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1회 초, 4실점을 하고 멘탈이 나가 버린 유리아스 에반스.
하지만 그는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 코치에게 더욱 암울한 말을 들어야만 했다.
LA다윈스의 1선발이자 에이스인 그에게 불펜이 준비가 될 동안 시간을 끌어 달라는 부탁을 들었기 때문이다.
“경기를 하다 보면 이럴 때도 있는 것 잘 알지 않나?”
“으음…….”
“오늘은 네가 못 던진 것이 아니라 오클랜드의 타자들이 컨디션이 더 좋았을 뿐이야.”
그러나 네 타자에게 두 개의 홈런과 두 개의 연속 안타를 얻어맞아 4실점을 한 유리아스에게 그러한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투수 코치의 말이 맞다.
아무리 자신의 컨디션이 좋다고 해도 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타자가 자신보다 더 컨디션이 좋고, 또 오늘이 평소보다 공이 더 잘 보이는 날이라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LA다윈스의 1선발로 오른 뒤, 이렇게까지 게임이 말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메이저리그 콜업 된 직후인 6년 전 뉴비 시절에도 이렇진 않았다.
‘그런데 초구부터 이제 겨우 스무 살, 두 번째 시즌을 치르는 녀석에게 홈런을 맞고 이어지는 연속 안타. 게다가 올해 서른네 살로 퇴물에 가까운 홈런 브레드한테 다윈스 스타디움을 훌쩍 넘기는 장외 홈런을 얻어맞다니……!’
정말이지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그냥 깨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투수 코치는 그냥 잊으라고만 말하며, 불펜이 준비될 때까지 조금만 버티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젠장!’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게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유리아스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후우! 후우!’
이대로 공을 던졌다가는 사고가 날 것 같은 느낌.
그는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투구 준비를 하였다.
어느새 타석에는 오클랜드의 5번 타자 레이지 잭슨이 타격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루틴인데, 유리아스는 간신히 진정시킨 보람도 없이 다시 분노가 치솟는 걸 느꼈다.
어째서인지 레이지 잭슨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이놈이나 저놈이나…….’
타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레이지의 모습이 왠지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펑!
“윽!”
레이지 잭슨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급히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넘어졌다.
유리아스가 던진 공이 그의 허리 쪽으로 깊게 날아왔기 때문이다.
98마일의 강속구와 보더 라인을 잘 활용하고, 정교한 볼 컨트롤을 주 무기로 하는 유리아스가 하마터면 몸에 맞는 공을 던졌기 때문인지 넘어진 레이지는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새끼… 날 맞추려고 했어!’
레이지는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공이 절대 실수가 아니란 것을 말이다.
투구를 하기 전 분명 자신과 눈을 한차례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던진 공이 자신의 허리 쪽으로 날아와 깊게 박혔다.
만약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몸을 뒤로 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왼쪽 옆구리에 공을 맞았을 것이다.
“이봐, 오스틴! 너희 투수 미친 거 아냐?”
레이지는 자신을 향해 위협구를 던진 유리아스를 언급하며 LA다윈스의 포수 오스틴 완스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지, 진정해! 유리아스가 지금 네 타자 연속으로 홈런 두 개와 안타를 얻어맞아서 4실점이나 했는데 정신이 있겠어?”
오스틴 완스는 레이지의 불만 섞인 항의에 투수가 멘탈이 나가 실수한 것이라 변명을 하였다.
하지만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인을 무시하고 타자 몸 쪽으로 공을 던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과 배터리를 맺고 있는 투수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스틴도 팀 동료인 유리아스를 어쩔 수 없이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레이지를 노려보고 있는 유리아스의 눈빛을 보면, 이대로 정상적인 투구를 하진 않을 것으로 보여 불안했다.
‘제길, 유리아스. 왜 그러는 거야?’
무엇 때문에 유리아스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오스틴으로서는 그저 더그아웃을 쳐다보며 애원을 할 뿐이다.
‘제발 사고가 나지 않게 빨리 교체를 시켜 줘요.’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마 자신들의 에이스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너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LA다윈스 코칭스태프들은 불펜을 준비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회초 노아웃에 4실점이나 하고 말았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유리아스가 멘탈이 나가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준비도 되지 않은 불펜을 바로 가동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러다 교체된 투수에게 문제라도 발생을 한다면 LA다윈스의 불펜이 차례로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도리 없이 불펜이 제대로 준비가 될 때까지 유리아스에게 마운드를 맡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퍽!
“윽!”
“히트 바이 피치!”
역시나 우려대로 사고가 나고 말았다.
“퇴장!”
주심은 몸에 맞는 공을 던진 유리아스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곧바로 퇴장을 명령했다.
“아니…….”
오스틴은 그 판정에 곧바로 일어나 항의하려고 했다.
“아무런 말 하지 마!”
주심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으며, 아직도 마운드에 서 있는 유리아스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초구 몸 쪽 깊은 볼을 던졌을 때는 그냥 넘어갔다.
홈런과 연속 안타를 맞으며 멘탈이 흔들려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방금 저 공은 아니었다.
얼굴 가까운 곳을 향해 목적을 가지고 던지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오늘 주심을 보는 짐 웨스트는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다.
아무리 이곳이 LA다윈스의 홈이라 하지만,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났다간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기에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보통은 헤드 샷이 아니라면 곧바로 퇴장시키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 덕분인지 항의를 하기 위해 나오던 오클랜드 슬랙스의 감독 마이크 케세이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공에 맞고 쓰러진 레이지 잭슨의 상태만 확인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다행이 머리가 아닌 왼쪽 어깨에 공을 맞은 레이지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1루로 걸어갔다.
한편, 아직 불펜이 준비가 되기도 전에 유리아스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LA다윈스는 어쩔 수 없이 다음 투수를 내야만 했다.
바뀐 투수는 원 포인트 릴리프 투수인 더스틴 에이였다.
원래는 롱 릴리프인 라이언 페릿을 준비하려 하였지만, 그는 아직 몸이 덜 풀린 상태에서 유리아스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더스틴을 내보낸 것이다.
팡!
“볼!”
팡!
“볼!”
역시나 원 포인트 릴리프로 나온 더스틴은 좀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더그아웃의 선택으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아직 준비가 덜 된 라이언 페릿을 위해 시간을 끌어 주기 위해 볼을 던졌다.
원 포인트 릴리프로 한 타자만을 상대하기 위해 올라왔기에 더스틴은 굳이 힘들게 스트라이크를 잡을 이유가 없어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으로 공을 던졌다.
타자가 자신이 던진 공에 스윙을 하면 좋고, 아니면 재수가 좋게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불러주면 더 좋다는 생각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볼 컨트롤이 그리 좋지 못하였기에 그가 던진 공은 모두 볼 선언이 되었다.
한편 타석에 서 있는 알 시몬스는 투수의 심리를 읽었다.
‘급히 나오다 보니 시간을 벌려고 하는군!’
멍청이가 아니라면, 지금 투수의 모습을 보고 LA다윈스가 어떤 전략을 쓰고 있는지 금세 알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굳이 힘들게 상대할 필요가 없지.’
상대의 생각을 읽은 알 시몬스는 마치 칠 것처럼 타격 자세를 잡고는 그냥 상대의 공을 지켜보았다.
3구, 4구, 모두 알의 생각이 맞아들었다.
“Walk!”
결국 시몬스는 볼넷을 얻어 1루로 걸어 나갔으니까.
상대가 자신을 상대하려 하지 않는데, 타자가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있는가?
더스틴은 아무런 아웃 카운트도 올리지 못했고, 오히려 볼넷을 내줬음에도 그냥 불펜의 몸이 풀리자마자 계획대로 교체되었다.
여전히 상황은 노아웃, 그렇지만 이번 1회에만 벌써 세 번째 투수가 나왔다.
이날, LA다윈스는 롱 릴리프 라이언 페릿을 비롯해 총 여섯 명의 투수를 출전시켜 오클랜드 슬랙스 타자들을 상대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섯 명의 투수를 내보내고도 오클랜드 슬랙스에게 17:5란 엄청난 점수 차로 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대호는 LA다윈스를 상대로 6타수 5안타 1홈런을 치고, 올해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날 경기의 주인공은 두 번째 타자 기록을 세운 대호가 아니라, 서른네 살의 나이에 1회 장외 홈런을 포함해 세 개의 홈런을 친 주장 홈런 브레드였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던 2026시즌을 정점으로, 에이징 커브 때문에 하락세로 들어서 점점 홈런 개수가 줄어들던 참이었다.
그래도 작년까진 어찌어찌 서른두 개의 홈런을 쳤지만, 올해 2032시즌에 들어온 이후 전반기 90경기를 치르는 동안 겨우 열다섯 개의 홈런에 그쳤다.
이 추세라면 시즌이 끝나는 10월까지 가더라도 홈런 서른 개를 기록하지 못할 거란 전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어디서 파워 드링크라도 마시고 왔는지, 세 개의 홈런을 몰아쳤다.
아직 서른 개의 홈런을 치려면 앞으로 열두 개의 홈런이 더 필요하지만, 오늘의 기세만 놓고 본다면 남은 경기 동안 충분히 서른 개 이상 달성할 수 있을 듯했다.
그 때문에 대호보다 기자들에게 더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 *
쏴아아아!
웅성웅성!
“와! 요 맹랑한 막내가 어디서 주장의 별명을 알아냈기? 거기서 그런 말을 할진 정말 몰랐다고!”
경기가 끝나고 샤워장에서 땀을 씻고 있던 중, 알 시몬스가 선수들에게 대호의 맹랑함을 떠들었다.
“하하하!”
“하하!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알아낸 거야?”
여기저기서 알 시몬스의 말에 동조를 하며 웃음과 함께 대호에게 어떻게 주장의 별명을 알았는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주장의 별명이라뇨?”
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홈런을 칠 때가 되었다라는 거 말이야!”
“아! 그게 주장의 별명이었어요?”
알 시몬스의 설명을 들은 대호는 설마 그게 주장의 별명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설마 여기도 이름 가지고 놀리는 문화가 있나?’
한국에서는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많은 놀림을 받았었다.
대호가 야구를 시작한 계기는 사실 몸이 왜소하고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름은 대호(大虎)였으니 당연히 놀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1회차에는 별 차이도 없었고 말이다.
그러나 상태창을 얻어 스탯을 올리며 규칙적인 생활과 균형 잡힌 식단으로 먹다 보니, 지금처럼 건장한 운동선수의 신체가 되었다.
그 뒤로는 아무도 대호를 놀리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차별을 싫어하는 미국에서 한국처럼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문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주장처럼 한 덩치 하는 사람을 상대로 말이다.
“뭐, 처음부터 주장이 저렇게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고 또 홈런을 많이 치는 홈런 타자도 아니었으니 그건 당연하지.”
알 시몬스는 비록 주장인 홈런 브레드처럼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지만, 오클랜드에서 가장 오랫동안 선수로서 활약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홈런 브레드의 메이저리그 초기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요? 전 주장이 처음부터 지금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야구에 관심 없는 많은 사람들이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 하지만 홈런이 처음 메이저리그에 콜업 되었을 당시만 해도 키만 멀대같이 큰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어.”
“헉! 허수아비 주장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네요.”
“뭐, 열심히 벌크 업을 해서 메이저리그 3년차에 지금처럼 바뀌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알 시몬스의 이야기를 듣던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홈런 브레드의 초창기 모습을 기억하는 선수나, 그렇지 않은 선수들이라도 선배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대호는 그런 경험이 없었기에 이를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주장을 보게 되면 사과를 해야겠네.’
대호는 주장과 너무도 친하다 보니 한국에서처럼 이름을 가지고 놀려 주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면 주장에게는 아픈 기억, 혹은 잊고 싶은 별명이란 것을 듣게 되자 너무도 미안해졌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