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샌안토니오 미션스와 경기를 마치고 코퍼스크리스티로 이동한 미들랜드 락하운즈는 장장 5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무척이나 늦은 밤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씻고 자도록.”
감독인 바비 크로스는 선수들이 버스에서 하차하자, 개인 정비를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락하운즈 선수들 역시 경기를 치르고 곧바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느라 피로에 절어 있는 상태라 곧바로 숙소로 움직였다.
“감독님!”
막 숙소로 들어가려던 바비 크로스는 자신을 부르는 모텔 매니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슬랙스의 단장으로부터 온 전문입니다.”
“음, 단장의 전문? 왜 전화로 안 하고…….”
“아…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직원분이 죄송할 건 없죠. 주세요.”
바비 크로스는 늦은 시각이라 피곤한 상황에 오클랜드 구단으로부터 전문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굳이 직접 안 알려 주고 쪽지를 보냈는지 살짝 궁금해져 직원이 건네주는 전문을 받아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잘 접힌 쪽지를 받은 바비 크로스는 그것을 한 손에 쥐고 숙소로 들어갔다.
탁!
방문을 닫은 그는 일단 씻기로 하고 쪽지를 테이블에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 * *
한편, 차에서 내린 대호도 지정된 숙소로 들어갔다.
“먼저 씻어.”
원정이기에 대호가 묵는 숙소 역시 2인 1실이었다.
룸메이트는 브렛이었는데, 대호는 먼저 씻으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동을 하느라 피곤하긴 하지만, 장시간 차를 타다 보니 몸이 굳은 듯하여 마무리 운동을 해 줘야 잠이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았어.”
대호의 루틴을 잘 알고 있는 브렛이었기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그런 브렛을 뒤로하고, 대호는 가방에서 배트 하나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마무리 운동을 하기 위해 굳이 멀리까지 나가지 않고, 숙소 앞 보안등의 불빛이 비치는 곳에서 가볍게 스윙을 하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코칭스태프들이 묵고 있는 숙소 방향에서 보조 타격 코치인 후안이 대호를 불렀다.
“대호!”
“예!”
“잠시 감독님께서 부르신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바로 지금.”
“알겠습니다.”
대호는 그제야 마무리 운동을 멈추고 감독의 방으로 향했다.
* * *
똑똑똑.
“감독님, 저 정대호입니다.”
“들어와.”
대답이 들리자, 대호는 문을 열고 감독의 숙소로 들어갔다.
끼익.
“부르셨습니까?”
“그래. 잠시 할 말이 있어서 불렀네.”
바비 크로스는 언제 씻었는지, 말끔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대호를 맞았다.
“이리 와서 앉지.”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감독의 말 따라 자리에 착석한 대호는 조용히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기다렸다.
그런 대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바비 크로스는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깃든 복잡한 표정으로 대호에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출발 전에 전했어야 하는데, 나도 이제야 전달을 받아서 말이야.”
바비 감독은 용건을 이야기하지 않고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대호는 금방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감독님, 혹시… 제가 콜업 되었습니까?”
대호의 입에서 먼저 콜업이란 말이 나오자, 그제야 바비 크로스 감독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축하를 해 주었다.
“그래 축하한다. 늦었지만 다시 짐을 싸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라고!”
감독의 축하에 대호는 잠시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밤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네바다 주에 있는 라스베이거스로 출발하면 비행시간만으로도 다섯 시간은 걸릴 터.
그러니 씻고 공항으로 출발해 비행 티켓을 끊는 등 기타 잡무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여섯 시간은 소요된다는 말이었다.
‘…….’
콜업 된 것은 좋지만, 당장 휴식도 못 취한 상황에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당연한 거지만 프런트에서도 이해하고 있는 일이야. 너무 급하게 내려온 지시라 내일 하루는 휴식일이 지급될 거라고 하더군.”
연이어 들려온 감독의 말에 속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속으로 대호가 그렇게 생각을 떠올릴 때, 또다시 바비 감독의 말이 들려왔다.
“늦은 시각이긴 한데, 이런 모텔에서 하룻밤을 새고 가는 것보단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좋지 않겠어?”
“네?”
호텔이란 말에 대호는 눈이 커졌다.
마이너리그라고 하지만 수준 차이는 있다.
더블A의 숙소가 모텔급이라면, 트리플A는 메이저리거들이 머무는 5성급 호텔 정도는 아니더라도 2성급 호텔 정도의 숙소에서 지낸다.
그러니 감독도 대호에게 굳이 이곳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라스베이거스로 가기 보단, 피곤하더라도 더 편한 곳에서 머무르라고 권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더 지시할 말씀이 있습니까?”
대호는 감독의 말처럼 굳이 이곳에 있기보단 콜업 된 김에 라스베이거스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였다.
“나가면 아론이 나와 있을 테니까 함께 가면 되겠군.”
“아! 아론도 저랑 함께 콜업 됐습니까?”
대호는 감독의 입에서 아론 헤들러의 이름이 거론되자 물었다.
“그래. 아론도 드디어 트리플A로 콜업 됐지. 그 녀석도 올라갈 때가 되긴 했어. 그리고 공항까지는 후안 코치가 데려다줄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감독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흔들어 축객령을 내렸다.
* * *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방으로 돌아가니 먼저 씻고 침대에 누워 있던 브렛이 물었다.
그런 브렛을 보며 대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브렛, 축하해 줘!”
“응? 아, 오늘 너 대단했어. 홈런 사이클이라니… 역시 정대호!”
축하를 해 달라는 대호의 말에 브렛은 오늘 기록한 역대급 퍼포먼스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고 그것에 대해 칭찬했다.
하지만 칭찬의 말을 들었음에도 평소와는 다른 표정으로 자신을 보자, 브렛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음…….’
왜 저런 태도인지 알 수 없는 브렛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더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너… 트리플A로 콜업 된 거야?”
브렛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설마설마했다.
그렇지 않아도 더블A에 함께 콜업 되어 락하운즈에서 활동한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나가는 상황이었다.
하이 싱글A에서 3주도 되지 않아 더블A로 콜업이 된 대호였는데, 이쯤에서 트리플A에 콜업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 역시 선수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브렛 역시 대호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대호에게서 그런 기미가 보이자 곧바로 물어본 것이었다.
“맞아! 방금 전 감독이 불러서 갔는데, 콜업 승인이 났대.”
“아, 축하해! 정말이지 너한테 이런 날이 금방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대호의 콜업 소식에 브렛은 축하를 해 주고는 오늘 바로 떠나는 것인지 물었다.
그런 브렛의 물음에 대호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별은 짧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맞아. 그런데… 대호 너 혼자 가?”
“아니. 아론도 나와 함께 콜업 되었어.”
대호는 자신이 들은 그대로 브렛에게 알려 주었다.
“그렇구나. 잘 됐네. 아는 사람하고 같이 가면 좋지.”
비록 함께 트리플A로 콜업 되진 못했지만, 브렛은 결코 대호를 질투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하이 싱글A에서 막혀 야구를 계속 해야 하는 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길을 열어 준 친구가 대호이지 않은가?
그것을 보답하기 위해 억지로 더블A에서 아침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던 것이니까.
“그래. 브렛, 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너도 얼른 위로 올라와!”
대호는 자신을 보며 아쉬워하는 브렛의 모습에 미소를 덕담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브렛도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나야 그러고 싶은데… 네가 날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은데?”
“하하하!”
너무도 빠르게 실력이 향상되어 콜업 되는 대호를 보며 브렛은 그런 현실을 이야기했다.
이에 대호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렇게 브렛과 짧은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니, 모텔 주차장에는 벌써 후안 코치와 아론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몇몇 락하운즈 선수들 또한 나와 있었는데, 그들은 아론과 대호의 트리플A 콜업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나온 동료들이었다.
축하와 작별 인사를 하러 나온 동료들과도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눈 대호는 그렇게 두 달 만에 더블A 구단인 락하운즈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오클랜드 슬랙스 산하 트리플A 구단인 라스베이거스 에비에이터스로 떠났다.
* * *
트리플A로 콜업 되면서 하루의 휴가를 받은 대호와 아론은 늦은 시각 비행기를 타고, 코퍼스크리스티에서 라스베이거스로 날아왔다.
1,425마일이 넘는 거리로 비행시간만 무려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다 보니 대호와 아론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는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라는 별칭처럼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으로 환했다.
두 사람은 오클랜드에서 결제한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그동안 마이너리거로서 누리지 못했던 호화로운 시설들을 마음껏 즐겼다.
비록 메이저리거가 누리는 혜택과는 큰 차이가 나지만, 이것만 해도 더블A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고급스러움이었다.
대호와 아론이 투숙한 호텔은 조금 낡기는 했지만 운동기구가 갖춰진 체육관이 있었고, 또 짧은 트랙이지만 수영장도 갖춰져 있어 아침 운동을 나온 두 사람을 놀라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여기 생각보다 좋네?”
솔직히 두 사람은 이보다 더 좋은 시설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올해 초,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에 초청을 받았을 때 묵었던 곳은 이보다 더 시설이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구르다 보니 그런 기억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2성급이긴 하지만 호텔에서 잠을 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트리플A도 다른 마이너리그 구단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선수들이 야구를 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메이저를 왔다 갔다 하는 AAAA급 선수나 40인 확장 로스터에 들어가는 선수들에 대한 대우 문제가 불거졌고, 또 선수협의 요구로 인해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다.
그리고 그 혜택을 지금 대호와 아론이 누리는 중이었고 말이다.
평소 루틴대로 아침 운동을 마친 대호와 아론은 아침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달그락달그락.
“아론, 오늘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호는 빵을 입에 가져가며 아론의 계획을 물어보았다.
“이왕 하루 휴가를 받았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가진 휴가를 즐겨야 하지 않겠어?”
질문을 받은 아론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더블A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하루 정도의 일탈은 괜찮지 않냐는 뜻이었다.
“음… 그것도 좋겠네.”
이야기를 들은 대호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작년에 회귀를 한 뒤로 지금까지 오직 한 가지 목표만 보고 앞을 달려왔다.
잘 벼려진 칼처럼 집중한 덕에 드디어 트리플A에 이르렀고, 그 말은 출발선에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는 뜻도 되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구단으로 가 봤자 거기도 원정 나가서 감독이나 코칭스태프를 만날 수도 없고.”
“어?”
대호는 방금 전 아론이 들려준 말에 깜짝 놀랐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자신이 모르던 사실을 아론이 알고 있자,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거야 에이전시에게 들었지.”
“에이전시?”
“응, 어제 감독에게 콜업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연락을 했었지.”
“아!”
짧은 탄성을 지른 대호는 자신이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그리고 아론이 조금 전 왜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아론은 이런 점에서는 빠르구나.’
자신이 너무 앞만 보고 달려 그 동안 잊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새삼 떠올리게 해 준 아론이 고맙고, 또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