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0.01초 소드마스터 136화
‘내가 쓸 건 다 썼는데.’
그나마 내 몸 하나를 지켜 줄 수 있던 신성한 보호 역시 아까 엘티히와 있을 때 써버렸다.
‘아까 엘티히가 괜한 짓만 안 했어도······!’
신성한 보호 하나쯤은 남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완전히 무방비였다.
수호의 방패로 저 미친놈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 이후에 회심의 일격을 날렸으나 짧은 사정거리로 인해 끝끝내 놈의 숨통을 끊어내지 않았다.
“아슬란······.”
물론, 라일라칸의 몸은 이미 걸레짝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반쯤 너덜거리는 몸으로 흐느적거리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운 점은, 놈이 벌써 마력을 끌어 모아 몸을 천천히 회복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목을 쳤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놈이 살아 돌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머리에서는 뒤지기 싫으면 얼른 튀라는 비상벨을 울렸지만, 이 몸은 여전히 태평하고 여유만만하게 거만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이 허세가 감히 적 앞에서 등을 보이는 것을 허락할 리 없기 때문이다.
“왕이시여!”
그때 기사들이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그들은 완전히 날아가 버린 집무실 안에서 대치하고 있는 나와 라일라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와, 왕께서 라일라칸을······.”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라일라칸이 저 정도로······.”
무엇보다 그들은 피를 철철 흘리며 간신히 걸음걸이를 이어가고 있는 라일라칸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내 허세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라일라칸.”
나는 라일라칸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까지다.”
“······?”
“그 이상으로 넘어온다면 그땐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라일라칸이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전 그건 역시······. 손속에 정을 둔 것인가?”
“그래. 그것이 본좌의 마지막 자비였다. 이 이상 본좌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땐 목을 날려 주겠다.”
“자신 있느냐? 두 번은 당해주지 않는다.”
“자신?”
나는 차갑게 라일라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구나. 본좌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는 네 목이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죽을 것이다.”
“······!”
“시험해 보고 싶은가? 그럼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떼어 보거라.”
이 미친 허세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아무리 걸레짝이 된 라일라칸이라도, 이 아슬란의 스텟으로는 저놈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가 없다.
그럼 쿨타임이 돌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한번 허세에 절여진 몸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근데 왜 안 움직이는 거냐?’
라일라칸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내 허세가 확실히 통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한 발자국을 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일까.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역시 넌 그것밖에 안 되는 위인이었던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허세가 계속해서 라일라칸을 자극했다.
“기사라면 응당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지 말아야 하거늘. 네놈은 벌써 두려움에 빠져 숨도 쉬지 못 하는구나.”
그, 그만 자극해 이 미친놈아!
나는 계속 주둥이가 열리려는 걸 억지로 닫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일까.
“고맙다, 아슬란.”
뭐, 뭐가요?
“내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네놈은 죽이고 가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서 말이다.”
라일라칸은 기어코 이를 악물며 내게 다가오려 했다.
그리고 그가 발을 떼는 순간.
콰앙-!
하늘에서 작살 같은 것이 내려와 라일라칸 앞에 꽂혔다.
“······?”
그 뒤로 라일라칸 주변에 길쭉한 것들이 계속해서 내려와 땅에 박혔다.
촤아아-!!
땅에 박힌 그것들이 푸른 마력을 뿜어내며 바닥에 마법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거기서 위기감을 느낀 라일라칸이 얼른 뒤로 몸을 빼려고 했다.
파지직-!
“큭!”
하지만 마법진 위로 솟아오른 방어막이 그의 가는 길을 막아 세웠다.
라일라칸은 힘으로라도 방어막을 부수려고 했으나, 하늘에서 수많은 창이 쏟아져 라일라칸을 덮쳤다.
콰콰콰쾅-!!
“크헉!”
무지막지한 파상공세에 천하의 라일라칸이 쓰러졌다.
그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완성된 마법 감옥은 그를 그 자리에 가둬 놓았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조잡한 마법을······!”
그 파상공세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놈은 자신을 가둔 이 마법 감옥을 부수기 위해 마력을 발산했지만, 정말 누가 만든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일라칸도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대로 있거라, 라일라칸.”
그때 카랑카랑 하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엘티히였다.
“엘티히? 네가 왜 이런 짓을······.”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네놈은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어. 대체 왜 이리 변한 거지? 300년 전 너라면 결코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 거다.”
콰아앙-!!
라일라칸은 감옥에 쳐져 있는 방어막을 주먹으로 힘껏 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일어나는 전류가 그를 공격했다.
“크윽!”
그는 신음을 내뱉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흐흐. 엘티히. 넌 날 알지 못한다. 내 뜻을 네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참견하지 말고 얼른 이거나 풀어!”
콰앙-! 콰앙-!!
라일라칸은 감옥을 부수기 위해 연신 공격을 날렸다.
그로 인해 한번씩 진동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혹시라도 저 감옥이 부서져 라일라칸이 다시 밖으로 튀어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소용없는 짓이다. 너를 가두기 위해 나와 엘프들이 특별히 만든 감옥이니.”
“너야 말로 소용없는 짓이다. 이 라일라칸을 고작 마법으로 붙잡아 둘 수 있을 거 같나?”
“당연히 안 되겠지. 그래서 기다렸던 것이다. 네가 아슬란과 맞붙기를.”
이건 또 무슨 소리여?
“지금 너는 아슬란에게 치명상을 입은 상태. 거기다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올렸지. 그 감옥에 갇히게 되면 더는 마력을 회복시킬 수가 없다.”
“뭐?”
“원래의 너였다면 그깟 감옥쯤은 쉽사리 빠져나왔겠지만, 지금처럼 약해진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겠지. 난 네가 약해지기를 기다렸다.”
“엘티히!!”
“잠잠이 있거라, 라일라칸.”
엘티히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듯 팔을 세게 휘저었다.
그러자 검은 철문이 내려와 라일라칸의 감옥을 단단히 감쌌다.
더는 라일라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발악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라일라칸이 엘티히의 손에 완전히 붙잡힌 것이었다.
“이 정도면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구나.”
엘티히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도 대화를 해볼까?”
* * *
“조심해서 옮기거라!”
“예!”
기사들이 조심스레 마법 감옥을 옮기고 있었다.
전각에 모인 기사들과 신하들은 그 감옥을 힐끔 바라보다 다시 엘티히에게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라일라칸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고맙구나, 아슬란.”
나는 그런 엘티히와 눈을 마주쳤다.
만약 그녀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그 걸레짝이 된 몸으로 라일라칸은 나를 찢어 죽였을 것이다.
이걸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나와 라일라칸이 싸우는 걸 기다리고 있었나?”
“그래. 라일라칸이 여기 왕국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 너희 둘이 어떻게든 담판을 낼 것 같았거든.”
“도박을 한 것인가?”
“부정은 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그토록 쉽게 라일라칸을 제압할 줄은 몰랐다. 제아무리 네가 강하다고 한들, 라일라칸 역시 상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강자이니까.”
엘티히는 진심으로 놀란 눈빛이었다.
내가 라일라칸과 싸우는 걸 보지 못했던 신하들이 기함을 터트렸다.
“왕께서 라일라칸을?”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자 엘티히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래. 라일라칸이 아슬란의 털끝 하나 건드려 보지 못 하고 당했지. 그토록 무기력한 라일라칸은 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오오······.”
“과연 아슬란 님이십니다!”
그 말에 이놈의 병신 캐릭터는 또 심취에 잔뜩 빠져 있었다.
그러다 나는 엘티히에게 물었다.
“엘티히. 왜 라일라칸을 살려 준 것이냐?”
“······.”
“놈이 발을 뗀 순간, 본좌는 그 목을 날려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네가 나서고 말았지.”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으나, 그래도 알 건 알아야 했다.
엘티히의 행동은 마치 라일라칸을 살리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라일라칸은 지금 죽여선 안 된다. 그에게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뭐지?”
“지옥문을 닫을 수 있는 열쇠. 즉, 테키나 족속이 더는 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도록 이 세상과 연결된 문을 닫는 것이지. 그리고 그 열쇠가 라일라칸 몸 안에 있다.”
테키나 족속과 이 대륙을 연결하는 문.
대륙에서는 그것을 세상의 끝이라 칭한다.
그곳을 닫게 되면 이 대륙 곳곳에 있는 모든 문을 닫을 수가 있게 되고, 그럼 테키나 족속은 영원히 대륙에 발을 들일 수가 없게 된다.
“라일라칸은 그 열쇠로 문을 닫으려 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다. 그 문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했거든. 하지만 그것을 찾게 된다면, 영원히 이어질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열쇠가 나온다고?
여기서?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열쇠가 라일라칸에게 있었다니.
원래 스토리에서는 랜덤으로 세상의 끝을 닫는 열쇠를 흡수한 존재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랜덤이라 누구에게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아예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 게임을 플레이 할 때 열쇠의 존재는 거의 배제하는 수준이었다.
나도 그것 때문에 세상의 끝을 닫을 수 있는 열쇠를 아예 잊어 먹고 있었다.
근데 그 귀중한 것이 라일라칸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는 건가?
“그 열쇠는 원한다고 강제로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일라칸을 그 자리에서 죽이면 열쇠도 같이 파괴되고 만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서 엘티히가 내게 말했다.
“그러니 당분간 라일라칸의 감옥을 이곳 일라이 왕국에 두고 싶구나.”
뭐? 무슨 미친 소리야.
엘티히가 24시간 달라붙어서 감시를 해도 모자랄 판에.
괜히 저놈이 감옥을 뚫고 나오면 이곳에 무슨 난리가 벌어질지 모른다.
난 단칼에 거절하려고 했으나-
“라일라칸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도, 그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사람도, 너뿐이다. 아슬란.”
“······.”
“난 라일라칸을 제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넌 가능하지. 그래서 너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말에 내 허세가 다시 한번 전신에 차올랐다.
“좋다. 허락해 주지.”
“고맙다, 아슬란. 이 은혜는······.”
“단, 놈이 감옥을 빠져나온다면 그땐 가차 없이 죽여 버릴 것이다.”
“자, 잠깐. 그랬다가는 열쇠가!”
난 거만하게 턱을 옆으로 괴며 엘티히에게 말했다.
“열쇠는 쓸모가 없다.”
“뭐?”
“테키나 족속이 모든 문을 열고 나오는 이 대륙을 밟는 순간, 본좌가 놈들의 뿌리까지 뽑아 괴멸시킬 것이다.”
“······!”
“그러니 열쇠에 연연하지 말거라, 엘티히.”
나는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강렬한 허세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본좌의 발아래 모든 악마가 사라질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