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0.01초 소드마스터 111화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요동친다.
그저 몇 발자국 걸었을 뿐인데, 대체 어떤 힘을 발휘한 것인지 여기 있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아슬란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마치 놀라운 그의 힘을 경외하듯.
“아슬란.”
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버티고 있던 카르만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놈이 이렇게 나오는 것인가.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무릎도 꺾일 것만 같았다.
그런 추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칼을 뽑아야 한다.
카르만은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가 칼을 뽑으려는 순간.
“왕이시여.”
뒤에서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황 레헤나였다.
그녀는 신성한 빛을 뿜어내며 아슬란에게 말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들이 아직 우매하여 무례함을 저지르는 것뿐입니다.”
그런 레헤나의 말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
“······?”
이들 모두를 짓누르던 힘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레헤나는 정신을 차리고 각자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라할을 섬기는 빛의 후손들이여.”
그 따뜻한 음성이 퍼짐과 동시에 레헤나의 몸이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우리는 빛을 섬기는 자. 그리고 빛의 예언을 따르는 자. 우리 레이어스 교단과 나, 교황 레헤나는 일라이 왕국의 국왕 아슬란을 예언된 빛의 기사로 인정하니, 그를 대적하는 자는 곧 빛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 교단을 배척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교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녀가 지지하는 사람은 곧 교단이 지지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러므로 예언된 영웅을 따라 이 대륙을 악으로부터 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 우린 마땅히 예언을 따라 빛의 기사를 따라야 한다!”
부드러우면서 강렬한 그녀의 목소리가 왕궁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슬란은,
펄럭~
망토를 휘날리며 먼저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환영 인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모두 들어오도록.”
당당하고 격조 있는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은 잠시 주춤거리다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삭막하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전각에 가득했다.
‘원래는 평화와 화합의 목적으로 모인 거였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서로 다투지 않고, 분란 없이 만남을 가지려 했다.
테키나 족속을 막기 위해서라면 모든 왕국이 힘을 합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시작부터 재를 뿌려 버렸네.’
이놈의 허세가 그걸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평화는 무슨.
당장 내일 왕국끼리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카르만 저놈을 지지하면서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인 건 저놈들이 먼저였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내 허세가 이토록 날뛰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잘하면 되지.’
시작은 좀 험악했지만, 지금이라도 부드럽게 이끌어 가면 되지 않겠는가?
“아슬란.”
그런데 불안하게 초장부터 카르만이 말문을 열었다.
“아까 밖에서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여기서 확인을 시켜줘야겠는데.”
과연 그 불안감대로,
“확인이랄 것이 있느냐. 말 그대로다.”
놈은 기어코 잠잠해진 내 허세를 다시 들끓게 만들었다.
“내 뜻을 따르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빛의 기사가 되었다고 해서 네가 대륙을 통치하는 정복자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런 시시한 자부심 따위가 아니다.”
나는 회장에 모인 이들을 스윽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본좌가 진실로 너희를 정복하고자 했다면, 진작 그리했을 터. 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성이 무너졌을 것이고, 내 손이 닿는 곳마다 피로 가득했을 것이다.”
“······!”
“정녕 그것을 원하는 것인가?”
내 허세력이 끝을 모르고 폭발하는 중이었다.
“모든 왕국을 적으로 돌린다면 일라이 왕국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일라이 왕국의 힘은 필요하지 않다. 본좌의 힘만으로도 너희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
“그 무슨······.”
“시험해 보고 싶은가? 그럼 아무 왕국이나 말을 해보거라. 지금 당장 그 왕국으로 강림하여, 본좌의 말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증명해 줄 터이니.”
“!?”
······이제 나도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저질러 버린 거, 나는 눈을 부릅뜨고 전각에 모인 이들을 노려보았다.
“······.”
그러나 아주 다행스럽게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일 뿐.
하지만 카르만은 눈가를 꿈틀거리며 뭔가 제대로 터트릴 것처럼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긴장감이 극에 달해 거의 폭발 직전까지 다다랐을 때.
“아슬란 님을 의심하는 건 이제 여기까지 하십시오.”
레헤나가 중재자로 나섰다.
“300년 전, 대륙에 있는 모든 족속이 힘을 합쳐 마침내 악마들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그 악한 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키진 못했지요. 그리고 교단에는 라할의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그녀는 300년 전 그날 내려왔던 신탁을 이들에게 읊조렸다.
“빛의 선택을 받은 기사가 대륙을 어지럽히는 악을 몰아내고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리니, 그날 모든 민족이 그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레헤나의 목소리에는 교황의 위엄이 가득했다.
“그리고 보십시오. 아슬란 님은 빛의 증표를 받으신 분. 저분을 의심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라할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이 대륙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마땅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레헤나는 내게 정중히 청을 올렸다.
“아슬란 님. 부디 빛의 증표를 이들에게 보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난 그녀의 말에 따라 손을 펼쳤다.
그러자 성스러운 빛의 증표가 떠오르면서 전각 안을 밝혔다.
“오오-”
“저것이 바로 그 전설의······.”
이들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바로 이것이 빛의 증표가 가진 힘이었다.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 그리고 온 왕국의 대표가 되어 악마를 막아낸다는 명분.
빛의 증표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빛의 증표도, 라할의 예언도, 하늘의 뜻도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곧 빛의 증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무엇인가.”
난 저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스스로와 너희 왕국, 그리고 너희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다.”
“······?”
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만 왕국이 악마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존폐의 위기에 섰을 때,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다. 하지만 본좌는 단신의 몸으로 그들을 도와 악마 군단을 몰아냈다. 지금껏 악마들에게 고통받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갔다. 너희는 모두 외면했지만 말이다.”
“······.”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말로써 너희와는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난 힘을 써야 한다면 힘을 쓸 것이고, 누군가를 파괴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리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힘을 과시하는 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가 되기 위함이었다.”
“······.”
“하지만 너희가 원하는 것이 영웅이라면-”
나는 천천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너희의 영웅이 되어 주겠다.”
그것은 곧 포효 효과를 발휘하여 이들에게 퍼져나갔다.
“난 영웅이 아니다. 라할이 선택하였든 하지 않았든 내게는 상관없다. 또한 빛의 선택 역시 내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길을 자처하는 것은, 흩어져 있는 너희를 하나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대체 왜······.”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카르만이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서, 바라지도 않는 일이라면서,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왜냐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대륙을 구하기 위해서다.”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다.
“난 너희와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 너희와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너희는 감히 내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본좌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나아가는지, 영원히 이해하지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나는 이 게임에서 탈출하길 원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니 너희 자신을 위해, 너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내 뜻을 따라라. 그럼 어떤 악마의 공격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나 아슬란이 있는 한, 그 무엇도 너희를 파괴할 수 없을 테니. 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곳이든 내가 지켜주겠다.”
모든 왕국의 힘이 필요했다.
“······.”
다시 한번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줄곧 가만히 있던 만 왕국의 크라엘이 내게 물었다.
“선조들께서는 300년 전 테키나 족속을 몰아내고 봉인만 했을 뿐. 그들을 말살시키진 못했습니다. 그 당시 대륙 최강이자, 현재도 감히 그 힘을 견줄 수 없다는 라일라칸께서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당신은 해낼 수 있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허세가 정수리를 뚫고 치솟았다.
“그 시절에는 나 아슬란이 없었다.”
“······!”
“이것이 내 대답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름 아래 모여 싸울 것인지, 아니면 자멸할 것인지.”
그리고 전각 밖을 나서며 말했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 * *
“······.”
아슬란이 떠나간 자리는 마치 어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을 안겼다. 무엇 하나 결정된 것 없이 이렇게 나가 버린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여기서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비켜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따르지 않으면 자멸한다라. 그건 곧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겠다는 건가?”
“무슨 이리 극단적인······!”
그들은 아슬란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하는 것인지 갈팡질팡했다.
그때 크라엘이 말했다.
“아슬란 님의 말씀이 맞소.”
“······?”
“그대들이 모두 우리를 외면했을 때, 나는 보았소. 빛으로 강림하여 그 수많은 악마 군단을 단신으로 쓸어 버리는 아슬란 님의 위용을. 그건 결코 인간의 힘이 아니었소. 그것을 아득히 초월한 무언가였지. 직접 그 경이로운 힘을 목격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오.”
크라엘은 마치 그날의 일이 생생한 듯 눈을 반짝였다.
“우리 만 왕국은 아슬란 님을 전적으로 따를 것이오. 그분의 말씀대로, 우리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
이제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카르만이었다.
이들이 이토록 흔들리는 건 힘의 균형추가 되는 카르만이 있기 때문.
그는 말없이 아슬란이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명분이 되어 주겠다는 것인가, 아슬란?’
카르만은 오늘, 아슬란이라는 인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정복욕에 찌든 수많은 왕과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거늘.’
빛의 기사라는 명분으로 아슬란이 왕국들을 복종시키고 대륙을 정복해 그들을 통치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카르만은 보았다.
아슬란에게는 정녕 이 왕국들을 굴복시킬 생각이 없음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도통 그 속을 알 수가 없구나. 저 사내가 정녕 무엇을 바라보는지도.’
그 놀라운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은 대륙을 정복해 최강의 1인자가 되기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감히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신성하고 엄청난 ‘무언가’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카르만도 더는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빛의 증표에 어울리지 않는 사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어쩌면 빛의 증표는 그 어떠한 사심도 없이 정의롭게 그 힘을 쓸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