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7화 제물의 결계 (6)
대천사의 가호를 써서 제물의 결계를 관리하던 천사들을 불러들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작 그들을 죽이고 나니 우리를 안내해야 하는 녀석들이 사라져버렸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조금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물어보고 죽일 걸 그랬나?”
“그런 건 죽이기 전에 생각했어야지.”
이미 천사들 목을 죄다 날려놓고 고민하기에는 상당히 늦은 고민이긴 했다.
하지만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방향은 알고 있으니까.”
애초에 이전부터 감각을 퍼트려 녀석들이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뭐 딱히 그런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제물의 결계의 중심이 어디인지는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거기다 아마도 결계를 관리하던 천사 녀석들이 그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만한 규모의 결계를 단지 중급 천사와 하급 천사 몇을 던져두고 관리하라는 건 좀 지나친 비약이니까.
분명히 중간에 다른 녀석들도 있을 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베르가 공작가에 설치한 제물의 결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은 이쪽부터 어떻게든 해야겠지.
그러자 챠밍이 내게 물어보았다.
“오빠. 타란 제국 수도에 퍼져 있는 제물의 결계는 어떻게 해요?”
챠밍의 물음에 시선을 돌려 타란 제국 황성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잠잠한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아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었다.
“어때? 이쪽의 결계가 발동될 것 같아?”
내 물음에 멀리 수도의 경계를 쳐다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니. 수도를 둘러싼 제물의 결계는 당장 마력이 돌아가지 않아. 만약 발동된다면 내가 바로 알아챌 수 있어.”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모르지. 황제와 협상이 안 되었거나. 헤르마늄이 부족할 수도 있고.”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타란 제국 수도 전체를 덮는 결계가 하루아침에 완성될 순 없어.”
“베르가 공작가에 쓰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지?”
“그래. 규모가 다르니까. 이런 규모로 만들려면…… 아마 만든 지 꽤 오래 지났을 거야.”
아마 이건 녀석들이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작업했다는 소리려나.
어쩌면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뭔가의 문제가 있을 수도.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혹시나 해서 알려주는 건데. 이 제물의 결계는 수도 방어 결계가 발동되면 쓸 수 없어.”
이건 전혀 생각 외인데?
“방어 결계와 동시에 쓸 수 없다는 말이야?”
“맞아. 수도 방어 결계는 베르탈륨을 쓰니까.”
“반대로 제물의 결계는 헤르마늄을 쓰고?”
“응. 그래서 두 결계는 동시에 쓸 수 없어.”
헤르마늄과 베르탈륨.
두 광석은 극과 극의 성질을 띄는 광석이었다.
그런 광물들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결계가 서로 상충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언제 고대 마룡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함부로 제물의 결계를 쓰긴 어려울지도.
“그럼 베르가 공작가의 결계는?”
“마찬가지야.”
그러고 보니 지금 타란 제국 수도 전체에 방어 결계를 쓰지 않고 있었다.
베르가 공작가에 제물의 결계를 써보려면 방어 결계를 쓰지 않아야 하니까.
“이상한 곳에서 약점이 있었네.”
마왕 헤르게니아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베르가 공작가로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아까 나온 감찰원에 대한 것도 물어보았다.
“거긴 정확히 뭐 하는 단체야?”
아까는 주변에 눈도 있어서 넘어갔는데.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챠밍의 눈치를 보아하니 전혀 모르는 눈치라.
그건 곧 천사군의 감찰원에 대한 정보가 우리 쪽에 아예 없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이건 성마대전에 기록되지 않은 그런 내용이겠지.
마왕 헤르게니아가 살짝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예전에 날 끈덕지게 찾아내고 따라붙었던 게 걔들이거든.”
“천사군의 감찰원이?”
“그래. 대외적으로는 정보 단체이기도 하니까. 정보, 추적, 감찰. 그런 게 걔들 특기야.”
그리고는 깜빡하고 잊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암살도 하고. 적의 주요 거점을 타격하는 것도 포함해서.”
“무슨 청부 업체 같은데?”
“비슷할걸?”
“그거 거의 마왕군에서나 쓰일 단체 아냐?”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학을 떼면서 말했다.
“이름만 천사지. 걔들이 마족보다 더 해. 잔인한 건 부족함이 없어.”
“이거 참…….”
마왕에게서 잔인하다고 칭찬받는 단체라니…….
할 말이 없어질 정도다.
“천사군의 군단에는 등급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속하는 군단이 중앙 천사군이야. 다른 천사군 군단을 전부 관할하고 있고.”
“아까 감찰원이 그 중앙 천사군 소속이라고 했던가?”
“맞아. 그중에서도 핵심이자 뿌리가 되는 게 그 감찰원이거든. 그래서 권력과 자금이 집중되어 있어.”
“꽤 규모가 크나 보네.”
“대천사들이 직접 관리하니까. 그런데도 서로 정체를 몰라.”
“그래? 의외네.”
아니.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 감찰원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성마대전에 기록이 되어 있다면 분명히 정보를 알았을 텐데.
기록이 없다는 건.
그만큼 잘 숨겼거나.
아예 없었거나.
이 경우에는 전자라고 봐야 한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알고 있으니까.
“설마 감찰원이라고 한 게…… 서로 정체를 몰라서야?”
“눈치 빠르네?”
“진짜 감찰원 소속과 부딪히면?”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가 들고 있던 대천사의 검을 가리켰다.
“대천사의 검이면 다 해결될걸? 아무리 감찰원이라고 해도 대천사가 하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어. 대천사의 존재는 감찰원 내에서도 특별 관리 대상이니까.”
“그거 참 안심될 것 같은 말이네.”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가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감찰원 소속이라고 하면 날 건드릴 녀석이 없다는 뜻이지?”
“응. 맞아. 다른 감찰원 소속 대천사가 직접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줄줄이 설명해주는 마왕 헤르게니아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째 마왕이 천사군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씨! 너도 몇백 년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놈들이 있어 봐. 공부를 안 하게 되나.”
“아…… 그랬나.”
하긴.
나라도 그 정도면 연구를 하겠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학을 떼는 것도 이해가 가고.
“혹시 네 목표가 감찰원이야?”
“걔들도 포함. 그냥 천사 새끼들은 다 죽여 버릴 거야.”
아까 천사들 목을 날려버릴 때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얘도 마왕은 마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진정하고. 앞서 일부터 처리하자고.”
한참을 걸어오자 어느새 눈앞에 베르가 공작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한 차례 전쟁을 치르고 지나간 거친 흔적이 베르가 공작가 외곽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
딱히 주변에 우리를 방해할만한 녀석들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여기는 제물의 결계가 없었다.
좀 더 안쪽으로 가야 보일 테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천사의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대천사의 가호 역시 사라졌다.
“응? 왜?”
마왕 헤르게니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보자 은신 망토를 꺼내 들어 건네주면서 말했다.
챠밍은 알아서 꺼내더니 바로 착용했다.
곧 챠밍이 은신 상태로 모습을 감추었다.
“난 필요 없는데?”
“앞으로 힘쓸 일 많을 텐데 아껴둬.”
마왕을 걱정해주는 것도 웃기긴 한데.
여기서 전투가 일어나게 되면 믿을만한 건 마왕 헤르게니아 뿐이었다.
직접 무력으로 천사를 찍어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
“흐응? 알았어.”
곧 셋 다 망토를 둘러쓰고는 은신한 상태로 베르가 공작가로 침투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들어가다 보니 베르가 공작가와 장로회가 싸우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각에도 수많은 병력과 유저들이 얽혀서 싸우는지 일일이 구분하는 것도 어려워 감각을 내리눌렀다.
“어때? 결계가 보여?”
“응. 여기서부터네.”
마왕 헤르게니아가 어느 지점에 가서 딱 서더니 손을 뻗어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었다.
더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나와 챠밍이 제 자리에 멈춰 서자 잠시 그 결계 외곽을 살펴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곧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문제 있어?”
“문제는 아니야. 그런데 꽤 발칙한 짓을 해놨네.”
“쟤들이 이상한 짓을 해놨어?”
“응. 맞아. 그리고 이거 조건부 결계야.”
“조건부?”
“상징이 없으면 바깥으로 나올 수 없게 해놨네. 딱 천사 녀석들이 만들 만한 결계야.”
그러고 보니 전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던 결계 역시 조건부로 오갈 수 있었다.
그땐 대천사의 검으로 통과하긴 했는데.
이것 역시 구조가 비슷하려나.
“들어가는 건 문제없고?”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빠져나올 수 있는 상징이라…….
“아마 베르가 공작가 쪽은 상징이 있겠네.”
베르가 공작가 전원이 가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중요 인원들은 그 상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나오려면 상징이 문제이려나.
그렇다는 말은.
저 베르가 공작가의 병력 중 일부를 죽여서 뺏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안에 들어가서 몇 놈 죽여야겠는데?”
적어도 들어갔다 나오지 못하는 상황은 발생하면 안 되니까.
상징을 가지고 있을 만한 녀석을 죽이다 보면 상징을 구할 수 있을 터.
정체가 중간에 드러나긴 하겠지만.
어차피 서로 치고받는다고 정신이 팔려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내가 죽여줘?”
“그래주면 더 좋고.”
누구도 모르게 한 방에 죽이려면 마왕 헤르게니아가 훨씬 낫겠지.
은신을 다시 유지할 수 있을 테고.
그런데 그때 주변을 살펴보면 챠밍이 어디론가 달려가 허리를 숙이더니 바닥에서 뭔가를 잡아들었다.
그리고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신나하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오빠! 여기!”
“어?”
“헤에……?”
지금 챠밍이 잡아 손에 들어 올린 건.
바로 그 우리가 찾던 상징이었다.
곧 챠밍이 다른 걸 발견했는지 바로 옆으로 뛰어가 상징을 잡아 올리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 또 있어요!”
챠밍이 두 손에 든 세 개의 상징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했어.”
“더 주울까요?”
그 말에 주변을 돌아보니 베르가 공작가의 병력들이 죽어서 남긴 상징이 제법 눈에 들어왔다.
왜 이걸 모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관심이 없을 땐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래. 나도 같이 줍자.”
내가 줍기 시작하자 곧 마왕 헤르게니아까지 달려들어 주변에 있는 상징을 모조리 주워들었다.
“대충 오십 개쯤 되네.”
여기서 싸워 죽은 인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였다.
나머지는 이미 사라진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한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결국 안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들어가자.”
곧 셋이 제물의 결계 안으로 들어가자 주변과 공간이 단절되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챠밍도 같은 걸 느꼈는지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안과 밖이 다른 것 같아요.”
마왕 헤르게니아는 확실히 아는 듯 했고.
“완전히 갈라졌어.”
역시 그런 건가.
은신한 상태로 베르가 공작가 주변을 돌다 보니 곳곳에 쓰러진 병력과 유저들의 시신들이 보였다.
문제는.
원래는 사라졌어야 하는 시신이 그대로 남아 바닥의 이상한 마법진에 피를 빨리고 있다는 점이려나.
“이게…….”
“응. 제물이 되어가는 중이지.”
그리고 그 피는 바닥을 타고 어디론가 쭉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베르가 공작가의 중심으로.
그렇게 쭉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발견할 수 있었다.
저택 앞에 세워진 긴 보석 형태의 기둥을.
공작가 곳곳에서 빨려온 피는 모두 그 기둥으로 흡수되어 점점 진한 색으로 변해갔다.
저렇게까지 시뻘겋게 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흡수한 거지?
마왕 헤르게니아가 그 광경을 보고는 말했다.
“저게 오벨리스크야. 피의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체이기도 하고.”
“그럼 저것만 있으면?”
“맞아. 막대한 힘을 가질 수 있어.”
마왕 헤르게니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게 누가 되든지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