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0.01초 소드마스터 84화
“할라즈 왕국이 승리를 했다?”
“예! 할라즈 왕국의 군대가 성을 지켜냈습니다!”
가자르 왕국의 왕, 가이슈르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저 왼편에 앉아 있는 르데만에게 말했다.
“들었는가, 르데만? 악마에게 짓밟힌 줄로만 알았던 당신의 왕국이 승리를 했다는군.”
“그, 그럴 리가.”
르데만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 정도 숫자는 제아무리 대마법사 켈린이 있는 할라즈 군대라고해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할라즈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거지?”
보고를 하던 병사는 르데만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왕을 바라보았다.
가이슈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 대답했다.
“일라이 왕국에서 대기사단장 아슬란을 보내 할라즈 왕국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활약으로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호오. 일라이 왕국? 거기다 아슬란이? 하하하! 역시, 빛의 기사라는 위명이 거짓은 아니었던가? 할라즈 왕국과 일라이 왕국은 무척 껄끄러운 사이로 알고 있는데, 그걸 도와주다니.”
가이슈르는 힐끗 웃으며 르데만에게 말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지? 애써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나한테 달려와 항복을 했는데, 할라즈 왕국이 다른 놈 손에 들어가게 생겼군.”
“······아직 끝이 아닙니다.”
“끝이 아니다?”
“할라즈 왕국이 일라이 왕국 손에 넘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볼 겁니까?”
그 말에 가이슈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놔두지 않으면? 지금 나더러 일라이 왕국과 전쟁이라도 하라는 건가? 상대는 그 카르만과 필적한다는 아슬란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놈들도 분명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그 많은 악마 군단을 상대하였으니, 당연히 큰 출혈이 있었겠지요. 더군다나 할라즈 왕국이 아직 멀쩡하다면 나는 여전히 그곳의 왕입니다.”
르데만의 말을 가이슈르는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일라이 왕국이 이렇게 할라즈 왕국을 흡수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은 힘을 모으느라 잠잠하겠지만, 힘을 다 모으고 나면 그다음 칼날은 바로 이곳, 가자르 왕국이 될 겁니다.”
그 말에 기사들과 신하들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우릴 협박하는 건가?!”
“자기 왕국을 버리고 온 비겁한 왕 주제에!”
가이슈르는 손을 들어 부하들의 아우성을 진정시켰다.
“일 리가······. 아예 없는 말은 아니군.”
“왕이시여!”
“저자의 말을 들으시는 겁니까?”
“자네들이 생각해도 그렇지 않나? 아슬란을 이대로 놔두게 되면 할라즈 왕국은 일라이 왕국에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군대를 이끌고 르데만을 그곳으로 데려간다면?”
비록 왕국을 버린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 적통성은 무시하지 못한다.
여전히 그 안에서는 저 멍청한 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할라즈 왕국 백성들은 일라이 왕국에 흡수되어 자신의 나라를 잃느니, 차라리 못 미덥더라도 저 왕을 받아들이려 할 터.
“르데만. 너의 뜻대로 해주지.”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기억하거라. 할라즈 왕국을 되찾게 되면 너희는 평생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 조건으로 널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결정을 내린 가이슈르가 대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군사를 준비해라. 되도록 빨리 할라즈 왕국을 향해 진군하겠다.”
* * *
격렬했던 악마와의 전투가 끝난 지도 이제 3일이 흘렀다.
할라즈 왕국은 현재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다.
사실 할라즈 왕국의 왕궁 쪽은 딱히 복구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악마들이 성벽을 넘기 전, 내가 놈들을 전부 쓸어버렸으니 말이다.
문제는 할라즈 왕국에 포함되어 있는 마을들과 성들이었다.
“마을 다섯 곳은 회생 불가능이며, 두 개의 성 역시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켈린 이놈은 내게 다 무너져 가고 있는 왕국을 통째로 넘겨 버렸다.
심지어 왕궁 안에도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왕궁 안에 있는 재산이란 재산은 전부 다 긁어 가져갔네.’
가자르 왕국에 투항하기 위해 할라즈 왕국의 왕이었던 르데만은 재산을 전부 가지고 튀었다.
즉, 할라즈 왕국을 일라이 왕국 영토에 온전히 편입시키려면 복구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을 내가 다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금이라도 좀 남겨 두고 가지······.’
이 옹졸한 놈 같으니라고.
거기서 좀만 남겨 두고 갔어도 이 정도로 배가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엄한 내 돈만 나가는 거 아니야?’
나는 잠시 할라즈 왕국 재건에 필요한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빠르게 계산부터 들어가 보았다.
성벽을 아예 새로 쌓아야 하고, 마을 재건에, 경계 강화까지 한다면······.
얼추 가격이 나왔을 땐,
“······.”
할 말을 잃었다.
‘비상금까지 싹싹 긁어야 재건이 가능하겠네.’
그냥 재건이고 뭐고 이대로 놔둘까.
여기 있는 노동력만 가져다 쓰는 것이다.
‘그럼 분명 반란이 일어나겠지?’
반란의 불씨가 우리 왕국까지 닿으면 무척 곤란해진다.
나는 잠시 옆에 있던 켈린을 노려보았다.
왜 이 자식은 이딴 쓰레기 왕국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선언해서는······!
“왜 그러시는지.”
“다들 나가 있어라. 잠시 생각을 좀 해야겠다.”
“아, 예.”
나는 할라즈를 비롯해 부하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곳은 왕과 기사들, 그리고 신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전각이다.
저 맨 끝에는 오직 이 나라의 왕만이 앉을 수 있는 왕좌가 있었다.
난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뭐 같은 왕국을 어떻게 운영한다?”
아주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꼿꼿하게 세우느라 통증이 아려오는 허리를 나름의 방법으로 치유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포효]
-15초간 포효 능력을 얻게 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15초)
-시전자의 포효를 듣게 된 아군은 사기가 올라갑니다. 적군은 사기가 저하됩니다.
-포효의 강도에 따라 적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게 됩니다.
-포효의 강도는 시전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이번 마기 포식으로 새로 얻게 된 능력, 포효.
다른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찰나의 괴력과 함께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흠.”
나는 한번 시범 삼아 포효를 써봤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자 그것이 조금 크게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에 비례한다고 했으니, 딱 이 정도인가.”
그냥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금 커진 느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포효와 찰나의 괴력을 섞어 목소리를 내보려고 했다.
“잠깐. 너무 크게는 말고. 정말 작게만 해보자.”
괜히 또 일이 시끄러워질 수도 있으니까.
나는 최대한 작게, 바로 옆에서 들어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정말 입만 벙긋하듯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아아-”
그러자 새로운 스킬 설명창이 나타났다.
[전장의 포효]
-15초간 전장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보다 너무 짧은데.
“······된 건가?”
바로 그 순간.
콰직-!! 콰콰콰콱-!!
내 의도와는 다르게 갑자기 어마어마한 음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전각의 기둥을 갈라지게 만들고 유리창을 깨뜨렸으며, 저 입구를 부숴 버렸다. 마치 이 안에서 크게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미친.’
나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그대로 닫아 버렸다.
15초간 이어지는 포효 능력이 전각 전체를 무너뜨려 함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기사단장님!!”
“아슬란 님!”
소란을 듣고 기사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대기사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아슬란 님!”
기사들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재촉 좀 그만해.
아직 15초 안 끝났단 말이야.
나는 간신히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아. 괘, 괜찮으십니까? 방금 건 대체······.”
“별일 아니다.”
“그, 그렇군요. 전각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지만······ 아무튼,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마침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르데만이 가자르 왕국의 군대와 함께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방금 들어왔었습니다.”
뭬야?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부하들이 들어오면서 가득 차오른 허세가 아니었다면 벌떡 일어나 화를 냈을 것이다.
‘르데만. 이 양아치 같은 놈.’
할라즈 왕국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가자르 왕국의 힘을 빌려 다시 왕 자리를 되찾으러 오는 거구나.
내가 3일 동안 여길 뼈 빠지게 복구하고 있었더니, 이제와서 숟가락을 올리려 들어?
“놈들을 마중 나가야겠군.”
“바로 군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 나도 바로 나가겠다.”
“예!”
이대로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나는 곧바로 왕궁 밖을 나가 모든 복구 작업을 멈추게 한 뒤, 기사단을 이끌고 놈들이 오고 있다는 곳을 향해 나아가 보았다.
‘생각보다 더럽게 많이 모였네.’
카르만의 칼라 왕국이 대륙 최강이라면, 가자르 왕국은 에인소프 왕국과 2위 자리를 다투는 강대국이라 할 수 있다.
놈들이 가진 기사단의 숫자는 일라이 왕국보다 많았으며, 마법 병단 역시 그 차이가 압도적이다.
과연 그 명성대로 가자르 왕국의 군대는 평야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아 보였다.
‘괜히 나왔나.’
처음에는 레바노스가 있으니, 어떻게든 싸우면 상대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저들의 숫자를 보니, 그 군세가 참 대단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군을 돌려?’
이대로 정면충돌을 한다면 과연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아니. 둘 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전투가 끝날 것은 자명한 일.
그럼 이이제이로 이득을 보는 건 바로 저 르데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대로 르데만에게 다시 왕국을 넘기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닐지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할라즈 왕국의 왕, 르데만이다!”
갑자기 르데만이 무슨 자신감인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우리 왕국을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도움을 준 일라이 왕국의 공은 내 절대 잊지 않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가라. 할라즈 왕국을 재건하는 건 내가 맡을 테니!”
한 마디로 니네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그만 꺼지라는 소리였다.
“만일 이대로 떠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기회 삼아 우리 할라즈 왕국을 유린하겠다는 뜻으로 알고 가자르 왕국의 군대가 너희를 벌할 것이다!”
그래. 어차피 여기를 맡아봤자 돈만 오지게 들지. 나한테 필요가 있겠냐.
하지만-
‘듣다 보니 빡치네.’
내 기사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악마를 몰아내 줬더니, 도망친 왕 주제에 이제와서 주인 노릇을 해?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분노가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와 동시에 허세가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
머리끝까지 허세가 차오르자, 분노로만 가득했던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았고, 뜨거웠던 심장은 다시 차갑게 변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들어라.”
그런 뒤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망국의 왕이여.”
* * *
가자르 왕국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대기사단장, 레키엘.
그리고 그의 곁에는 두 명의 대마법사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총력전.
제 왕국을 버리고 도망쳤던 왕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나온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들은 왕의 판단을 믿었다.
할라즈 왕국이 이대로 아슬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그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에는 이 세 명도 동의하기에 군말 없이 여기까지 나온 것이다.
“레키엘. 네가 아슬란과 일대일로 붙는다면 잡을 수 있겠나?”
“너희 둘이 힘을 빌려준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음.”
레키엘 혼자서는 무리일 수도 있어도 대마법사 둘이 마법의 힘을 빌려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거기다 가자르 왕국의 군대 숫자가 일라이 왕국보다 훨씬 많다.
물량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가자르 왕국이 한 수 위였다.
그렇기에 저 멍청한 르데만의 도발에 아슬란이 넘어가기만 한다면······.
[들어라.]
바로 그때였다.
[망국의 왕이여. 그리고 그의 개 노릇을 하는 가자르 왕국이여.]
“!?”
[어리석구나.]
갑자기 천지가 요동치고, 두 개 골을 흔드는 음성에 기사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으, 으아아악!”
푸히히힝-!!
기사들은 귀를 막아봤지만, 광활하게 울려 퍼지는 저 음성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말들 역시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레키엘과 두 대마법사 역시 고막을 파고들다 못해 찢어 버리는 저 거대한 음성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른 보, 보호막을······.”
마법사답게 보호막을 펼쳤지만,
[감히 한 초의 상대도 되지 않는 것들이 누구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더냐?]
콰직-!!
보호막조차 소용이 없었다.
저 음성에 보호막이 산산조각이나 무용지물이었다.
“크으윽!”
“으으으.”
고막이 터져 두 귀에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거늘.
[원한다면 오너라.]
저 무시무시한 음성은 여전히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나 아슬란이 오늘 너희의 피로 이 평야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