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5화 제물의 결계 (14)
원래라면 타란 제국 황제가 직접 고대 마룡을 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전에 타란 제국 함대와 용기사들을 동원해서도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타란 제국으로 전진하는 걸 저지하지 못 했으니까.
애초에 재앙급 네임드를 단독으로 잡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미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판을 미리 만들어둔 상황이었다.
천사들이 준비한 금지된 제물의 결계.
특히 그 제물의 결계 안에 들어온 존재의 마력을 빼앗을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사기와 같은 능력이었다.
천사들이 이 결계를 금지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제물의 결계 안을 빤히 쳐다보면서 내게 물었다.
“고대 마룡이 저 결계에 들어간 지 정확히 얼마나 됐어?”
그 말에 잠시 시계를 쳐다보고는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해냈다.
“30분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고대 마룡이 제물의 결계에 들어간 시점과.
우리 팀이 이전에 추락한 비공정들을 회수하러 간 시간을 고려해보면 아마 30분 안팎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결계를 지켜본 시간도 있었고.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게 말해주었다.
“고작 그 정도 시간으로 저만큼 약해졌으니까…… 딱 그 정도 시간이 더 흐르면 어쩌면 가능하겠네.”
약해졌다라…….
고대 마룡이 약해진 건 확실했다.
이전 같았다면 이런 결계 정도야 힘으로 찢고 나갔을 텐데.
지금은 검은 용암을 들이붓고도 제물의 결계가 찢어지지 않고 건재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제물의 결계는 더 강해질 거야.”
“그만큼 고대 마룡이 더 약해지고?”
내 추측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제물의 결계 안에서 힘을 뺏기는 건 고대 마룡만 있는 건 아니니까.”
“타란 제국 시민들도 죽는다 이거지?”
“그래. 고대 마룡이야 체력이 넘치니까 버틸 수 있지만.”
“제국민들은 못 버틴다 이거군.”
“아직까지 다 안 죽은 게 용할 정도네. 타란 제국 시민들이 용족이라 아주 조금이라도 용혈을 이어받아서 그런가?”
확실히 타란 제국의 시민들은 옅더라도 용혈을 가지고는 있었다.
그게 너무 약해서 표가 나지 않을 뿐.
잠시 말을 멈췄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거기다 고대 마룡의 마력까지 흡수해서 강해지고 있으니까.”
“고대 마룡은 점점 약해지는 데 반해 제물의 결계는 점점 강해지겠네.”
“맞아. 그런 만큼 고대 마룡이 자력으로 제물의 결계를 부수긴 힘들어질 거야.”
자신은 약해지는데.
제물의 결계가 자신의 힘과 타란 제국 시민들의 목숨까지 흡수해 강해진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고대 마룡이 불리해지게 된다.
“딱히 고대 마룡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없긴 한데.”
마왕 헤르게니아가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하긴 마왕이 고대 마룡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다른 마왕들이 보면 뒷목을 잡을만한 일이다.
“그래도 타란 제국 황제가 고대 마룡을 잡는 건 막아야겠지? 너, 타란 제국 황제하고 사이가 안 좋잖아.”
“뭐 그렇긴 하지.”
“그럼 타란 제국 황제가 고대 마룡의 힘을 먹어치우고 마신 급으로 올라서는 순간. 대륙 내에서 발붙이고 다닐 곳이 없어질 거야.”
“그건 좀 불편하겠네.”
일단 타란 제국 황제의 최우선 목표는 카샤스 대공일 것이다.
지금 이렇게 천사들을 끌어들이고.
타란 제국 시민들의 목숨을 전부 날려가면서까지 비정상적으로 힘을 모으는 건.
전부 카샤스 대공을 이기기 위함이니까.
그리고 그 다음 순위가 아마 내 쪽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
이건 확정이려나?
그런 내가 신경 쓰이는지 마왕 헤르게니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가지 제안을 꺼내 들었다.
“정 안 되면 같이 마왕군으로 넘어가던가.”
“응?”
“만약에 타란 제국 황제가 정말 그렇게 강해진다면. 그걸 막을만한 곳은 마왕군 밖에 없어.”
마왕 헤르게니아의 뜻밖의 제안에 우리 팀 모두 놀란 눈빛을 보였다.
“너, 마왕군하고 좋은 관계는 아니잖아.”
“뭐래? 이래 보여도 나도 마왕이야. 마왕군에서 한 자리 정도는 떵떵거리면서 차지할 수 있어.”
“그거참. 고맙긴 하네.”
여차하면 내가 피신할 수 있는 곳을 자신이 직접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한 셈이었다.
마왕군이라면 천사들과 힘을 합친 타란 제국 황제에게도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
그만큼 마왕 헤르게니아가 보기에.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안 좋아 보인다는 뜻이다.
천사들만큼이나 질색을 하던 마왕군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그만큼 리스크를 지고 가겠다는 말이라.
“이번에는 역시 위험한 거지?”
“응. 정말 그 최상급 천사들이 작정한 거라면. 쉽게는 안 끝날 거야.”
마왕 헤르게니아도 이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최상급 천사들도 어떻게 보면 천사군들 몰래 이 짓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
그런데 지금은 몰래했다고 하기에는.
일이 너무나도 커져 버렸다.
제국 하나를 다 엎어버릴 정도의 제물의 결계를 썼는데.
다른 천사들이 이걸 모를 수가 없을 테니.
옆에서 재중이 형이 살짝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녀석들도 반드시 타란 제국 황제를 괴물로 만들어야 하겠는데……?”
확실히 재중이 형 말대로.
이 정도까지 일이 진행됐다면.
중간에서 멈추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타란 제국 황제가 고대 마룡의 힘을 흡수해서 마신에 가까운 괴물이 되어주는 게.
그들에게는 최선일 것이다.
그래야 다른 천사들에게서 자신들을 지킬 힘이 생길 테니.
“타란 제국 황제가 천사군을 막을 수 있을까요?”
“마신 급이라며? 그럼 대천사가 와도 가능하지 않나?”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자 그녀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천사 몇 쯤은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걸? 제대로 고대 마룡의 힘을 흡수한다는 가정하에 말이야.”
“역시 그런가.”
그때 이쁜소녀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놀란 듯이 외쳤다.
“오빠. 저기!”
“응?”
“고대 마룡이 브레스를 쓰려고 해요!”
이쁜소녀뿐만 아니라 우리 팀 모두도 그 광경을 확실히 지켜봤다.
고대 마룡에게 주변의 공기가 몰려들면서 날개를 활짝 펼치는 모습이.
바로 챠밍을 보면서 물어보았다.
“전에 마력을 흡수해서 쏘던 그거지?”
“네. 그런데 공격을 안 당했는데…….”
그러자 재중이 형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이전에 모아뒀을 거야. 타란 제국군 하고는 자주 싸웠으니까.”
하긴.
내가 어지간히 불러댔으니.
흡수해서 쏘는 브레스를 쓸 마력은 충분히 비축하고 있을 터.
그러자 막내별이 내게 물었다.
“만약에 저게 안 통한다면요?”
“음…… 그럼 꼼짝없이 제물의 결계에 갇히는 거죠.”
아마 고대 마룡도 검은 용암이 더 이상 통하지 않자 최후의 선택으로 저 브레스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막내별 말대로 이 브레스도 통하지 않으면.
이미 고대 마룡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도 된다.
전사 형이 어이없다는 듯 날 보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고대 마룡을 응원해야 하는 상황 맞지?”
“아마도…… 그럴걸요.”
지금 상황에서 베스트는 고대 마룡이 자력으로 저 제물의 결계를 뚫고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타란 제국 황제와 최상급 천사 마엘리타가 해온 일이 다 물거품이 되니까.
다들 고대 마룡을 응원하는 마음인지 브레스가 쏘아지는 방향을 긴장감 있게 쳐다보았다.
“이제 쏜다!”
곧 한참 마력을 모으던 고대 마룡이 하늘을 향해 브레스를 쏘아냈다.
콰아아아!!
쿠구구궁!!
고대 마룡이 쏘아낸 검은 브레스와 핏빛으로 가득한 제물의 결계가 중간에서 부딪히더니.
일대를 울리는 강렬한 지진과 풍압이 일어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말한 것은 전사 형.
“망했다.”
나르샤 누나도 마찬가지.
조금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진짜 저걸 못 뚫었어.”
꼭 둘의 말이 아니더라도.
고대 마룡의 브레스가 뚫었다면 이미 하늘을 향해 쭉 뻗어 나가고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광경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잠잠한 하늘이.
누가 이겼는지 확연히 보여주었다.
마왕 헤르게니아도 꽤 놀랐는지 감탄의 말을 남겼다.
“와. 저걸 진짜 막아내네?”
그러자 슬쩍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물었다.
“아까 한 말 아직 유효하지?”
“마왕군으로 가는 거 말이야?”
“어. 여차하면 정말 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젠 우리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때 재중이 형이 제물의 결계 안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제 슬슬 타란 제국 황제도 움직이겠는데?”
“지금 말이에요?”
“그래.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카샤스 대공군이 타란 제국 수도에 도달할 테니까.”
“타란 제국 황제에게도 시간이 없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녀석 입장에서는 카샤스 대공이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하고 싶을 거야.”
카샤스 대공군이 타란 제국 수도에 오게 되면.
분명히 이곳의 상황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제물의 결계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전에 우리가 말해주겠지만.
그럼 고대 마룡이 죽기 전에 카샤스 대공이 제물의 결계를 파훼하려고 할 것이다.
타란 제국 황제에게는 이 상황을 가장 피하고 싶을 터.
당장 자신을 방해할만한 건.
카샤스 대공군 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챠밍이 내게 의외의 말을 했다.
“만약 이 결계에 카샤스 대공까지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어떻게 해요?”
“음?”
“타란 제국 황제에게는 이만큼 좋은 기회가 없잖아요.”
“흐음. 확실히 그렇긴 한데…….”
제물의 결계 안에 들어가면.
카샤스 대공이라고 할지라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저 고대 마룡조차도 마력을 뺏겨서인지 제 힘을 내지 못하는 상황인데.
바로 시선을 돌려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이 제물의 결계. 밖에서는 못 부수나?”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응. 방금 고대 마룡이 쏘아냈던 브레스만큼의 위력을 내지 못하면 불가능해.”
확실히 지금 고대 마룡조차도 저 브레스를 쏘고도 실패했었다.
그렇다는 말은 외부에서는 이제 제물의 결계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뜻이 된다.
원래의 고대 마룡 만큼의 위력을 내지 않고서야.
“너라고 해도? 전에는 해제할 수 있었잖아.”
내 말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살짝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그거야 오벨리스크에 직접 닿았으니까 가능했지. 그리고 이번엔 그것도 안 돼. 타란 제국 황제하고 천사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텐데.”
“으음. 그럼 무조건 안으로 들어가서 그 녀석들을 잡아야 해결된다는 말이네.”
“정확해.”
제물의 결계와 오벨리스크를 처리하는 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타란 제국 황제와 천사들은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때 재중이 형이 한 가지를 덧붙였다.
“분명히 안에 타란 제국군도 있을 거다.”
“역시 그럴까요?”
이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최종 보스가 있는 곳에 쫄따구들이 먼저 기다리는 건 진리와 같은 상황이라.
“결국 우리도 카샤스 대공군을 끌어들여야겠네요.”
우리가 그 모든 타란 제국군을 상대하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되니까.
타란 제국 황제와 천사들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이미 벅차다.
결국 쫄은 쫄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상황이 되면.
한 가지 큰 문제가 생긴다.
그걸 너무 잘 아는지 재중이 형이 굳은 표정으로 조언하듯 말했다.
“이건 시간 싸움이겠네. 카샤스 대공군이 결계에 들어가서 싸우는 순간부터는…….”
“네. 계속해서 황제가 강해지겠죠.”
카샤스 대공군이 안에서 죽어 나가든.
그 힘을 뺏기든.
결국 시간 싸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