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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는 명전이다-84화 (84/209)

84화

메이저리그 2032시즌, 드디어 그 막이 올랐다.

오클랜드 슬랙스와 LA데블스의 개막전, 그 선두 타자는 작년 후반기 오클랜드 돌풍을 일으켰던 신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척!

대호는 타석에 들어서 몇 번 가볍게 배트를 휘두른 뒤, 별안간 배트를 쭉 뻗어 저 멀리 외야 펜스를 가리켰다.

“와우! 이게 뭔가요? 신인의 패기인가요? 아니면 라이벌에 대한 도발인가요?”

“허어… 이제 겨우 2년차에 들어선 정대호 선수, 아직 신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무모한 도발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디오 부스에 있는 해설과 아나운서 두 사람은 대호의 예고 홈런에 대해서 떠들었다.

말하는 단어는 조금 달랐지만, 논조에는 걱정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는 라이벌끼리의 개막전이기는 해도 양편으로 나뉜 팬들이 오랜만에 찾아온 야구를 즐기며 웃고 떠들 뿐이었는데, 대호의 도발로 인해 LA데블스 진영해서 엄청난 욕설이 튀어나왔으니까.

그에 반해 오클랜드 슬랙스 팬들은 너무도 과감한 신인의 홈런 예고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신인은 없었다.

사실 예고 홈런이라는 게 멋있어 보이지만, 멋진 퍼포먼스를 해 놓고 홈런을 치지 못하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다.

정말 자신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을 겨우 2년차에 들어선 신인이 라이벌 구단을 상대로, 그것도 개막전에 마운드에 오른 에이스 투수를 상대로 하니 팬들의 반응도 당연했다.

“이런 FUCK!”

아니나 다를까.

타격 자세를 잡고 있는 대호의 옆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호는 미동도 없었다.

바로 옆에서 포수가 욕설을 지껄이고 있는데도 눈길 하나 주지 않은 것이었다.

‘뭐 이런 놈이!’

데블스의 포수 지미 프레드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데블스 소속 선수들 중에서는 성격이 좋은 편으로 알려져 있는 그라고 해도, 신인의 패기를 넘어서 건방진 행동을 하는 대호를 보자 열불이 치솟았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상대에게 계속 화를 내는 것도 바보 같은 짓.

한차례 시범 경기에서 쓴맛을 본 적 있는 그였기에 투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사인을 보냈다.

‘신중하게…….’

하지만 LA데블스의 에이스 프랭크 타이라는 지미 프레드의 생각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그 역시 작년에 대호와 경기를 치러 봤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아니, 그가 에이스 1선발로 인정받은 이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 정확하리라.

‘감히!’

프랭크는 지미의 사인 대신,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겠다는 사인을 보낸 뒤 자신의 전력으로 압살시키겠다고 작정했다.

휘익!

프랭크의 포심 패스트볼은 최고 구속 99마일에 회전수 2,700RPM에 달하는 명품 패스트볼로,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구종이었다.

쐐애액!

그러나 이 무지막지한 공을 보고도 대호의 오른쪽 입꼬리는 살짝 올라갈 뿐이었다.

‘통했군. 역시 어딜 가나 1선발급 정도 되면 자존심이 강하다니까.’

따아아악!

맑은 타격음이 울렸다.

사실 대호가 LA데블스의 모두를 도발시킨 홈런 예고를 한 것은 전적으로 선발투수 프랭크에게서 포심 패스트볼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콧대가 하늘 높이 치솟은 이들이라면 당연히 정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던져 구위로 타자를 압도하려 할 테니까.

자신이 예상하는 코스에 예상하는 구종으로 날아오는데 이런 공을 못 칠 타자는 메이저리그에 없었다.

* * *

“와우! 정대호 선수, LA데블스의 에이스이자 1선발 프랭크 타이라를 상대로 초구 포심 패스트볼을 그대로 받아쳐 처음 예고한대로 홈런을 만들어 냅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방금 스피드건에 찍힌 프랭크의 패스트볼 구속은 무려 99.5마일이었습니다. 프랭크도 많이 화가 났던 모양인데, 정대호 선수와의 대결에서 결국 쓴물을 삼키는군요.”

한국, KBC 스포츠.

정대호라는 이름값은 1년 사이 한국에도 많이 올라 있었다.

실력은 물론이고 신인상을 통한 라이벌리까지 널리 퍼지며 메이저리그 중계 계약도 치열해졌고, 승자는 KBC 스포츠가 되었다.

개막전이라 직접 미국으로 날아와 중계 중이던 아나운서 김흥부는 흥분한 목소리를 높였다.

“와아아아아아!”

“들리십니까? 데블스 스타디움에서 오클랜드 슬랙스 팬들이 함성 소리가!”

“HO! HO! HO!”

개막전 1번 타자로 나와 홈런 예고 퍼포먼스를 보이고 그대로 성공시켰다.

장내 아나운서 또한 다시 한번 떠들기 시작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정대호 선수의 홈런이 이번 메이저리그 2032시즌 1호 홈런이라고 하는군요!”

한편, 오클랜드의 더그아웃에서는 대호의 퍼포먼스에 놀라 코칭스태프들과 선수단 모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기쁘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냈다간 보복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짝!

그라운드를 돌아 홈으로 들어온 대호에게 대기 타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2번 타자 지미 울프가 손을 뻗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헤이, 대호! 축하해!”

“고마워 지미!”

자신의 퍼포먼스 때문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축하를 해 주는 지미의 모습에 대호는 빙긋 웃었다.

그러면서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홈런을 쳤으니 너도 한 방 부탁해!”

“하하, 알았어.”

그는 대호의 말에 반짝이는 하얀 이를 내보이며 대답하였다.

웅성웅성!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동안, 원정팀 자리에 있는 오클랜드 슬랙스의 팬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그런 팬들의 환호에 대호 역시 팬 서비스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호에게는 그저 간단한 팬 서비스에 불과했지만, 팬들에게는 그런 게 아니었다.

스포츠 스타가 가까이에 있는 듯한 느낌.

특히 맨 앞에 있던 어린아이들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따악!

그때였다.

2번 타자 지미 울프가 2루수 키를 넘기는 안타를 치고 나갔다.

데굴데굴.

깊게 빠진 타구는 지미 울프에게는 호재였다.

그는 작년까지 오클랜드에서 1번 타자를 맡고 있을 정도로 선구안이 좋고, 또 발이 빨랐기에 3루까지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촤악!

그가 슬라이딩을 하며 3루에 들어선 순간, 그제야 외야에서 날아온 공이 글러브에 들어왔다.

‘나이스!’

지미 울프는 자신 역시 괜찮은 성과를 거둔 것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개막전 출발이 좋은데?”

선수단 중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 때문에 오클랜드 슬랙스의 더그아웃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그에 반해 홈팀인 LA데블스 더그아웃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작년 후반기 라이벌 팀인 오클랜드 슬랙스에 밀려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것 때문에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리고 시범 경기에서도 괜찮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데 시즌이 개막하고 뚜껑을 열어 보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와 버렸으니,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감독 필 네쉬는 분통을 터뜨렸다.

팀 에이스인 프랭크를 내놓고도 1회 초에 굴욕스러운 예고 홈런을 얻어맞은데다가 또다시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나가 있으니 답답해졌다.

딱!

“아닛!’

투수가 공을 던졌다.

그런데 오클랜드의 3번 타자인 리키 헨슨은 무려 3루에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기습 번트를 시도한 것이었다.

타구의 방향은 통상적인 번트의 방향인 3루가 아니라, 리키 헨슨이 뛰어야 할 1루 방향으로 굴러갔다.

다다다다!

작전 수행 능력과 타격 센스, 그리고 빠른 주력까지 겸비한 리키 헨슨이 3루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지미 울프를 생각해 1루로 보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홈 승부, 혹은 1루에서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도 이편이 좋았다.

데블스의 1루수가 느리게 굴러가는 공을 잡기 위해 뛰어오는 것을 보며 그는 살며시 웃었다.

‘FUCK! FUCK!'

프랭크가 급하게 1루에 서서 공을 받으려고 했으나, 공이 날아오는 것보다 리키 헨슨의 발이 조금 더 빨랐다.

“세이프!”

그러는 사이 이미 홈에서도 지미가 들어와 1점을 추가해 버렸다.

선발투수가 공을 열 개도 던지지 않았는데, 벌써 점수는 2:0.

오클랜드 슬랙스는 LA데블스를 말 그대로 압살하고 있었다.

“하하하! 저기 데블스 놈들 얼굴 좀 봐!”

“정말, 우리 오클랜드가 이렇게 경기한 게 얼마만이야?”

응원석에 있던 팬들은 더욱 신나 마구 떠들었다.

반면 데블스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데블스의 팬들 사이에서는 죽음 같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대호의 퍼포먼스 때까지만 해도 기가 살아 마구 욕설을 지껄였지만, 연속적인 실점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도 주자 1루에 노아웃 상황.

그들은 암울한 상황에 입을 열지 못했다.

* * *

LA데블스 홈구장인 데블스 스타디움 VIP부스에 앉아 개막전을 지켜보던 오클랜드 슬랙스의 구단주 존 피셔 주니어는 호탕하게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며 환호했다.

“와하하하하!”

존 피셔 주니어가 환호를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장년인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아르테 모레노.

LA데블스의 구단주였다.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 주고 있는 팀의 구단주와, 반대로 1회 초부터 2실점을 당한 팀의 구단주의 표정이 같을 수는 없었다.

존 피셔 주니어는 이죽거리며 아르테 모레노에게 말했다.

“이거… 오늘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하! 벌써부터 좋아하진 말게. 이제 겨우 1회 초일 뿐이야!”

아르테 모레노는 존 피셔의 말을 듣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창문 밖 경기장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경기는 계속해서 LA데블스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따아악!

오클랜드 슬랙스의 주장이자 4번 타자인 홈런 브레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프랭크의 세 번째 투구를 받아쳐 좌익수 깊숙한 안타를 만들어 냈다.

3루 쪽으로 멀리 뻗어 나간 공은 데굴데굴 구르며 펜스 깊은 쪽에 도달했다.

이를 쫓아간 좌익수는 이미 놓친 1루 주자 대신, 홈런 브레드를 잡기 위해 2루로 송구했다.

텁.

“세이프!”

그러나 자신이 발이 느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홈런 브레드는 무리하게 3루로 뛰지 않고 2루에서 멈췄기에, 별다른 효과는 보지 못했다.

4회차는 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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