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352화 (1,352/1,404)

#1352화 재건 (11)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황당한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감정을 숨길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눈앞의 레오나 에센시아의 반응은 정확하게 거기에 부합했다.

그간 표정을 감추는데 능한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당황함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네……?”

워낙 다양한 표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마치 자신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당황한 레오나 에센시아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

“잘못 들은 것 아니에요.”

한참을 당황하다가 자신의 표정이 너무 풀어졌다는 것을 이제야 느꼈는지 곧 표정을 수습하면서 다시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카샤스 대공…… 아니 황제와 혼인을 하라는 건가요?”

“네. 아주 정확합니다.”

내가 쐐기를 박아주자 레오나 에센시아의 얼굴이 벙찐 표정으로 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그녀도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궁금하기는 한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갑자기 혼인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요?”

타란 제국과 에센시아 제국간의 혼인은 쉽게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양 국가의 거대한 규모를 고려해보면 더 그렇고.

단순히 사랑하는 누군가가 혼인을 한다는 일과는 사이즈부터가 다르다.

가장 큰 제국끼리의 혼인이 성사되면.

대륙 전체의 정세가 바뀌게 된다.

고려해야 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사무적인 태도로 나를 바라보는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진실된 태도로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적어도 혼인의 당사자들은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

게다가 이 혼인은 진짜가 아니기도 했고.

“으음. 일단은 카샤스 황제에게 시간을 벌어줄 필요가 있어서요.”

시간이라는 내 말을 들은 레오나 에센시아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녀는 충분히 우수하고 거기다 똑똑하기도 했다.

혼인을 언급하고 카샤스 황제까지 이야기한 이유를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생각을 가다듬은 레오나 에센시아가 내게 물었다.

“혹시 에센시아 제국에서 위협이 있었나요?”

역시.

지나칠 정도로 영민하고 머리가 잘 돌아갔다.

과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전대 최강의 영웅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성마대전이라는 무대에서 단순히 무력만 높다고 영웅 놀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맞아요. 지금 무너진 타란 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에센시아 제국이에요. 특히 당신의 아버지인 에센시아 제국 황제. 그 사람은 이 위기를 그냥 넘겨보진 않을 겁니다.”

에센시아 제국 황제를 입에 올리자 그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우리 이상으로 황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그녀일 테니까.

황제의 성향을 고려해봤을 때.

지금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해보는 건 그녀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확률이 높은 긍정.

보통은 그러면 반대로 부정이라고들 하지만.

지금은 곡해할 이유가 없다.

이건 그냥 긍정이다.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타란 제국을 침공할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긍정.

특히 그녀의 입에서 확답이 나온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고 봐야 한다.

에센시아 제국과 타란 제국의 전쟁이.

“확신합니까?”

“네. 에센시아 제국이 약해진 타란 제국을 삼킬 수만 있다면…… 대륙의 가장 큰 제국으로 거듭날 거예요. 그리고 이런 호기를 놓칠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때 여에 있던 재중이 형이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물어보았다.

“다른 제국이나 성국이 끼어들 확률은 어떻습니까?”

“아. 그럴 수는 있겠지만…… 현재 베르마 제국은 그럴 여유가 없을 거예요. 성마대전의 가장 최전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추가로 병력을 뺄 수 없어요.”

일단 베르마 제국은 탈락.

그리고 저 의견은 나와 재중이 형의 의견과 완전히 일치했다.

특별히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베르마 제국은 에센시아 제국과 타란 제국의 전쟁에 관여하지 못한다.

“만약이라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아뇨. 혹시라도 아버지가 베르마 제국에 지원하는 병력과 군비를 빼버린다고 엄포라도 놓는다면 베르마 제국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현재 베르마 제국이 성마대전의 최전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에센시아 제국과 요하스 성국을 비롯한 여러 왕국들이 병력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에센시아 제국이 발을 빼버린다고 하면 방어선의 한 축이 무너져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상황이 흘러가면 에센시아 제국이 베르마 제국과 다른 왕국들에게 쌍욕을 처먹긴 하겠지만.

그걸 무시할 정도의 이득이 있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황제다.

그 이득이 타란 제국이니까.

“그러다 베르마 제국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바로 성마대전의 최전선이 바뀌게 됩니다. 에센시아 제국의 코앞까지 전선이 확대되죠.”

“네. 아버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정말 베르마 제국에서 병력을 빼버리진 않겠죠.”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요.”

재중이 형 말대로 베르마 제국에 파견나간 병력을 빼버리면.

그 병력 전체가 에센시아 제국을 향하는 창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타란 제국이 약화되어 있는데.

성마대전에 나가 있던 영웅들이 죄다 돌아오면.

그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최악의 경우 정말 타란 제국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 내가 보유한 대공의 영지와 소유권을 백 프로 쥐고 있는 베르탈륨 광산까지 내어줘야 할 터.

이건 최악이지.

정말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정신 나간 짓만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상황은 낫다.

다시 재중이 형이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물어보았다.

“타란 제국은 성마대전에 병력을 많이 보내진 않았죠?”

“정확한 건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그럴 거예요. 그동안은 카샤스 황제가 나가 있었으니까요.”

카샤스 황제와 그의 용기사 부대라면.

어지간한 영웅들이 떼거지로 모여도 상대가 안 된다.

타란 제국은 자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파견한 셈이라 어느 정도 생색을 낼 수도 있었고.

다만 지금은 그 카샤스 황제가 타란 제국에 와 있다는 게 문제지.

“아마 베르마 제국으로부터 압박이 들어오겠군요. 타란 제국에.”

“네. 그동안은 카샤스 황제 덕분에 병력 파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안 되니까요.”

당장 카샤스 황제가 성마대전으로 나서는 것 자체가 무리다.

언제 에센시아 제국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 그렇고.

만약 직접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나선다면.

그에 상응하는 무력은 카샤스 황제뿐이니까.

자리를 비우는 게 불가능.

아이샤 타란은 내정은 가능하지만.

전투에 나서는 건 역시 어렵다.

거기다 카샤스 황제가 그걸 허락할 리도 없다.

잠시 말을 삼킨 레오나 에센시아가 다시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저와 카샤스 황제의 혼인인가요?”

“아니라고 할 순 없겠네요.”

혼인 자체가 당장 타란 제국에 들어오는 모든 압력을 해소할 방법이기도 했다.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이라면…… 확실히 최선이긴 해요.”

레오나 에센시아 역시 긍정을 표했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을 보면.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괜찮다는 모습인가?

이거 정말…….

잘하면 혼인이 성사되는 것 아냐?

임시방편으로 내놓은 방법이긴 한데.

카샤스 황제의 반응도 봐야 하겠지만.

일단 그녀는 호의적이었다.

슬쩍 재중이 형을 쳐다보자 재중이 형은 그녀에게 확실히 선을 그었다.

“혼인을 발표하긴 하겠지만. 실제로 성사되진 않을 겁니다.”

“네? 무슨 뜻이죠?”

“황녀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러자 다시 표정이 굳어진 레오나 에센시아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에센시아 제국에서 내정 간섭이 일어나겠군요.”

“네. 정확합니다.”

“저와의 혼인을 빌미 삼아 각종 이권을 가져갈 테고요.”

“틀리진 않죠. 제가 황제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니까요.”

“어쩌면…… 내전을 치른 타란 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병력을 파견할 수도 있겠죠.”

“잘 아시네요.”

“평소에 제국이 약해진 다른 왕국을 삼키는 방법이니까요.”

혼인이 실제로 성사되면.

두 사람의 말대로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둘 다 확신하는 걸 봐서는.

무조건 일어나는 일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니까 혼인하는 척만 하라는 거죠?”

“혹시 아쉬우십니까?”

그런 재중이 형의 질문에 레오나 에센시아가 미소 지으면서 답했다.

“아뇨. 그리고 당장 혼인하라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덜 당황스러워요.”

이해관계 때문에 위장 혼인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레오나 에센시아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마지막에 그녀가 나를 쳐다보면서 물어보았다.

“결론은 적당히 혼인하는 척. 시간만 끌면 되는 거죠?”

“네. 가능하면 그렇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카샤스 황제도 같은 생각이라면요.”

다행히 한고비는 넘긴 것 같네.

이제 카샤스 황제는 어떠려나?

***

“뭐?”

“위장 혼인 좀 하자고.”

그런데 내 제안에 카샤스 황제의 표정은 완전히 구겨진 모양새다.

이어진 설명을 들은 카샤스 황제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 물었다.

“그녀는?”

“레오나 황녀?”

“그래. 기분 나빠하지 않던가?”

“굳이 말하자면 반반?”

“하아…… 미치겠군.”

이 녀석 지금 전쟁 이야기보다 레오나 에센시아가 기분이 나쁠지가 더 걱정인가?

“왜? 혼인 안 한다고 덜컥 말했을까 봐?”

“아니. 됐다. 그녀가 허락했다면 내가 더 할 말은 없을 것 같군.”

“남의 혼인사를 가지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좀 오버 같긴 한데. 방법이 없어.”

그러자 카샤스 황제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도 알아. 그러니 네게 화를 내지 않는 거다. 아마 다른 대신들이 똑같이 말했다면 지금쯤 누구 하나 목이 날아갔을 텐데.”

“어이구. 무섭네.”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 녀석도 눈이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나 싶기도 하고.

“왜? 아쉽냐?”

“어…….”

의외로 바로 긍정을 표하자 오히려 내가 놀라버렸다.

“너, 진심이었냐?”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충분히 고려할만한 혼인이었겠지.”

음.

이 녀석 진심이네.

막상 이렇게 되니 좀 미안하긴 한데.

“나중에 타란 제국이 완전히 복구되면 하던가.”

아주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그것대로 못할 짓이라.

“내가 알아서 하지. 그리고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하니까.”

방법이 없다는 걸 카샤스 황제 역시 인지하고 있어 특별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베르마 제국에서의 압박은 해결되지 않아.”

“성마대전의 병력 파견 말이지?”

내 물음에 카샤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본인이 직접 나가 있었으니 괜찮았지만.

지금은 고스란히 공백이 됐다.

급한 불은 끄겠지만.

다른 불이 남았다 이건가.

“알다시피 타란 제국은 성마대전에 내보낼 만한 병력이 없어.”

이건 맞는 말이었다.

에센시아 제국에서 언제 침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국의 병력들을 빼버리면?

위장 혼인으로 잠시 시간은 벌겠지만.

그 시간이 무한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 못 챌 수가 없다.

결국 빤히 카샤스 황제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보고 베르마 제국으로 가달라는 말이겠지?”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지은이 : 란델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181-251-9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