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 폴란드 위즈소카 수용소 (5)
승합차에 남아 있던 혜련, 랩터의 코디네이터와 매니저는 자신들이 겪었던 무시무시한 경험에 대해 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시 베이스캠프에 모인 현수 일행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재 상황에 대해 파악해 보았다.
세정 역시 인터뷰를 하는 듯한 구도로 그들을 촬영하였다.
“그, 그, 그러니까 차 안에 남아 있었는데요.”
그들은 서로를 보고 운을 뗐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차량 주변.
차창 밖을 보던 매니저와 코디들은 음산한 분위기에 음악을 틀어놓고 사담을 나눴다.
그때 차량용 라디오에서 이상한 노이즈가 잡히기 시작했다.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리에 그들은 부랴부랴 라디오를 껐다.
식은땀이 등줄기로 흘러내릴 무렵.
차창 밖으로 무언가 보였다.
허리가 뒤로 꺾인 채 네 발로 기어 오는 사람의 형체.
처음에는 산짐승인 줄 알았으나 3m 앞까지 오고 나서야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이려 했지만 길이 끊겨 있는 곳을 승합차가 달릴 순 없었고 결국 나무에 부딪쳐 차가 퍼져 버린 것이었다.
*
“그래서 거기부터 여기까지 미친 듯이 달려왔죠.”
매니저와 코디들의 이야기에 TTP 스태프들은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 차가 완전히 퍼졌다는 거예요?”
“네. 저희가 차 수리를 못해서 그렇게 판단한 걸 수도 있고요.”
“빌어먹을. 휴!”
스태프들은 화가 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구조대는 언제 오나요?”
방고리가 가이드를 보며 물었다.
“전화해서 신고할 때마다 접수 됐으니 곧 도착할 거라고 해요.”
가이드는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지난 상태였다.
“만약 여기 위치를 못 찾는다고 하면-”
“-그럴 리는 없어요. 첩첩산중이라도 지금 생방송까지 송출할 정도로 전파가 잡히는데 위치 추적이 안 될 리도 없고.”
TTP 스태프가 세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뭐 긴급구조대가 뭐 이래? 참나.”
방고리도 볼멘소리를 했다.
그때 수정이 현수 옆에서 속삭였다.
“신고가 제대로 안 들어갔을 것 같은데.”
“네?”
“너. 아직도 모르겠어?”
“뭘요?”
“너희 승합차에서 내릴 때부터 다 악귀에 홀려 있는 거.”
수정의 말에 현수는 눈을 크게 뜨고 일행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특별하게 공격적이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2층 난간에서 투신한 랩터를 제외하고는.
* * *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TTP 카메라 스태프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러니까 현수 씨 말은, 우리가 승합차에 내릴 때부터 악귀에 홀려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악귀들이 우리를 여기 베이스캠프에 다 모여 있게 만들어놓고 있는 거고? 구조대한테 연락도 안 닿고?”
“네. 지금으로썬 그거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방송은? 방송도 가짜인가?”
그가 세정을 보며 물었다.
“송출은 정상적으로 되고 있어요. 채팅도 계속 올라오고. 시청자 수는 지금 48109명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하날하날과 방고리가 눈을 크게 떴다.
“와. 5만 명이네.”
소위 말해 새벽 방송임에도 초대박이 난 셈이었다.
“지금 5만 명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말 우리 모두 악귀에게 홀려 있는 거라면 여기서 무사히 나가는 거 자체가 숙제일 수 있어요.”
너도캠핑은 꽤 이성적인 말을 던졌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신고를 했는데 오지 않는 건 이쪽 응급체계 문제지 우리가 귀신에 홀린 문제라는 게- 허 참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카메라 스태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랩터님이 왜 갑자기 투신을 했는지 깨어나야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현수가 랩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어떡하죠? 여기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하나요?”
혜련이 물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현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어쩌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구조대가 안 올 수도 있어요.”
“그럼 산길을 뚫고 탈출?”
“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해둔 곳에서도 악귀가 나타났어요. 귀신을 못 보는 평범한 분들에게도 보일 정도로 강력한 악귀가요. 산길을 헤맸다가는 다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뭐 어쩌자는 겁니까?”
이야기를 계속 듣던 TTP 음향 스태프가 따지듯 끼어들어 물었다.
현수는 숨을 크게 들이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면돌파입니다. 여기서 버티거나 도망치려 해봤자 더 위험해요.”
“정면돌파요?”
“악귀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면 굳이 베이스캠프에 모이게 유도하지 않았을 거예요. 따로따로 죽여도 충분한데 이런 수고를 할 이유가 없죠.”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이 자들이 이러는 겁니까.”
음향 스태프가 화가 난 얼굴로 물었다.
그 분노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현수는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있는 귀신들.
입구에서부터 보였던 악귀들.
수십 명인지, 수백 명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많은 수의 악귀들이 가만히 서서 현수 일행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그들의 기운이 느껴졌고, 어디를 보든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일행들의 동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현수 일행이 어딘가를 발견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 수 있었다.
어쩌면 무언가를 명명백백하게 찾아내 밝혀주기를 바라는 것일 수 있었다.
불현듯 진솔의원에서 죽은 귀신들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억울하게 매장 당한 곳 위에 올라선 건물 때문에 원한을 갖게 된 귀신들.
현수의 시선은 지하실 입구로 향했다.
[연구실]
지하실에는 설비실과 연구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왜요?”
세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하실에 가볼 겁니다.”
현수가 바로 지하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리 모두 악귀에 홀렸다면서 지하실에 간다고요?”
“지금 생방송 때문에 호기 부리는 거죠? 미친 건데!”
뒤에서 TTP 스태프들이 외쳤다.
“여기 있는 악귀들이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면 그걸 찾아줘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게 분명 능사는 아니에요!”
현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며 받아쳤다.
“이야. 멋있다, 박현수.”
수정이 현수의 뒤를 졸졸 쫓아오며 말했다.
세정은 당연히 현수를 따라갔고, 고스트 크루 멤버들 역시 주저없이 쫓아갔다.
혜련은 당황한 듯 TTP 스태프와 현수를 번갈아 보다 PD에게 다가갔다.
“우리도 가죠.”
혜련의 말에 PD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촬영 중단하고 철수해야 할 것 같은데.”
“현수 씨 말이 맞다면 여기서 시간 죽이고 있는 것보다 쫓아다니면서 뭐라도 더 찍는 게 나을 거예요. 지금 현수 씨 생방 시청자 5만 명 넘었다며요. 우리가 촬영만 잘 하고 편집해서 내보내면 대박날 수 있어요. 고정 프로 되자고요.”
혜련이 말했다.
PD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럿 프로그램이 고정 프로그램이 된다는 건 이들에게 있어 밥그릇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었다.
여기서 마냥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현수의 말이 진실이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알았습니다.”
PD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 스태프와 음향 스태프에게 움직이라는 손짓을 했다.
“아까 소장실 갔던 둘은 혜련 씨랑 같이 움직이고 나머지는 여기 베이스캠프에 있어. 가이드 분께서는 구조대가 올지 모르니 여기 대기해 주시고.”
그의 말에 가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다 악귀에 홀린 상황이라고????
- 우리 다 미친 사람 보고 있는 거임???ㅋㅋㅋㅋㅋㅋ
- 진짜 이건 영화로 만들어도 될 듯
- 어케 영화 얘기는 만날 한 번씩 나오냨ㅋㅋㅋ
- 이건 진짜롴ㅋㅋㅋㅋ
- 할리우드 가즈앜ㅋㅋㅋㅋ
한국어 채팅 뿐 아니라 폴란드어와 일본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채팅도 물밀 듯 밀려 올라왔다.
- To niesamowite, że tu pojechałeś.
- Nie boisz się?
- Гитлер тоже плохой парень.
- 日本に来る予定はありませんか?
외국인들의 비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심지어 외국인들의 파워챗도 터지기 시작하면서 외화도 잡혔다.
동시에 현수의 구독자도 50만 명을 돌파해 51만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세정은 이 스코어를 확인한 후 현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현수는 이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지하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수의 악귀들이 마네킹처럼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들은 미로처럼 펼쳐진 복도 곳곳에 가만히 서서 앞만 보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은 현수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수는 로비로 올라가는 계단 한 쪽에 고스트돌을 올려놓고 천천히 이동했다.
계단 바로 왼편으로 보일러실과 설비실이 보였다.
끼이이익-
문을 열자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철제 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1940년대 당시 사용하던 보일러와 전기 콘솔 따위였다.
녹이 슬어 형체를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언뜻 보이는 단어들로 용도를 유추할 수 있었다.
번역은 당연히 수정이 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현수가 외국어를 가리킬 때마다 귀에 대고 뜻을 속삭여 주었다.
“이곳에서 이 건물의 난방을 관리한 것 같습니다. 정수시설도 있는 것 같고요.”
현수가 카메라를 보며 한 마디 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TTP의 카메라도 현수를 촬영하고 있었다.
TTP 방송국의 카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혜련이 아니라 현수를 집중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점 혜련의 멘트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있다가 한 번씩 현수와 대화를 나누며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공유 받았지만 평소 그녀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주었던 텐션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보일러실과 설비실에서 나와 다시 미로 같은 복도로 들어섰다.
이곳은 일반적인 곳과는 구조 자체가 달랐다.
수십 개의 연구실들이 복도 양쪽에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나마도 일자형 복도가 아닌 모퉁이를 돌고 돌아 펼쳐져 있는 독특한 형태의 복도였다.
철로 된 문 앞에는 페인트로 투박하게 숫자가 적혀 있었다.
“출입문이 마치 감옥 같아요.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현수는 2가 쓰여 있는 연구실 앞에서 잠금장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감옥에서나 쓰일 법한 쇠막대기가 문틀에 걸려 잠겨 있었지만 자물쇠가 걸려 있지는 않았다.
철컹- 꾸우우웅-
현수가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열어 보았다.
그러자 각종 실험도구가 담긴 카트와 불편해 보이는 철제 의자.
그리고 이상한 서류가 잔뜩 놓인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한 평 남짓 될까 하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후.”
현수는 철제 의자 앞에 나체 상태로 서있는 소년 귀신을 보았다.
소년은 악귀처럼 회색 연기를 피어내고 있었다.
휘이이잉-
덜컹-
복도 밖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 모두 출입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연구실 안을 보았다.
그러자 현수는 소년 귀신이 철제 의자에 묶인 채 눕혀져 있고, 수술복을 입은 사람들이 주변에 서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은 심령카메라에도 회색빛 덩어리로 포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