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0.01초 소드마스터 90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저 밑에서 나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드래곤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갈 데까지 가는구나.’
이놈을 여기까지 끌어 들이는 게 아니었다.
이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몬스터가 바로 드래곤이지 않은가.
성격이 불같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족속이기에 조금만 수틀려도 브레스를 날려 파괴해버린다.
‘이제 찰나의 괴력도 다 써버렸는데.’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내고 반격까지 하느라 더 이상 내게 남아 있는 힘이 없었다.
방금 전 그 일격으로 드래곤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고작 그따위 힘으로 이 몸을 해하려 들다니.”
강렬한 허세에 취해 마음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뒤편에는 여전히 드래곤 브레스가 남긴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라 몸 전체가 익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대륙의 최강이라 불리는 미물이여.”
그럼에도 나는 꼿꼿한 자세로,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저 밑에 있는 드래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오늘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깨닫게 해주겠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머리끝까지 차오른 허세 역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타오르는 중이었다.
‘이제 난 뒤졌다.’
이런 언사를 듣고도 드래곤이 가만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안 움직이고 있는 거지?
다시 그 거대한 몸뚱이로 돌아가 발톱으로 나를 잘게 다져 버릴 줄 알았는데.
“······크윽.”
놈은 몸을 잘께 떨며 입술을 꾹 깨물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거 설마?’
내 허세가 먹히고 있다는 것인가?
이 드래곤한테도!?
그렇다면.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
“평생을 대륙 최강으로 살아왔던 네가 처음 마주하는 그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겠지.”
나는 허세에 장작을 넣어 더욱 허장성세를 부렸다.
이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카드이기 때문이다.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거, 겁을 먹어? 내가?”
“상대가 나 아슬란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이런 건방진! 감히 인간 따위가······!”
플레임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 섬뜩한 살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오히려 허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숭고하고 끝이 없는 인간의 힘을 말이다.”
“뭐야?”
“내 친히 네가 무시하는 그 인간의 힘을 이 자리에서 보여 줄 것인즉.”
나는 천천히 칼을 들어 그 끝을 놈에게 바로 세웠다.
“오너라.”
“······!”
저, 저질러 버렸다.
그것도 저 흉포한 드래곤을 상대로 말이다.
당장이라도 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으나-
“······.”
마치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놈은 끝끝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먹혔다.’
거기서 난 확신했다.
나의 허세가, 나의 도박이 제대로 먹혀들었음을.
그렇다면 이제 마무리를 할 차례였다.
착-!
나는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드래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돌아가라.”
딱 여기까지 했으면 좋았으려만.
온몸을 뜨겁게 만드는 허세가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겁먹은 짐승을 잡는 취미는 없다.”
“!?”
그것이 드래곤의 마지막 트리거를 건드린 것일까.
내 허세에 넘어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플레임은 모든 공기를 태워 버리는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네가 감히······. 감히 나를!”
이윽고 놈은 입을 벌려 붉은 브레스 모아 한번에 내게 쏘아 보냈다.
“죽어라!!”
콰아아아아-!!
나는 그저 브레스가 내게 치닫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겁한 새끼!’
천하의 드래곤이라는 놈이 자비롭게 보내 주려는 사람의 뒤통수를 노려!?
더 이상 내게는 저 브레스를 막을 만한 힘이······!
콰아아앙!!
브레스가 내 몸과 부딪히며 크게 폭발했다.
“대, 대기사단장님!!”
“아슬란님!!”
그 큰 폭발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뿌연 연기가 사방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근데 나 왜······.
‘멀쩡하지?’
나는 내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흩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엇이 나를 지켜 준 것인지 거기서 깨달았다.
‘신성한 보호가 아직 있었구나!’
즉사급 데미지를 하루에 한 번 막아 주는 신성한 보호.
그것이 드래곤의 브레스로부터 나를 지켜 준 것이었다.
이윽고 연기가 빠르게 걷히면서, 잠시 풀어졌던 허세가 다시 빠르게 차올랐다.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멍청이마냥 풀어져 있던 얼굴이 근엄하게 돌아왔고, 허리 또한 목각처럼 똑바로 세워졌다.
그리고 눈동자와 턱짓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레바노스와 드래곤 플레임의 모습이 보였다.
“흠집조차 내지 못하다니.”
레바노스는 넋이 나간 듯 보였고, 플레임은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널 죽일 수 있는 것이냐, 아슬란?”
그의 물음에,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허락한다면.”
이 오글거리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대답이 놈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플레임은 곧 허공에 두둥실 띄어 올랐다.
“크크. 재밌는 인간이로구나. 오늘 여기서 계속 싸웠다가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겠군.”
설마 이대로 가려는 건가?
그래. 얼른 가라.
“내 집무실을 저따위로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이냐?”
“흥. 네놈도 내 레어를 박살 내버렸으니, 피차일반 아닌가?”
그런 뒤 아이의 몸에서 다시 플레임은 본래의 웅장한 드래곤 모습으로 돌아와 날개를 넓게 펼쳤다.
“또 보도록 하지, 아슬란.”
전 다시 보기 싫은데요.
“레어를 복구할 때까지 종종 놀러 오겠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놓도록.”
그리고 플레임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크게 포효했다.
“크롸라라라라-!!”
그 어마어마한 울부짖음과 함께 놈은 본인의 땅으로 돌아갔다.
“······.”
드디어 갔나.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아직 이곳에 부하들이 있기에 함부로 그럴 수도 없었다.
“으어어-”
“으헉-”
오히려 나자빠지기 시작한 건 기사들이었다.
“가, 갔다.”
“드래곤. 저것이 드래곤인가?”
“저런 드래곤마저 쫓아내신 대기사단장님은 대체······!”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서히 가라앉고 있던 허세가 다시 들끓어 올랐다.
“한심하구나.”
나는 미간을 좁히며 기사들을 꾸짖었다.
“나의 기사라는 것들이 고작 저런 것에 겁을 먹고 쓰러진다는 것이냐?”
“······.”
“이는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일 터. 오늘부터 훈련 시간을 두 배로 늘리겠다.”
“헉!”
드래곤을 마주한 것보다 더 겁을 먹은 기사들을 놔두고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순간.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레드 드래곤 플레임으로부터 인정을 받으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이게 히든 퀘스트였다고?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총 56골드를 모으셨습니다. 이제 상점을 이용하실 수 있게 됩니다.]
드디어 인고의 시간이 끝나고, 상점이 열리게 되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가질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아까 분명 종종 놀라온다고 했었지?’
드래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 계속 찝찝하게 남았다.
‘에이, 설마.’
오늘 이런 일을 겪고 또 오려고 하겠어?
* * *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우적- 우적-
평화로운 오후.
아니. 분명 그리 되었어야 했다.
이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음. 역시 인간들이 만든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이 있단 말이지.”
이틀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둘이 피 터지게 싸우지 않았었냐.
그런데 무려 드래곤이라는 놈이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마치 친구집을 놀러오는 것마냥 할라즈 성에 찾아왔다.
종종 놀러 오겠다는 말이 진짜 성으로 찾아와 음식을 먹겠다는 말인지는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확 저 목을 쳐버리고 싶다만.’
나는 꾹 참았다.
상대는 드래곤이지 않은가.
심지어 저 어린 몸뚱이를 갈라 봤자,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영혼이 본체로 돌아가게 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왜 그렇게 보고 있지?”
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동자와 마주한 플레임은 작게 으르렁거렸다.
“넌 여기 처먹으러 왔느냐?”
“흥. 그래. 처먹으러 왔다. 불만이냐? 손님을 이렇게 박대하고 눈치까지 주다니. 여기 인심은 참 볼 만하구나.”
“역시 드래곤답게 이기적이군.”
마지막 그릇까지 깨끗하게 비운 드래곤은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뒤에는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며 살기 어린 눈동자로 플레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 기사들한테 살기 좀 거두라고 해라. 어차피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놈들이 괜히 불편하게 말이야.”
“네가 저번에 그리 난리를 치고 갔으니, 당연히 저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전취식이나 하는 놈이 말이 많군.”
“무, 무전취식이라니! 나도 정당하게 값을 지불할 줄 안다.”
탕-!
플레임은 상을 내려치면서 뭔가를 올려 두었다.
깜짝 놀랐네.
“아주 귀한 보석이다. 영광인 줄 알아라.”
나는 드래곤이 올려 둔 보석을 가만히 살펴보다 그것을 염력으로 끌어당겨 내 손으로 붙잡았다.
플레임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호오- 그런 것도 쓸 줄 아느냐? 신기하군. 오러와 마력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놈이 어떻게 저런 걸 잘도 쓰는지.”
하지만 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응축된 빛의 보석]
-무기에 장착 시 모든 스킬의 사거리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
내 눈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이 보석은 아이템에 장착하여 쓰는 것으로, 보는 거와 같이 스킬 능력을 강화시켜 주고 있었다.
‘사거리 두 배라는 건······.’
찰나의 괴력으로 날리는 검강부터 시작해 피어와, 그 외 스킬들 모두 사거리가 두 배로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다들 사거리가 애매했는데, 내게 딱 필요한 능력이었다.
“후후. 이 정도면 값을 충분히 치렀겠지?”
아이고.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드래곤님.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겠다. 또 오지.”
“그만 와도 된다.”
아니. 자주 와주세요.
아이템만 들고 오신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흐흐. 너처럼 대단한 인간이 과연 언제 쓰러지는지 내가 꼭 옆에서 지켜볼 거다. 그리고 이 할라즈는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잠깐. 그 말은 설마 이 할라즈를 지켜주겠다는 건가?
그것도 무려 드래곤이?
“네놈이 있는 이상, 여기가 다른 놈한테 무너질 리는 없겠다만. 혹시 모르니 이 몸이 지켜주도록 하지. 무한한 영광으로 삼거라. 인간.”
크하하하! 웃으며 드래곤은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보면 볼수록 조금 머리가 안 좋은 놈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는 건,
‘음식만 잘 먹인다면 호구로 쓸 수 있겠구나.’
내 평생 드래곤의 등을 처먹는 날이 오다니.
살다 보니 별꼴이다.
“언제까지 다들 그렇게 서 있을 것이더냐? 모두 나가라.”
“아, 예. 대기사단장님.”
나는 아론과 기사들을 밖으로 보내 놓고 플레임에게 받은 보석을 칼에 이식시켜 보았다.
그러자 찬란한 빛과 함께 보석의 힘이 깔끔하게 스며들었다.
“룰루~”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상황.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후. 근데 상점은 어떻게 하지?”
내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점.
이틀 전, 히든 퀘스트를 깨면서 얻은 골드로 나는 상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곳에서 파는 물품들이 문제였다.
[라고스의 심장]
[지그렉타의 창]
[라비로르의 갑옷]
여기까지는 아주 괜찮았다.
옵션들도 뛰어났고, 당장이라도 전부 구매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물품들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물품이 문제였다.
[엘라의 팬던트]
-악의 힘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고대의 유물.
-여섯 개로 나뉜 팬던트들을 하나로 모으면 전설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혜의 신, 엘라의 가호가 함께 하는 팬던트입니다.
-구매시 랜덤으로 옵션이 부여됩니다.
테키나 족속을 완전히 끝장내고 그들이 대륙을 집어 삼키고자 하는 야망을 막아낼 수 있는 6개의 팬던트 중 무려 3번째 팬던트였다.
“젠장. 이렇게 되면 사실상 사야 될 건 이거밖에 없잖아?”
다음에 살 수 있으면 그리하겠지만, 이 악랄한 상점에게는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주의사항]
-상점 물품은 오픈 때마다 랜덤으로 바뀝니다.
-한번 상점에 판매 목록으로 올라왔던 것은 두 번 다시 올라오지 않습니다.
-가격은 모두 동일하게 50골드입니다.
“쓰읍- 팬던트가 여기서 또 뜰 줄은 몰랐는데.”
팬던트는 굉장히 구하기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에 차라리 상점에서 나온 것이 행운일지도 모른다.
아쉬운 건 다른 아이템들을 사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못 산다는 것 정도?
“좋은 옵션이 뜨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팬던트를 한번 갖게 되면 그 안에 부여되는 옵션이 매우 좋기 때문에 이건 기대해볼 만했다.
[엘라의 팬던트를 구매하시겠습니까? 구매 철회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 당장 내놔.
[상점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안내 메시지와 함께 엘라의 팬던트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엘라의 팬던트에 새로운 옵션을 부여합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무슨 옵션이 부여될지 기다렸다.
이윽고,
[천상의 눈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