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0.01초 소드마스터 110화
[제왕의 군림보]
-30초 동안 반경 300m까지 제왕의 위엄을 퍼뜨립니다.
-위엄에 노출된 이들은 시전자에게 경외를 표하게 됩니다.
“······.”
제왕의 군림보.
이게 무슨 무협지 스킬도 아니고.
집무실을 나서면서 잠깐 써봤을 뿐인데, 하마터면 왕궁이 무너질 뻔했다.
내가 디딘 땅이 갈라지고, 주변인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거나 실신해 버리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만 했다.
‘이건 제왕이 아니라 그냥 파괴왕 아닌가?’
아무튼, 당분간 쓸 일이 없는 스킬인 것 같았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교단에 돌아가지 않고 어느새 왕실 회의 때 자리를 떡하니 잡아 놓고 있던 교황이었다.
“왕께서 빛의 증표를 받으셨으니, 이 사실을 대륙 전역에 알려 검의 원탁을 소집해야 합니다.”
검의 원탁.
그것은 평화와 화합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 대륙에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 대륙이 마냥 평화롭기만 했다면 검의 원탁이 소집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원래는 알렉산더가 빛의 증표를 받으면서 검의 원탁이 소집되어야 하는 게 맞는데.’
본래 스토리대로 흘러갔다면 알렉산더가 증표를 받으면서 검의 원탁이 소집되어야 한다. 거기서 알렉산더는 눈물겨운 연설로 각 왕국 간의 다툼을 멈추게 하고 하나로 연합하여 악마와 대적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빛의 증표를 받은 게 알렉산더가 아니라 나란 말이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구나.
검의 원탁 때 또 그 괴물들이랑 눈을 마주치고 있어야 하는데.
심지어 카르만이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의문이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이랑 카르만이 잠깐 대립하기도 했었지?’
카르만 데어 로크.
로크 가문이 무엇인가.
무려 대륙 최강자라 불리던 라일라칸의 가문이다.
기사의 가문이었던 그들은 새로운 왕국을 일으켜 지금의 칼라 왕국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라일라칸의 후손이라는 자존심이 무척 강하여, 빛의 증표를 받는 예언된 존재가 반드시 자신들의 가문에서 나올 거라 철썩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알렉산더가 빛의 증표를 받았을 때, 카르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원작에서는 어찌어찌 잘 해결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기선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잠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교황 레헤나가 말을 이었다.
“빛의 증표를 받은 예언된 존재가 나타났다는 건 무척 기쁜 일이나, 동시에 이 대륙이 큰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그날 ‘만’ 왕국에서 보았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악마 군단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악마가 대륙을 짓밟기 시작할 겁니다.”
교황의 말대로, 빛의 증표를 받았다는 건 본격적으로 악마들의 침공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솔직히 지금도 스토리가 급발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악마가 여기저기 나타나 날뛰는 것만으로도 스토리 진행이 너무나도 빠르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예언서에서는 빛의 증표를 받은 존재가 나타났을 때, 심연에서 잠들고 있던 악마들도 눈을 뜨게 될 거라 했습니다. 과거 우리 대륙을 멸망 직전까지 이끌었던 ‘바빌론’. 그들이 다시 부활하게 되는 겁니다.”
바빌론이란 이름에 회중이 웅성거렸다.
대악마 중에서도 급이 있다고 그랬던가.
그중 최고 등급을 따지자면 바로 바빌론 등급이다.
총 7명의 바빌론이 있고, 이들은 악마들의 왕이자 테키나 족속의 태초 근원이 되는 ‘레메게톤’의 수족이다.
300년 전 있었던 대전쟁에서 대륙 연합은 간신히 이들을 막아냈으나, 그 생명을 끊어내진 못했다.
그래서 예언서에 심연에서 잠들어 있는 바빌론들이 깨어나게 될 거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바빌론은 진짜 잡기 빡센데.’
대악마도 무척 잡기가 어렵지만, 바빌론은 그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왕국 간의 화합이 중요시되며, 만약 서로 화합하지 않고 개인 플레이를 하게 될 경우 절대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한다.
‘그렇다는 건 무조건 검의 원탁을 소집해야 한다는 거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검의 원탁을 소집해서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한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무사히 이 게임을 클리어하고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 * *
“빛의 증표를 받은 기사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교황의 이름으로 검의 원탁이 소집되었다.
이번 원탁 회의가 소집되는 이유는, 빛의 증표를 받은 기사를 중심으로 악마로부터 이 대륙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칼라 왕국의 신하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명백한 날조입니다!”
“우리 국왕께서 이곳에 계신데, 빛의 증표를 받은 존재라니요!”
“교황의 이름을 누군가가 사칭하고 있거나, 아니면 교황이 타락한 게 틀림없습니다!”
캬르만이야 말로 대륙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칼라 왕국의 신하들.
그건 카르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빛의 증표를 받았다는 것이 아슬란이란 것이냐?”
그러자 보고를 하던 기사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
아슬란.
그 이름이 또 들리는 것인가.
잊을만하면, 아니. 잊을 새도 없이 그 이름이 자꾸만 들리는구나.
그런데 빛의 증표를 받은 예언된 존재가 아슬란이었다니.
‘샤나 왕국에서도 기이한 힘을 보이긴 했었지.’
라할의 화신이 있다면 바로 아슬란 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그때 보았던 아슬란의 힘은 분명히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대륙을 구원할 예언된 존재가 아슬란, 너라는 것이냐?
‘그건 쉬이 인정할 수 없도다.’
대륙 최강자 라일라칸의 후손으로서, 최강 왕국인 칼라 왕국의 국왕으로서, 카르만은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마냥 이곳에 눌러앉아 떼를 쓰고 싶진 않았다.
“모두 채비를 하거라. 일라이 왕국으로 가겠다.”
“······예?”
“왕이시여. 정녕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가 정말로 빛의 증표를 받은 예언된 존재라면,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겠다.”
만약 빛의 증표를 받은 것이 거짓이거나, 혹은 자격 미달이라면-
‘무력으로라도 그것을 빼앗아 주겠다, 아슬란.’
카르만은 오랜만에 자신의 칼을 뽑을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 * *
“일라이 왕국에 이렇게나 많은 군대가 모이다니······.”
넬라 기사단장은 각 왕국에서 모여드는 병력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의 원탁 회의이긴 하나, 어떤 일이 발생하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 보호 차원에서 군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웅장한 군대의 숫자에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호레스는 느끼는 바가 달랐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조금은 불안한 감도 드는구려.”
“예? 어째서 말입니까?”
“검의 원탁은 이제까지 교단이 소집을 했지만, 그 중심이 되는 건 항상 카르만이었소. 그거야 칼라 왕국이 최강 왕국이며, 모두 카르만을 대륙 최강자로 인정했기 때문이지. 만약 대륙이 위기에 빠진다면 그가 나서서 해결해 줄 거라 믿고 있었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소이까?”
검의 원탁은 카르만 중심이었고, 그가 늘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검의 원탁은 다를 것이다.
아슬란이 무려 대륙을 구원할 빛의 증표를 받았으며, 이번 회의를 교황이 소집한 이유도 아슬란을 중심으로 왕국을 화합하기 위함이었다.
“카르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검의 원탁에도 많소. 우리 왕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겠지. 만일 두 세력이 여기서 반목을 한다면 어찌 되겠소?”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렇소. 이 아름다운 도시가 순식간에 불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
과연 그 말대로 벌써부터 충돌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흥. 아슬란이 빛의 증표를 받은 존재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 대륙을 구원하실 분은 우리 국왕밖에 없지.”
“맞아. 나는 다른 왕국 출신이지만, 카르만 님 말고는 다른 강자가 있을 리 없어.”
몇몇 기사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있던 알렉산더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무례더냐? 감히 우리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뭐, 우리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이건 명백한 사기극이다. 카르만 님 말고 대륙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슬란 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떠들기는. 너희가 그토록 우상시하는 카르만도 우리 아슬란 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해.”
“뭐야?!”
호레스의 말대로 검의 원탁을 위해 전각 입구에 모인 기사 중 아슬란을 지지하는 세력과 카르만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말다툼이 일어났다.
일개 기사들끼리의 말다툼이면 괜찮으련만, 단장급이나 되는 간부들까지 열을 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입구 쪽으로 향하는 길이 아수라장이 될 위기에 처했다.
“밑바닥에 있던 왕국이 운 좋게 올라온 주제에 감히 우리 칼라 왕국을 업신 여겨?!”
“언제적 칼라 왕국이란 말이냐. 우리 일라이 왕국이 대륙 최강이다!”
급기야 각자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점점 극으로 치달으려 할 때.
“모두 들으십시오!”
목청이 큰 기사 하나가 나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빛의 증표를 받은 예언된 존재이시자, 악마들의 악몽이며, 공포의 대상이고, 대륙의 유일한 영웅이시자 일라이 왕국의 영광스러운 국왕이신 아슬란 님이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구가 열리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위엄 넘치는 아슬란이 붉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들어왔다.
* * *
‘뭐야. 이놈들은 왜 만나자마자 싸우려고 들어?’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기사들이 서로 칼을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백병전을 펼칠 기세였다.
사실 여기로 들어오기 전부터 이들이 왜 싸우는지 오고 가는 언성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를 지지하는 왕국과 그렇지 않은 왕국끼리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놈은 싸움이 나기를 바라는 건가?’
나는 저 끄트머리에 있는 카르만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저놈이 말 한마디만 해줬어도 기사들이 이렇게 칼을 뽑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다는 건 은근 전투가 벌어지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빛의 증표를 나한테 빼앗겨서 뭐 삐졌다 이거냐?
생긴 거랑은 다르게 속이 아주 좁아요.
“대륙의 유일한 영웅?”
그때 어느 기사 하나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우리에게 유일한 영웅은 카르만 님뿐이시다!”
“옳소!!”
“카르만 님이야 말로 우리의 영웅이시다!”
이 광신도 같은 놈들이 칼을 높이 들며 카르만의 이름을 외쳐댔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날 주눅 들게 할 순 없었다.
왜냐하면-
“어리석구나.”
태산보다도 높은 내 허세가 끓어 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왜 이곳에 불렀는지 정녕 모르겠느냐?”
나는 한 발 가볍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쿵-!!
제왕의 군림보가 발동되면서 천지가 흔들렸다.
칼을 높이 들고 소리치고 있던 기사들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썩은 가지를 이곳에서 모두 정리하기 위함이다.”
나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뎠다.
“내가 걷는 한 걸음은 너희의 걸음과 다르다.”
쿵-!!
“내가 내뱉는 말 한마디도 그 무게부터가 다르지.”
쿵-!!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 양옆으로 사람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부할 수 없는 제왕의 위엄이 이들을 강제로 짓누르며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너희의 의견 따위에 관심이 있을 것 같은가?”
쿵-!!
그리고 마지막 발을 내디뎠을 땐.
“크헉!”
“크읍-!”
카르만을 제외한 모두가 내 앞에 쓰러져 무릎을 꿇었다.
불굴이라는 특성으로 간신히 그 힘에 버티고 있던 카르만 역시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니 선택해라.”
나는 당장이라도 눈이 뒤집혀 실신할 것만 같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화합의 이름으로 나를 따를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