아슬하게 홈 승부에서 승리한 대호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였다.
턱턱!
몇몇 선수는 하이파이브에서 그치지 않고 대호의 헬멧을 두드리며 축하해 주었다.
“수고했다.”
추인수 감독과 여러 코치들 역시 한마디씩 칭찬했다.
투수에게 10구나 던지게 만들면서 안타를 치고 나가더니, 이번에는 우익수 앞 평범한 안타에 그칠 타구를 빠른 발을 이용해 득점했다.
그 결과 타자 또한 1루가 아니라 2루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호가 2루에서 투수와 미국 측 더그아웃을 흔들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든 결과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대호나 안타를 친 이중호는 3루와 1루에서 멈춰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 측 더그아웃은 지난 경기의 활약이 트라우마가 된 것인지 과도한 견제를 부렸고, 결국 지난번과는 다른 방식으로 당하고 말았다.
어쩌면 마음 한편에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메이저리거라고 한들 고작 스무 살짜리가 해 봤자 얼마나 할까, 그런 생각도 있었으리라.
한편 대기 타석에서 이 모든 진행을 지켜본 최태경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더그아웃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양손을 붙이고 배트를 휘두르는 듯한 행동을 하는 이강철 코치의 모습이 보였다.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
이강철 코치가 타석에 들어선 최태경에게 주문한 것은 바로 미국의 내야 수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는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난 타자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최태경은 발이 조금 느린 편이지만, 타격 센스가 무척이나 뛰어난 선수다.
그렇기에 더그아웃에서 이런 작전을 주문한 것이다.
엉거주춤 번트 자세를 하는 최태경의 모습에 조시 그레함은 눈을 반짝였다.
아직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가 번트 자세로 나오자 2루 주자를 3루로 보내고 4번 타자가 외야 플라이를 쳐 점수를 내려는 작전으로 판단했다.
‘번트란 말이지.’
조시 그레함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미국의 포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다.
‘1, 3루 번트 대비해!’
의도가 뻔히 보였기에 톰 로빈슨은 1루수와 3루수에게 번트에 대비해 전진 수비 사인을 보냈다.
팡!
“볼!”
번트를 의식해 몸 쪽 빠른 공을 던졌지만, 제구가 되지 않아 볼이 선언되었다.
작전은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였지만, 초구였기에 최태경은 번트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다 몸 쪽으로 공이 날아오자 몸을 뒤로 뺐다.
그러했기에 아직까지 투수나 다른 사람은 지금 한국의 공격이 번트로 2루 주자를 3루로 진루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다른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휘익!
번트 자세를 취하던 최태경은 자신을 맞춰 잡기 위해 구속이 조금 줄어든 대신 컨트롤에 신경 쓴 조시의 몸 쪽 낮은 코스 꽉 찬 포심 패스트볼에 자세를 풀고 스윙을 하였다.
따악!
“억!”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경악성이 들렸다.
1루수와 3루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원래 수비 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최태경이 휘두른 배트에 맞은 타구는 전진 수비를 하기 위해 홈 쪽으로 달리던 1루수의 키를 넘기고 외야로 굴러갔다.
“와아아아!”
1회부터 기막힌 작전이 터졌다.
조금 전 대호가 짧은 안타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을 이용해 홈에서 극적인 승부를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3번 타자인 최태경이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로 모두를 속였다.
이를 지켜보는 야구팬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멋진 명장면을 연속으로 만들어 낸 것에 대해서 환호했다.
이미 메달을 확보한 한국 팬들도, 메이저리거가 패하는 게 아니라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미국 팬들도 그저 즐거운 시합을 관람하며 즐거워할 뿐이었다.
다다다다.
2루에 있던 이중호는 이미 작전이 펼쳐진 것을 알기에 최태경이 번트 자세를 풀고 타격자세에 들어가자마자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다.
이중호도 발이 빠르기는 하지만, 대호만큼 빠른 것은 아니었기에 원래라면 홈에서 아웃 될 타이밍이다.
하지만 미리 스타트를 끊었고, 또 미국 팀 수비가 내야에서 번트만 대비하고 있던 터라 최태경의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에 속아 반응이 늦어 안정적으로 홈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최태경은 1루에 멈춰 1루 선상에 나가 있던 코치에게 칭찬을 받으며 장갑을 받아 꼈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