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2화 침공 (1)
에센시아 제국 북쪽 경계는 가장 험준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공정은 그 위를 넘어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높은 지형을 자랑하기도 했고.
거의 그 높이가 하늘까지 닿는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게.
시스템으로 아예 넘어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애초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지나갈 수가 없다는 거지.
그도 그럴 것이 이 베링턴 산맥은 마왕군의 진영과 그 경계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산맥이라.
만약 그런 시스템적 설계가 없었다면.
지금쯤 마왕군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에센시아 제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성마대전이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개판이 아니라는 건데.
그것도 딱 오늘까지였다.
현재 주변 왕국에서 시작해 에센시아 제국까지 진출한 유저들이 다수 생겨난 가운데.
이들의 입을 통해 곧 서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소식으로.
- 에센시아 제국 지금 비상 걸림.
- ㅇㅇ. 여기 방어전 퀘스트 뜨고 난리도 아님.
- 와씨. 갑자기 마왕군이 뜨냐.
- 에센시아 제국은 마왕군한테 안전한 것 아니었나?
- 노노. 현재 베링턴 산맥 너머로 개떼처럼 밀려오는 중. 근처서 사냥하던 놈들 다 쓸려나가서 죽음.
- 크큭. 그건 꼬시다. 걔들 고렙 사냥터라고 그쪽 사냥터 독점하겠다고 통제하던 것들이잖아.
- 근데 거긴 에센시아 제국군 없음?
- 베링턴 산맥? 여기 마왕군 나올 일도 없는데 뭐하러 제국군을 두겠노. 기껏해야 산맥 입구 부근에 방어군 좀 있었는데. 이미 다 털렸음.
- 하. 거기까지 뚫리면 그냥 에센시아 제국 땅이잖아.
- 맞음. 그래서 지금 방어전 퀘스트 계속 뜸.
- 와. 이거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ㅋㅋㅋㅋ. 님. 미친 거 아님? 방어전 퀘스트 수락하는 순간 나락임. 모르겠으면 가서 한 번 봐봐라. 베링턴 산맥 근처 가면 마왕군이 진짜 시야 끝까지 뻗어 있다.
- 어우씨. 그럼 대체 에센시아 협곡으로 얼마나 넘어온 거야?
- 모름. 그래도 일단 마왕으로 보이는 이상 개체도 발견된 거 보면…… 아마도 군단 단위로 넘어온 것 같은데?
- 당연히 군단 하나가 아니려나?
- ㅇㅇ. 깃발이 다 다르더라. 군단 몇 개는 가볍게 넘을 듯.
- 그럼 작정하고 넘어왔다는 거잖아.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 협곡 뚫는 건 어떻게 알았지?
- 그거 유저가 아니면 절대 모를 텐데…….
- 누가 알려준 거 아님?
- 미침? 마왕한테? 유저가? 보자마자 안 죽이면 다행이지.
- 그냥 유저들이 왕국들 너무 먹어치워서 역사 바뀐 거 아님? 안 그래도 베르마 제국 국경에서 마왕군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던데.
- 하. 그것도 말 되네. 밸런스 맞추려면.
- 어쨌든 이제 에센시아 제국은 엿 됨. 괜히 껴들었다가 죽지 마라. 목숨 하나뿐이다.
- 맞음. 얼마 전에 타란 제국 내전에 끼어들었다가 다 죽어 나갔잖아. 괜히 꼽사리 낀다고 설치면 다 죽는 겨.
마왕군의 이번 침공은 서버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관심을 가져왔다.
애초에 지금 시점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뭔가 정해져 있던 거대한 틀이 깨졌다는 뜻이기도 했고.
당장 유저들은 그것을 피부로 체감하는 중이었다.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을 침공함으로써.
원래 정해져 있던 성마대전의 역사는.
이제부턴 없다.
당연히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에센시아 제국에 서서 싸우는 것조차.
앞일을 전혀 알 수 없기에.
망설임이 생긴다?
그럼 당연히 다음 행동을 주저하게 된다.
만약 원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었고.
그때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주저 없이 에센시아 제국에 서서 싸웠겠지만.
유저들은 이 침공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결과를 낼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목숨은 하나뿐.
거기다 타란 제국 내전으로 인해 유저들은 더욱 움츠려 있을 것이다.
괜히 결과를 예측해서 덤볐다가 그 결과는 떼죽음이었으니.
이번 마왕군 침공은 그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지금 에센시아 제국을 선택하면.
끝없이 밀려 들어오는 마왕군을 상대로 바로 총알받이 확정이니까.
그나마 유저들이 믿을 구석이라고는.
에센시아 제국이 몰래 타란 제국을 치려고 베르마 제국에 파견 나가 있던 영웅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였다는 정도이려나…….
당연히 유저들은 이런 사실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야 타란 제국을 에센시아 제국이 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정보를 모았으니 잘 알지만.
유저들 시점에서는.
지금 에센시아 제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베링턴 산맥 쪽 방어진이 뻥 뚫린 상태.
당연히 이러면 유저들은 에센시아 제국의 방어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뭐 일부 유저들은 공을 세워보겠다고 나설 수도 있겠지만.
우리 팀을 모두 회의실에 모아놓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전사 형이 먼저 상황을 알려주었다.
“현재 베링턴 산맥을 끼고 있던 후작령은 완전히 마왕군에게 넘어갔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네요.”
내 말에 전사 형이 웃으면서 답했다.
“베링턴 산맥에 경비병을 최소로 배치한 후작 잘못이지.”
사실 상식적으로 한 행동은 맞다.
마왕군이 정해진 루트가 아닌 전혀 다른 통로로 침공해올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우리가 알려주긴 했지만 사실 이 비밀 통로는 굉장히 좁아. 고작해야 몇 개 파티 단위밖에 못 지나오거든.”
전사 형 말대로 괜히 비밀 통로가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알만큼 크게 뚫려 있다면 이미 비밀 통로라고 할 수 없다.
당연히 마왕군에서도 적은 인원을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을 테고.
잠시 뜸을 들이던 전사 형이 다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마왕군 애들도 이번에 작정한 모양이더라고. 시작부터 마왕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
마왕이라는 말에 다들 놀란 눈치를 보였다.
이쁜소녀가 손을 들어서 전사 형에게 물었다.
“보통은 쫄따구 먼저 나오는 것 아니에요?”
보통은 다 이쁜소녀처럼 생각한다.
밑에 쫄병부터 차근차근 나와서 점점 강한 상대가 나오는 게 이 바닥의 룰이자 정석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달랐다.
쫄따구고 중간 간부고 다 제끼고.
마왕부터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닭을 잡으려고 소 잡는 칼을 꺼낸 격이라고 해야 하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난 거다.
나르샤 누나도 놀랍다는 듯 감탄했다.
“마왕이 직접 나섰다는 건. 무조건 이 일을 되도록 만들겠다는 의지이려나?”
“아마도? 그리고 아무리 에센시아 제국 협곡의 방어가 허술하다고 해도. 저항은 있을 테니까.”
그때 듣고 있던 재중이 형이 한마디 말을 거들었다.
“마왕군 애들. 지금 에센시아 제국에 영웅 녀석들이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 재중이 형의 말에 순간 다들 상황을 납득해버렸다.
전사 형이 잘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베인을 통해서 에센시아 제국 상황을 전해 들은 모양입니다. 에센시아 제국에 영웅들이 대기 중이라는 걸.”
“그래. 비록 그게 타란 제국을 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고 해도. 마왕군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을걸?”
“괜히 어설프게 질질 끌면서 돌파하면 꽤 시간이 걸렸겠죠. 당연히 영웅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지원했을 테고요.”
“맞아. 마왕들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해가면서 시간을 날릴 이유는 없었겠지.”
두 사람 말대로 이게 바로 마왕들이 직접 나선 이유였다.
잘못하다가 시간이 끌려 비밀 통로 입구가 영웅들에게 막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 엄청나게 좋은 기회를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통째로 날려 버렸을 테니까.
전사 형이 감탄을 섞어서 말했다.
“생각보다 마왕들의 판단이 좋은 것 같은데요?”
“적어도 힘만 쎈 머저리들은 아니라는 거겠지. 치고 나가야 하는 때를 확실히 알 정도의 머리는 있어.”
“쉽게 보긴 어렵겠군요.”
“그래 봐야 우리 손 위에서 노는 거지만.”
그런 재중이 형의 말에 다들 웃음 지었다.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센시아 제국에 영웅이 돌아와 있다는 정보도 다 우리 쪽에서 베인 녀석에게 제공한 거니까.
결과적으로 마왕들까지 나서게 한 건.
우리가 전해 준 정보의 역할이 컸다.
덕분에 마왕군은 그 어떤 저항도 없이 베링턴 산맥을 편안하게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전사 형이 설명을 계속 했다.
“먼저 마왕들이 앞에 나서서 베링턴 산맥 입구 수비군을 궤멸시키자 산맥 너머로 대기 중이던 마왕군이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현재 무려 세 개에 달하는 마왕군 군단들이 에센시아 북부 후작령에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죠. 이미 에센시아 북부는 마왕군이 점령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에센시아 황제가 꽤 속이 쓰리겠네. 자기네 앞마당에 마왕군이 진을 치고 드러누웠으니.”
베르마 제국이 전쟁터인 상황과.
자기네 앞마당이 전쟁터가 된 지금의 상황은 아예 그 압박감부터가 달랐다.
병력 지원만 하면 끝나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여차하면 자기 본진이 털릴 수 있으니까.
그만큼 지금의 상황은 에센시아 제국에게 있어 위협적이었다.
당연히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막내별이 한 마디를 거들었다.
“이제 타란 제국 침공은 생각하지도 못 하겠어요. 앞에서 마왕군이 저렇게 자리 잡으면.”
전사 형 역시 동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노리고 마왕군을 풀어둔 거니까요. 이제 당분간 에센시아 제국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 상황에서 에센시아 제국이 타란 제국을 침공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황제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밑에 있는 모든 가신들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리겠지.
그러니까 이젠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머릿속에서 타란 제국 침공은 완전히 지워야 한다.
상황을 듣고 있던 챠밍이 전사 형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생각만큼 마왕군이 빠르게 전진하지는 않네요? 에센시아 제국 북부를 차지한 다음 더 이상 밀고 내려오지 않잖아요.”
챠밍 말대로 마왕군이 현재는 아예 북부에 눌러앉은 상황이랄까.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조금만 내려오면 눈앞에 커다란 먹이가 있음에도.
그러자 전사 형이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서 대답해주었다.
“아마 마왕들도 영웅들이 죄다 돌아와 있는 상황을 전해 들었을 테니까. 쉽게 에센시아 제국 수도를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몰라.”
“지금처럼 수도를 기습하기 좋은 때라도요?”
확실히 챠밍의 말이 맞긴 했다.
에센시아 제국의 눈을 피해서 북부를 아무런 저항 없이 차지한 데다가 바로 진격해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를 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자 옆에서 재중이 형이 챠밍에게 설명해주었다.
“지금 이대로 마왕군의 모든 병력들이 진격해서 내려갔다가 수도에서 막히면 그대로 고립될 수도 있으니까.”
“…… 보급이 막힐 수도 있다는 거죠?”
“어, 맞아. 앞으로 얼마나 더 넘어올지 모르겠지만. 이미 산맥을 넘어 먼 거리를 이동해서 온 마왕군에게 추가 병력이 도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보급로도 그만큼 늘어질 거고.”
“으음. 마왕들이 생각보다 노련한 모양이에요.”
빠르게 협곡을 통과한 것도 그렇고.
보급까지 고려해서 진을 치고 눌러앉은 것까지.
전쟁을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닌 모양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불쑥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마왕 쟤들. 지금 북부를 암흑 지대로 만드는 작업 중일거야.”
“암흑 지대?”
“마계랑 같은 환경을 만드는 거지. 아마 너희 식대로 하면…… 영지를 늘린다고 해야 하려나?”
“그럼 장기전을 노린다는 건가?”
“맞아. 그리고 그 작업을 하려면 베르탈륨이 엄청나게 필요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지은이 : 란델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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