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퍽! 퍽! 퍽!
김제경의 투구가 미트에 꽂힐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구속은 한국에서나 강속구로 불러주는 93마일, 그러니까 149.6㎞을 살짝 넘어가는 150㎞에 불과했지만, 공의 분당 회전수, 즉 RPM이 2,500회가 넘어가서 그런지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을 상대로 압도하는 힘을 발휘하였다.
그렇게 마운드에서 선발로 출전한 김제경이 포수 최태경과 배터리를 이루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할 때,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 야수들 또한 푸에르토리코 선발투수 미구엘 산도발을 상대로 맹타를 휘둘렀다.
그 시초는 언제나 그렇듯 대표팀 1번 타자인 대호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의 타격에 자신감 있는 대호는 재능을 발휘해 1회부터 미구엘 산도발의 투구 능력을 분석해 타자들에게 전달했다.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에 선발된 선수들도 모두 프로에서 1군으로 활약을 하던 선수들이었기에 대호가 전달한 정보를 바탕으로 성적을 뽑아냈다.
따악! 따악!
1회 2점, 2회 1점, 3회 4점, 5회 3점을 내며 점수를 벌려 나갔다.
그에 반해 어리지만 재능이 넘치는 김제경의 투구는 푸에르토리코 타자를 상대로 5회까지 경우 1점만 내주며 호투를 하였다.
* * *
“와아아아!”
현재 스코어는 1:10, 9점차.
푸에르토리코와 대한민국의 올림픽 승자조 3라운드 경기는 5회까지 진행되었음에도 압도적인 점수 차로 대한민국이 앞서 나갔다.
6회 초, 푸에르토리코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는 가운데 마운드에는 김제경이 다시 올랐다.
“1:10, 9점차로 벌어진 가운데 푸에르토리코의 2번 타자 가브리엘 산체스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김승주는 입가에 잔뜩 미소가 걸린 상태로 느긋하게 중계를 하였다.
“오늘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을 상대로 우리 김제경 선수,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하구연 해설 위원 또한 김승주 아나운서와 다르지 않게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해설을 하였다.
당연한 것이, 성인이 된 이후에는 국제 무대 첫 출전인 김제경이 5회까지 고작 1점만 내주고 잘 틀어막고 있었으니까.
야구계의 선배로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 그러고 보니 저런 배터리를 뽑은 추인수 감독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현역 때도 메이저리그에서 대활약을 한 뒤 은퇴가 가까운 나이가 되었음에도 야구 발전을 위해 연봉까지 낮춰 가며 국내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이어 갔었죠.”
이제 처음 국제 대회에 성인으로 첫발을 디디는 김제경과 최태경을 선발한 것도 놀라운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는데, 올림픽 메달이란 중요한 길목에서 이런 생신인을 출전시킨 것에 대한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이번 5회만 잘 막아 내면…….”
김승주는 뭔가를 염원하는 것인지, 마운드에 서 있는 김제경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번 회를 강조했다.
“그렇죠, 이번 회만 잘 막아 내고 타자들이 점수를 뽑아낸다면…….”
김승주의 말을 받아 하구연 해설 또한 두 눈을 반짝이며 같은 말을 하였고, 덤으로 타자들이 점수를 더 내주기를 바랐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와 대한민국의 점수 차는 1:10으로 9점차였다.
아마 야구 경기 규정상 결승전을 빼고는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콜드게임이 가능했다.
이미 한국 대표 팀은 이전 1차전 때 대만을 상대로 콜드게임을 거둔 경험이 있었다.
뒤에 나올 선수들의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이번 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펑!
“스트라이크!”
6회가 들어 조금 힘이 빠진 듯 했지만, 김제경의 공은 아직도 위력적이었다.
초구 스트라이크에 이어 두 번째 공도 인코스 낮은 공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투가 나온 것인지 가운데로 공 반 개 정도가 밀려들어 가면서 날아들었다.
따악!
가브리엘 산체스는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받아 쳤다.
타다다다!
유격수 김재연이 급히 타구를 쫒아 달려가 봤지만, 타자가 친 타구는 그의 글러브를 통과해 좌익수 앞으로 굴러갔다.
“와아!!”
푸에르토리코 응원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점수 차가 9점으로 많이 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르게 노아웃 상황에서 선두 타자가 1루에 진루했기 때문이다.
아직 경기의 향방이 결정되었다고 말하기는 6회, 응원단들의 응원은 다시 한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것 때문인지 김제경은 그동안 던지던 것과 다르게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펑!
“볼!”
펑!
“볼!”
“타임!”
사인대로 공이 들어오지 않고 투 볼이 되자, 포수를 보고 있던 최태경이 타임을 요청했다.
그러고 나서 타임이 받아들여지자마자 마운드로 급히 올라갔다.
“제경아, 긴장할 것 없어. 우리 지금 몇 대 몇인지 벌써 까먹었어? 1점 정돈 내줘도 돼!”
9점이나 차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경이 무리하게 콜드게임을 의식하느라 힘이 들어간 것 같자, 최태경은 동료의 어깨에 들어간 힘을 덜어 내기 위해 그러한 말을 하였다.
“지금까지 잘 던졌잖아. 그러니까 점수 1, 2점 내주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알았어. 내가 좀 흥분한 것 같네.”
“그래, 이번 회만 마무리하고 내려가자!”
“어. 나도 지친다.”
예전 광주상고 시절, 두 사람은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이렇게 마운드에 올라 가벼운 이야기를 통해 긴장을 풀고 어려움을 극복했었다.
현재 두 사람의 소속 구단은 달라졌지만, 고교 3년을 함께 했던 터라 지금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현실을 풀어 나갔다.
‘뭐, 내가 점수를 내줘도 선배들이 다 해 주겠지.’
태경의 말처럼 자신이 몇 점 주더라도 이번 회까지만 잘 마무리하면 된다.
그 다음은 타자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란 생각을 하자,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휘익!
펑!
부웅!
“스트라이크!”
선두 타자 안타 이후 김제경의 공은 연속으로 존에서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은 경기 초반보다 구속이 줄어들어 91마일 정도였지만, 위력적이었다.
투수의 공이 눈에 익었다고 판단한 타자는 자신이 선정한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곧바로 배트를 휘둘렀지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와아아아!”
선두 타자의 진루 덕에 환호를 터뜨린 푸에르토리코 응원석 반대편에 있던 한국 팀 응원석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록 구속은 줄어들었지만 구위는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따악!
김제경이 던진 4구째, 투구가 타자가 휘두른 배트에 맞았다.
타구는 쭉쭉 뻗어 외야로 향했다.
다다다다!
잘 맞은 타구가 워닝 트랙을 지나가는데도 아직 체공을 하고 있었다.
대호는 귀로 듣고 타자가 친 타구가 홈런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뒤 방향을 잡고 뛰었다.
펑!
달리던 기세를 줄이지 않고 글러브를 머리 위로 들어 캐치를 하였다.
타구가 글러브 안에 들어가는 것을 느끼자 급히 속도를 줄여 봤지만, 펜스와 부딪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쿵!
‘윽!’
아무리 매트로 보호를 했다고는 하지만 충격에 의한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휘익!
대호는 급히 몸을 돌리며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 1루로 던졌다.
한편, 동료의 타구를 보고 장타라 판단한 가브리엘은 빠르게 스타트를 끊었다.
다다다다!
팀에서 2번 타자를 맡고 있을 정도로 그의 발은 무척이나 빨랐다.
2루를 지나 3루로 뛰던 가브리엘 산체스.
그런데 그가 막 3루 베이스를 밟으려던 때, 3루 선상에 있던 주루 코치가 다급하게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뭐? 귀루하라고?’
너무도 이상한 주루 코치의 사인에 가브리엘은 의문이 들었다.
현재 한국과의 점수 차를 생각하면 팔을 격렬하게 회전하며 자신이 좀 더 빠르게 뛸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할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귀루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주루 코치의 신호를 따르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 그는 급히 방향을 바꿔 뒤를 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어?’
가브리엘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분명 동료인 호세 파라가 친 타구는 안타성 코스였고, 쭉쭉 뻗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중견수가 그 타구를 캐치하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듯이 말이다.
‘젠장!’
호세가 친 타구는 안타가 아닌 외야 플라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자신은 다시 전속력으로 2루 베이스를 찍고 1루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 점이 아쉬운 상황에서 승리의 여신은 자신들이 아닌 상대편에 미소를 지어 주었다.
퍽!
“아웃!”
최선을 다해 달려가 보았지만, 역시나 공은 발보다 빨랐다.
“와아아아!”
다시 한번 한국 응원단 속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연속 안타로 점수를 내줬다고 생각하던 타구가 중견수의 글러브에 잡히고, 또 진루를 하던 주자가 1루로 복귀를 하던 중 아웃되었다.
완벽한 플레이가 나온 것이었다.
“빅 타이거! 빅 타이거!”
관중석에서 대호의 영어식 이름이 울리기 시작했다.
팀의 위기 상황에서 대호의 멋진 플레이가 나왔기에 한국 응원단뿐만 아니라 오늘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야구팬 모두가 흥분해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이다.
“와우!”
그리고 그건 김제경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자신이 던진 공이 타자의 스윙에 맞아 날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제경은 낙담했다.
절치부심하고 던졌는데, 자신의 공이 그대로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투아웃.
타구는 펜스 가까운 곳에서 대호에게 잡혔고, 1루에 있던 주자는 3루로 뛰다 복귀도 못하고 중간에 아웃되었다.
물론 이로써 6회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아웃 카운트 하나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투구가 지금까지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을 상대로 잘 막혔지만, 6회에 들어서자마자 힘도 빠지고 악력도 많이 줄어 경기 초반과 같은 위력이 나오진 않았다.
또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이 자신의 공에 눈이 익었는지 잘 제구된 공도 정확하게 치고 있었다.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 이번 타자만 잘 잡으면 내 임무는 끝난다.’
제경은 마운드에 서서 그렇게 머릿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후우!’
투구를 하기 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스윽.
휘익!
포수 태경의 사인을 받고, 신중하게 공을 던졌다.
펑!
부웅!
구속은 떨어졌지만 구위는 아직까지 남아 있었는지, 타자가 휘두른 배트와는 꽤나 차이를 보이며 지나갔다.
“스트라이크!”
방금 공은 엄밀히 말하면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이었다.
하지만 제구에 힘쓴 제경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기에, 심판의 경향에 따라 스트라이크 콜이 불릴 수도 있는 코스였다.
그렇기에 타자의 배트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김제경 파이팅!”
뒤에서 대호가 힘을 내라며 파이팅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뒤에는 대호가 있다.’
비록 자신과 나이가 같아 대표 팀 내 막내 라인이었지만, 현재 제경에게 그보다 든든한 동료는 없었다.
조금 전에도 연속해서 안타가 나와 점수를 내줄 수도 있었는데, 철벽과도 같은 수비로 타자는 물론이고 1루에 있던 주자까지 아웃시키지 않았는가?
공격은 물론이고 수비에서도 이렇게 투수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동료는 흔치 않은 존재다.
그렇기에 제경은 방금 대호의 응원을 듣자마자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스윽!
마치 1회 초구를 던지듯 제경은 신중하게 와인드업을 하고 투구를 하였다.
그의 눈에는 포수인 태경의 모습도, 타석에 서 있는 푸에르토리코 타자도 보이지 않고 오직 포수의 미트만이 보였다.
너무도 집중을 하다 보니 주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퍼엉!
“스트라이크 투!”
“김제경 선수, 대단합니다.”
중계석에 앉아 중계를 하고 있던 김승주는 방금 전 김제경의 투구를 보며 놀라 소리쳤다.
“허허! 정대호 선수의 슈퍼 플레이에 힘을 얻었나요. 오늘 던진 구속 중 가장 빠른 95마일이 찍힙니다.”
“95마일이면 152… 아니, 153㎞에 육박하는 구속입니다.”
하구연은 전광판에 구속이 나오자 이를 ㎞로 바꿔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였다.
이곳 경기장이 미국의 경기장이다 보니 모든 표시가 미국에서 사용하는 기준으로 나온다.
그렇기에 마일을 사용하다 보니 한국의 시청자는 좀처럼 알기 힘들었다.
펑!
“스트라이크, 아웃!”
볼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로 몰려서 그런지 타자는 한참 높은 하이 패스트볼에 어이없이 배트가 나가며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