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8화 재건 (7)
손을 맞잡은 뒤 잠시 기다렸지만 카샤스 대공이 아직 황제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인지 딱히 시스템 메시지가 나오지는 않았다.
“우선순위는 바로 하자고. 내가 대공이 되기 전에 네가 황제에 오르는 게 먼저 아냐?”
“흠. 그렇군.”
카샤스 대공이 타란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전대 황제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이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도 카샤스 대공이었고.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한쪽에 쓰러져 있는 전대 황제를 쳐다보았다.
아직 숨을 붙어 있나.
분명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는 과도한 힘을 끌어다 썼기 때문에 신체가 붕괴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면…….
저대로 가만히 놔둬도 결국 목숨이 다해 죽을 테지.
굳이 카샤스 대공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슬쩍 그에게 말을 흘렸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죽을 거야.”
“그런가…….”
왠지 씁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의 혈족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살려줄 생각은 아니지?”
그 정도로 카샤스 대공이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라는 것도 있으니까.
내 의심을 섞은 물음에 카샤스 대공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리가.”
“뭐 그럼 됐어.”
카샤스 대공의 심정이 어찌 됐든 일단 마무리는 될 것 같았다.
변수가 있다면.
그의 누이인 아이샤 타란 정도려나.
괜히 황제를 살려주니 어쩌니 하고 나온다면 여럿 피곤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네 누이와 생각이 다르다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타란 제국 수도에 걸려 있던 제물의 결계가 사라지자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아이샤 타란을 비롯한 타란 제국병들과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왕국의 유저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유저들은 이 안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중간에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물의 결계에 들어왔던 유저들 중 방송을 켠 유저가 적지 않을 테니까.
근처의 유저들이 다 죽어버려 키메라와의 마지막 전투는 보지 못 했겠지만.
일대를 감싸던 제물의 결계가 사라졌고.
남은 게 우리밖에 없다는 건.
마지막에 누가 이겼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유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계속 크게 들려왔다.
“정말 그 키메라를 이겼잖아?”
“세상에. 고대 마룡도 처리했어.”
“와. 미친 새끼들. 이게 가능해?”
감탄을 넘어선 그들의 반응에 멋쩍은 웃음이 났다.
아마 저들이 마지막에 본 건 키메라가 타란 제국군과 카샤스 대공군을 덮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학살에 가까운 전투를 봤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괴물들 사이에 끼어서 결국 전투를 이긴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곧 재중이 형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여긴 복잡해지겠네.”
“네. 슬슬 자리를 옮기죠.”
이곳 전투를 궁금해하는 유저들 사이에 끼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마침 아이샤 타란이 먼저 그녀의 병사를 끌고 와 우리 주변에 유저들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진을 쳤다.
덕분에 쓸데없이 유저들과 마주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곤 곧장 아이샤 타란이 달려가 카샤스 대공을 확 끌어 앉았다.
카샤스 대공은 괜찮다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하나뿐인 가족이라 이건가.”
“그렇죠.”
카샤스 대공과 아이샤 타란이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시선이 쓰러져 있는 타란 황제에게 향했다.
뭔가 결심을 한 듯 아이샤 타란이 걸어가자 카샤스 대공이 그 뒤를 따랐다.
우리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갔고.
아이샤 타란의 몸에서 뭔가 환한 빛이 나오자 곧 황제가 힘겹게 눈을 떴다.
신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그의 눈빛에는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곧 크게 피를 토해내면서 아이샤 타란과 카샤스 대공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말했다.
“쿨럭. 아이샤…….”
솔직히 눈을 뜨자마자 발악할 줄 알았는데.
그와 달리 그의 눈에는 자조에 섞인 눈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런가. 내가 졌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이샤 타란이 결국 짧게 한숨을 쉬면서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가 시작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예요. 그냥 오라버니는 여전히 황제였을 테고. 우린…….”
“안다.”
그러더니 아이샤 타란을 보고는 마지막 말을 남기듯 힘겹게 말을 맺었다.
“아이샤. 네게는 미안하게 됐다.”
아마도 그녀를 죽여 용신검의 제물로 쓰려고 했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 자체를 말하는 것을 수도 있고.
“흑. 이제와서 그렇게 말하면…….”
역시 저들 사이에 우리가 몰랐던 뭔가 깊은 끈이 있었던 듯 했다.
“나를 용서하지 마라…….”
결국 아이샤 타란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굵은 눈방울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카샤스 대공을 쳐다봤다.
“카샤스.”
“……네.”
타란 제국 황제의 시선은 카샤스 대공이 들고 있는 용신검 아스카론에 닿아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까지도.
“그런가. 용신의 선택은 역시 너였군.”
아마도 자신이 들고 있었던 용신검 아스카론이 가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다.
다시 카샤스 대공을 빤히 쳐다보고는 말을 꺼냈다.
“네 손으로 직접 나를 죽여라.”
“…….”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카샤스 대공이 굳은 표정을 짓자 타란 제국 황제가 말을 이었다.
“네가 내 힘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대로 죽고 나면 그조차도 할 수 없어.”
“왜…….”
어떻게 보면 타란 제국 황제의 말이 맞았다.
용신검은 그런 용도로 쓸 수 있으니까.
다른 용혈을 흡수해서 더 높은 힘을 쓸 수 있겠지.
그게 타란 제국 황제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걸 본인이 직접 말했다는 게 예상 밖이긴 하지만.
잠시 눈을 감은 황제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말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었을 거다. 네가 황제가 되는 건.”
어떻게 보면 타란 제국 황제의 저 말은 예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원래 성마대전에서도 카샤스 대공이 타란 제국의 황제가 되니까.
과정이 달라졌긴 해도.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다.
“나를 죽여라.”
할 말을 잃은 카샤스 대공이 들고 있던 용신검을 꽉 쥐었다.
“카베스…….”
결심을 한 듯한 카샤스 대공을 쳐다본 타란 제국 황제가 마지막으로 폐허가 된 타란 제국성을 쳐다본 뒤 눈을 감았다.
“타란 제국을 부탁한다.”
결국 카샤스 대공이 용신검 아스카론의 검신을 타란 제국 황제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푸욱!
그러자 용신검 아스카론이 황금색 빛을 내뿜으면서 카베스 황제의 용혈을 그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곧 카베스 황제의 신체가 빛으로 분해되듯 사라지며 완전히 용신검에 흡수되어 버렸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패자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너무 편안한 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용신검을 쥐고 있는 카샤스 대공의 두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카베스…… 형…….”
그 말을 끝으로 카샤스 대공이 질끈 눈을 감았다.
아이샤 타란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황제의 최후를 지켜봤고.
전대 황제가 죽었음에도.
그들에게서 그 어떤 환호나 기쁨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 모두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함 속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카샤스 대공이 카베스 황제를 죽였습니다! 》
《 카샤스 대공이 새 타란 제국의 황제로 승격됩니다! 》
길고 긴 타란 제국의 내전이 이렇게 완전히 끝을 맺게 되었다.
옆에서 재중이 형이 의외라는 듯 내게 말했다.
“황제 녀석 마지막 발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솔직히 나 역시도 황제 자리에 미련이 있는 카베스 황제가 난리칠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목숨을 내주었다.
마치 남은 생에 미련이 없는 것 마냥.
“처음부터 그냥 카샤스 대공에게 내줬으면 얼마나 편했냐.”
“너무 고생하긴 했죠.”
결과적으로 카샤스 대공이 황제 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타란 제국은 반 토막 난 상황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인가?
수도가 다 날아가고 용기사단도 대부분 죽은 데다가 용들 역시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하위 병사들까지 치면 그 피해는 숫자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다.
거기다 다른 제국들과 왕국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데다가 천사들까지 개입할 확률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타란 제국을 지켜 내야 하는 미션이라…….
최악에 가까운, 더 내려갈 수 없는 난도다.
전대 황제의 장례 아닌 장례를 치러준 카샤스 대공이 용신검을 뽑자 힘을 모두 흡수한 듯 이전보다 훨씬 밝은 황금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자 카샤스 대공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식의 결말을 원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샤스 대공의 기분을 살필 시간도 부족하다.
“지금 많이 슬퍼해 둬. 앞으로는 슬퍼할 시간도 없을 거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데.”
“그렇군.”
곧 카샤스 대공이 내게 손을 휘젓자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카샤스 타란 제국 황제가 유저 주호 님을 타란 제국 대공 자리에 임명하려 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
이제 카샤스 대공.
아니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제대로 된 임명이 가능해진 듯 했다.
“받아들인다.”
《 유저 주호 님이 타란 제국 대공 위에 임명됩니다. 》
《 타란 제국 대공령이 유저 주호 님에게 부여됩니다. 》
《 타란 제국 대공령의 귀족 임명권이 부여됩니다. 》
《 타란 제국 대공령의 세금이 면제됩니다. 》
《 지정된 베르탈륨 광산 독립 채굴권이 타란 제국 대공령에 귀속됩니다. 》
《 베르탈륨 광산의 채굴 세금이 면제됩니다. 》
《 타란 제국 대공령에서 생성되는 용의 알에 대한 모든 소유 권한이 부여됩니다. 》
.
.
그밖에 타란 제국 대공령에 대한 모든 권한들이 일제히 내게 부여된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타란 제국령은 어지간한 왕국보다 훨씬 그 규모가 컸다.
오죽하면 타란 제국의 대공은 타 왕국의 왕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할까.
거기다 지금 카샤스 대공이 내게 주는 혜택들은.
그보다 더했다.
각종 세금 면제 혜택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건 완전히 독립된 권한을 넘겨준다는 거다.
아마 그만큼 일하라는 거겠지.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받은 만큼 일은 해야겠네.”
그리고는 바로 주변에 모여든 인원 중 한 명을 불러냈다.
“베인 테스. 네가 할 일이 있다.”
어느새 내 앞으로 뛰쳐나온 에센시아 제국 5기사단장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명 하십시오.”
다른 이들이 보면 에센시아 기사단장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녀석의 진짜 정체는 마계 1군단 소속 특수대 침투조 조장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할 일은.
앞에서 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일단은…….
에센시아 제국의 발목을 잡는 일부터 시작해볼까?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