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0화 재건 (9)
예전의 성마대전에서 에센시아 제국이 마왕군에게 무너지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게 바로 이 에센시아 제국의 협곡에 있는 비밀 통로였다.
험준한 협곡 위가 아닌.
산 아래로 길게 뻗어있는 거미줄 같은 통로.
그 통로를 타고 마왕군이 진격해 에센시아 제국의 수도로 진격하면서 에센시아 제국이 회복 불가능한 거의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된다.
애초에 마왕군과의 경계가 되는 협곡에 많은 병력을 배치한 것도 아니었고.
에센시아 제국의 주력은 오히려 다른 지역으로 대부분 파병 나가 있었으니 사실상 에센시아 제국의 수도를 지킬 병력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뒤를 치고 들어온 마왕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면서 긴 마왕군과 에센시아 제국의 전쟁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나버리지.
아마 나중에서야 비밀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분통을 터트렸겠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에센시아 제국군은 수도를 잃어버리고 다시 수복하지 못해 도망 다니는 신세였으니.
우습게도.
그때 에센시아 제국군을 받아준 곳이.
바로 타란 제국이었다.
그걸 승인한 사람도 지금의 카샤스 황제이기도 했고.
한 번에 대륙의 큰 축을 차지하는 에센시아 제국을 멸망시켜버릴 수도 있는 정보를 너무 쉽게 말해버리자 베인 녀석의 표정이 뭐라 형용할 수 없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정말입니까?”
“내가 지금 너랑 농담 따먹기나 할까.”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베인 녀석이 내 얼굴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지금 들은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이 정보를 자신이 마왕군에 직접 전달한다면.
더이상 자신의 입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까지 치고 올라갈 수도 있을 터.
거기다 잘하면 비어 있는 마왕 자리까지도 탐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이군요.”
“그렇다니까.”
곧 정신을 가다듬은 베인이 내게 물어보았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겠죠?”
그런 베인 녀석의 물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머리가 안 돌아가는 녀석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드러내지 않았을 뿐.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베인 녀석에게 말했다.
“아마 마왕군 1군단 소속이라고 했었지?”
내 물음에 베인 녀석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숨겨진 사실을 문답하려고 물어본 건 아니니까.
“거기 담당하는 마왕이…….”
“데칸 님이십니다.”
“그래. 그놈.”
베인은 자신이 모시는 마왕을 내가 그놈이라고 칭하는 걸 듣고도 전혀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반응조차 없었다.
흠.
아마도 같은 마왕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려나.
물론 마왕들 사이에서도 비교 순위가 있으니 너무 차이가 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베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그런 녀석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너, 그 데칸 밑에 있으면 언젠가 네가 마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 물음에 베인 녀석이 바로 움찔했다.
만약 이 녀석이 마왕이 되겠다는 욕심이 전혀 없다면.
지금 내가 말한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녀석의 심경에 작은 파문을 만들 수 있을 터.
잠시 말을 아끼던 베인이 결국 한숨에 가까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도 어렵겠지요.”
말은 어렵다고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이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베인 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최상급 마족은.
결코 마왕이 되지 못한다.
미래의 마왕 명부에는 이 녀석의 이름이 없으니까.
뭐 중간에 마왕이 잠시 되었다가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죽었을 확률도 무시할 순 없지만.
그렇게 죽어버릴 거라면 의미가 없는 것도 매한가지다.
결국 이 녀석은 그냥저냥 적당히 최상급 마족으로 전전하다가 끝날 것이 분명했다.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해.”
내 확신이 담긴 말투에 베인 테스가 입술을 바싹 깨물었다.
녀석도 알 것이다.
자신은 마왕이 될 수 없다는 걸.
당장 내 말에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태생부터 마왕으로 결정된 녀석이 아니니까.
“그런데. 네가 마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떨까?”
“네?”
“꼭 마왕을 해 먹는 놈만 계속 해먹을 필요는 없잖아?”
순간 베인 녀석의 눈빛에 한 줄기 불꽃이 튀는 게 보였다.
화르륵 타오르는.
욕망이랄까.
주먹을 불끈 쥐는 것만 해도 이 녀석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 것만 같았다.
“……귀를 열어두고 듣겠습니다.”
“좋은 자세네.”
슬쩍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 이 정보로 녀석을 꾈 생각이냐?
<주호> 네. 아쉬운 대로 쓸 만하지 않겠어요?
<불멸> 하긴. 주변에 이만한 녀석도 없지. 마왕군하고 계속 접촉하려면 적당한 위치이기도 하고. 나쁘지 않아.
재중이 형도 적당히 밀어주라고 하는 모양새였다.
다시 베인 테스를 보면서 물었다.
“마왕이 되려면 뭐가 필요하지?”
솔직히 이건 나도 잘 모른다.
이전에는 마왕 후보까지만 올랐다가 성마대전으로 날아온 셈이라.
그리고 그때와 지금의 방식이 같은지도 확신이 없었다.
내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베인 녀석이 대답했다.
“마왕 자리에 공석이 있으면 1차적으로 다른 최상급 마족 중에 제일 순위가 높은 녀석이 올라갑니다.”
“공석?”
“네. 마왕 중에 누군가 죽으면 새로 뽑는 편입니다. 천사군과 비교해 마왕의 숫자가 밀리면 안 되니까요.”
“마족 중에 순위가 제일 높다라…… 일단 그게 넌 아니겠지.”
베인 녀석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그다지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만약 공석이 있다고 한들.
이 녀석이 최상위 순위가 아니라면.
그냥 남 좋은 일만 하고 끝나버린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딴 놈이 챙기는 셈이라.
삽질도 그런 삽질이 없다.
“다른 방법은?”
얼추 다음 방법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원하는 자리의 마왕을 하위 마족이 싸워서 이기면 됩니다.”
“그게 더 불가능하겠는데?”
마왕이 괜히 마왕이 아니다.
최상급 마족 수십이 한꺼번에 달라붙어서 싸워도 이길 정도라.
거기다 마왕의 순위에 따라 그보다 더한 마왕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마왕을 최상급 마족이 이길 수 있었다면.
매일 마왕군은 피 터지는 마왕 쟁탈전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 마왕하고 맞짱 떠서 이길 수 있어?”
내 너무 당찬 물음에 베인 녀석이 고민 없이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렇게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면.
이 녀석이 여기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뇨. 불가능합니다. 전대의 다른 마왕의 능력을 물려받지 않는 이상은요.”
“그래?”
“네. 수명이 다한 마왕의 힘을 승계받는 경우도 간간이 존재합니다.”
“편한 방법이네.”
“사실 가장 어렵죠.”
아수라장 같은 마왕군의 순위 쟁탈전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남아 승계를 한다라…….
확실히 어지간한 녀석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그건 됐고. 불가능한 일에 목숨 걸지 말자고.”
그리고는 베인 녀석에게 말했다.
“맞짱 떠서 이길 수 없다면…… 마왕을 어떻게든 죽이기만 하면 어때?”
마왕을 죽인다는 내 물음에 잠시 놀란 눈빛을 하더니 이내 베인 녀석이 가능성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는데 직접적인 힘을 행사했거나 혹은…….”
“혹은?”
“그 마왕의 무구를 뺏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럼 힘의 일부분을 승계받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네.”
“그래도 쉬운 게 아닙니다만…….”
마왕을 죽이는 걸 너무 쉽게 말하자 베인 녀석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하실 생각입니까?”
“왜? 못할 것 같아서?”
베인이 생각하기에 나 역시 같은 마왕이었다.
그런 내가 대놓고 도와준다?
이건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정도가 아니라.
해볼 만한 그림이 될 수도 있었다.
“보자…… 데칸을 한 번에 잡긴 무리일 것 같고…….”
내 입에서 1군단장 마왕 데칸의 이름이 나오자 베인 녀석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도 잡는다는 말을 했으니까.
“저기…… 제가 마왕 데칸 님의 휘하인 건 알고 계시겠죠?”
“응? 그래서 걔가 널 마왕 만들어 준데?”
너무 당당하게 말하자 베인 녀석도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베인을 보고는 딱 한 마디를 건넸다.
“줄 잘 서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데칸 님을 배신하라는 겁니까?”
“아니. 배신하지 말고 잘 붙어 있어. 감시도 좀 하고 마왕군 정보도 넘겨주면 좋겠는데…….”
“그게 그겁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이용하라고. 너도 언제까지 그 녀석 쫄따구만 할 순 없잖아.”
마왕 데칸을 배신하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려나?
뭐 상관없다.
베인 녀석이 좋든 싫든.
해야 할 테니까.
결국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오자 다시 말을 이었다.
“에센시아 제국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마왕들 좀 끌고 와라.”
그 순간.
내 말뜻을 이해한 듯 베인 녀석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이 기회를 이용해서 마왕들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아주 눈치가 없진 않네.”
에센시아 제국을 칠 수 있다고 베인 녀석이 썰을 풀면.
분명 그에 혹하는 마왕들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들 중에 몇 놈만 낚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터.
“어차피 네가 직접 죽이기는 힘들 것 아냐.”
이번에 비밀 통로를 넘어오는 마왕들은.
일종의 제물이다.
시간을 벌어줄 제물.
그리고 아직은 에센시아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면 안 된다.
그럼 성마대전 역사가 너무 틀어지게 되고.
써먹을 수 있는 역사가 너무 많이 날아가니까.
무엇보다 에센시아 제국에는 내가 반쯤 소유한 헤르마늄 광산이 존재했다.
아직 삽도 제대로 못 떴는데 이걸 마왕들이 차지하게 둘 순 없는 노릇이라.
마왕들이 비밀 통로를 넘어오되.
에센시아 제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드는 정도까지 가면 안 된다.
“그러니까 적당히 몇 놈만 죽이자.”
마왕 몇 죽이는 일을 마치 파리 때려잡는 것마냥 너무 쉽게 말하자 이젠 베인 녀석의 상식이 따라오지 못하는지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일단 넌 에센시아 제국으로 복귀해서 마왕군에 연락을 넣어. 판은 깔아줄 테니까.”
잠시 생각을 하던 베인 녀석이 내 성향을 알겠다는 듯 눈빛을 번뜩이며 물어보았다.
“혹시 마왕님께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신 것 아닙니까?”
“흐음. 아마도?
“그렇다면…… 양쪽의 세력비를 잘 맞춰야겠군요. 아주 오래 전쟁을 끌 만큼요.”
이것 봐라?
판을 깔아주니 알아서 조율하겠다는 건가?
“에센시아 제국과 마왕군이 적당히 상잔하는 방식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거기다 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일을 벌여야 하는지 이해도 한 것 같았다.
내가 타란 제국의 대공이 되었다는 점과.
그와 더불어 지금 타란 제국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을 터.
이런 상황에서 마왕군과 에센시아 제국을 싸움 붙인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면 이해할만한 그림이 된다.
옆에서 재중이 형이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불멸> 생각보다 쓸 만한데?
<주호> 그러게요. 눈치가 상당히 좋네요.
곧 베인 녀석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 와중에 저도 제 몫을 챙겨야겠군요.”
나 역시 마주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그래. 필요한 만큼 챙겨. 일이 잘 풀리면. 마왕 목 한두 개는 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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