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286화 (1,286/1,404)

#1286화 제물의 결계 (5)

제물의 결계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결계를 구축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을 가진 천사.

그리고 그 결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소모되는 동력이 필요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추는 건 최상급 천사들에게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결계는 자신들이 구축하고.

헤르마늄 광석은 자신들이 차지한 왕국을 통해서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

과연 이 결계가 제대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한 의문.

천사들 사이에서도 금지되었다는 뜻은.

곧 상당히 오랜 기간 쓰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물의 결계가 잘 작동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처음에는 베르가 공작가에 쓴 제물의 결계가 그 실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내전은 우리에게도 그렇고 천사들에게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내전에서 급하게 실험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무리가 있었다.

안정성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제물의 결계를 썼다가 혹여라도 잘못되면?

그럼 타란 제국 황제가 이 실패를 웃기만 하고 넘어갈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최상급 천사 마엘리타 입장에서도 이번 작전은 무조건 성공시켜야 했다.

타란 제국 황제과 거래를 제대로 하려면 말이지.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타란 제국 황제를 구슬리는 건.

그간 봐온 황제 녀석을 생각해보면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럼 답은 하나다.

이미 어딘가에서 이 제물의 결계를 실험해봤다는 것.

그런데 이 금지된 결계를 다른 대천사나 최상급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쓸 수 있었을까?

이건 아예 불가능하지.

시도해보기도 전에 잡혀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금지된 제물의 결계를 쓰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쓰더라도 다른 천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자신들의 영역이 필요했다.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곳은.

딱 하나뿐.

중급 천사 녀석에게 이미 제물의 결계를 써봤냐고 물어보자 녀석의 얼굴이 차마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사색이 되었다.

“그…… 그건…….”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중급 천사에게 마왕 헤르게니아가 협박하듯 말했다.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바로 목 날아 간다?”

그러면서 손날로 자신의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자 중급 천사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그리고는 바로 납작 엎드리면서 이실직고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그…… 제물의 결계. 방금 대천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써버렸습니다.”

“오르가 왕국, 크록스 왕국, 테난 왕국에 말이지?”

그 말에 중급 천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하급 천사들이 아예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중이었다.

녀석들이 보기에는 난 대천사다.

그리고 옆에 있는 마왕 헤르게니아는 부관이라 불렸으니 최소 최상급 천사로 보일 테고.

그런 우리에게 제물의 결계를 썼다고 고하는 것 자체가.

바로 목이 날아가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피식 웃으면서 중급 천사의 머리를 잡아채더니 위로 확 들어 올렸다.

“컥.”

“잘 들어. 난 중앙 천사군 감찰원 소속이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그 말을 하자마자 중급 천사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러났다.

“감찰원……!”

나야 천사군의 편제 같은 건 관심이 없어서 모르지만.

마왕 헤르게니아는 늘 상 마주쳤으니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중급 천사의 저 반응만 보면.

감찰원이라는 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였고.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이름만 듣자마자 부들부들 떨 이유가 없었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 쪽을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쪽 분은 감찰원 수장인 대천사이시고.”

심지어 이번엔 감찰원 수장까지 등장했다.

“그러니까. 너네들 여기서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다 죽는 거야.”

“사…… 살려주십시오.”

잠시 중급 천사를 내려다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말을 이었다.

“감찰원인 우리가 왜 이런 후방 지역까지 왔을까?”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의 질문에 중급 천사의 두 눈이 계속 좌우로 흔들렸다.

지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쭉 설명해야 하는 판이라.

여기서 까딱 한 마디 잘못하면.

바로 목이 날아간다.

“제물의 결계…… 입니까?”

“아. 그것도 있고.”

“설마 헤르마늄을 빼돌린 건으로…….”

“그거 빼돌린 건 너무 자잘하니 넘어가는 걸로 하고. 어차피 천사군에 들어올 물량은 표 안 나게 채워 보냈을 거 아냐.”

그동안 이 녀석들이 빼돌린 헤르마늄 광석의 양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천사군에 들키지 않을 걸 보면.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대로 천사군 자체에 들어가던 물량은 어떻게든 채워 넣은 듯 했다.

이건 추가로 헤르마늄 광산을 더 돌리면 되는 문제라.

그렇게 빼돌리는 물량까지는 천사들이 직접 와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었을 테지.

사실 제물의 결계도 그렇고 헤르마늄을 뒤로 빼돌린 것 역시 천사군에서 알게 되면 목이 날아가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런데도 마왕 헤르게니아는 계속 넘기기만 했다.

흐음.

무슨 생각이지?

저런 일들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자 오히려 내 쪽에서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왜…….”

“너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아?”

중급 천사가 차마 말을 못하고 버티자 잔인하게 웃음을 짓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손을 한 차례 옆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간 뭔가의 기운이 뒤에 엎드리고 있던 하급 천사들 중 하나의 목을 날려버렸다.

샤각!!

촤아악!!

아주 깔끔하게 목이 날아간 하급 천사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죽음에 중급 천사들은 물론 하급 천사들까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목 날아간다고.”

그동안 얌전히 있어서 잊고 있는데.

저걸 보니 확실히 마왕은 마왕이네.

천사 하나 죽이는데 거침이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마왕이 제일 할 법한 행동이려나?

슬쩍 챠밍을 보면서 말했다.

<주호> 쟤 무슨 생각이지?

<챠밍> 아마 저들이 더 숨기고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주호> 만약 숨기는 게 없다면?

그러자 챠밍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챠밍> 그럼 별 일없이 끝나겠죠?

마왕 헤르게니아도 그렇지만 챠밍 역시 천사들 목숨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사실 나 역시도 그러니 할 말이 없긴 하네.

방금 눈앞에서 천사의 목이 날아갔지만 딱히 감흥이 없었다.

그보다는 녀석들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과연 목이 날아가도 비밀을 지킬 것인가.

아님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지.

그런데 그때.

중급 천사가 아닌 엎드려있던 하급 천사가 고개를 들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설마…… 귀족가 자제분들의 실종을 조사하러 나오신 겁니까?”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중급 천사가 하급 천사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마왕 헤르게니아의 손에 그 시도는 바로 저지됐다.

빠르게 중급 천사의 목을 틀어쥔 마왕 헤르게니아가 매우 관심 있다는 듯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움직이면 목 날아간다.”

“으…….”

그리고는 하급 천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너. 계속 말해 봐.”

“아…… 그러니까. 최상급 천사 마엘리타와 문제가 있었던 자제분들이 있었습니다만……”

있었다?

분명히 마엘리타가 그들을 두들겨 팼다고 했던가?

이유야 모르겠지만.

그리고 하급 천사의 저 있었다라는 말이 묘한 늬앙스를 풍겼다.

보통은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마왕 헤르게니아는 듣자 말자 알겠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마엘리타가 싹 다 죽였구나?”

마왕 헤르게니아는 중간 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바로 결론에 도달해 버렸다.

죽였다는 결론 말이지.

심지어 이 결론은.

저들의 샛노랗게 변한 얼굴들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이미 표정에서부터 다 드러났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피식 웃더니 다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제물의 결계를 써서 마엘리타가 그 녀석들의 힘을 흡수했겠네?”

마치 앞에서 다 봤다는 듯 너무 정확하게 맞추자 그들도 할 말이 없어진 듯 허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건 망했다는 딱 그런 눈빛이려나.

곧 마왕 헤르게니아가 나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들어?”

“괜찮네.”

아마 녀석들이 계속 숨기려고 들었으면.

이건 절대 밝혀내지 못 했을 수도 있었다.

제물의 결계까지도 말한 녀석들이.

끝까지 숨기려했던 모양이라.

그리고는 마왕 헤르게니아가 감탄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마엘리타라는 애. 상당히 마음에 드는데?”

“그래?”

의외네.

마왕 헤르게니아의 입에서 천사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자기를 건든 녀석들은 끝까지 따라가서 목을 따버리잖아. 얼마나 좋아?”

“뭐…… 나쁘진 않네.”

그리고 아마 마왕이라는 입장에서는 그 성향상 아주 좋아할 만한 성향이기도 할 것이다.

“금지된 마법도 눈치 안 보고 막 쓰고. 걔 마왕군에 있었으면 대성할 녀석이겠어.”

“스카웃이라도 하려고?”

“그러네. 정말 데려가서 키워볼까?”

그런데 우리 둘의 대화를 정작 앞에 있던 중급 천사와 하급 천사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왕군이 나오지를 않나.

스카웃이 어쩌고 하니까.

이건 대천사와 최상급 천사들이 포함된 감찰원에서 언급할 만한 대화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뭔가 잘 못 됐다는 걸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 마왕 헤르게니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지나가는 돌멩이 보듯이 하찮게 쳐다보는 그 모습은 마왕의 그것과 딱 맞아 보였다.

“밑에 애들 관리가 엉망이야. 비밀을 아는 녀석들도 너무 많고. 심지어 입도 가볍네.”

“네?”

“무슨……?”

그런 의문을 가지는 순간.

마왕 헤르게니아의 팔이 좌우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남아 있던 중급 천사와 하급 천사들의 목이 깔끔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풀썩!

목이 떨어진 모든 천사들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고.

다시 마왕 헤르게니아가 손을 뻗자 그들의 신체가 한 줌의 모래처럼 그 자리에서 녹아 내려버렸다.

좀 전까지 이곳에 천사들이 있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물었다.

“처음부터 처리할 생각이었어?”

“응. 그 마엘리타라는 애. 추진력은 좋은데 마무리가 영 별로야.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런가?”

“살려두면 써먹을 데도 있을 텐데?”

그런 내 말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전혀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당장 마주친 지 몇 분 안 된 내가 바로 알아낸걸. 감찰원 녀석들이 못 알아낼 것 같아?”

“결국 살려두면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네.”

“어쩌면 이미 추적하고 있을 수도.”

“그건 꽤 귀찮겠네.”

“그러니 싹을 잘라내야지.”

천사 녀석들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감찰원은 또 뭐야?”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천사들 위에 군림하는 상위 기구 중에 하나야. 같은 천사들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최상위 집단이기도 하고.”

“뭐 대충 알겠네.”

천사군에서 권력과 힘이 모조리 집결되어 있는 그런 기구라는 뜻이었다.

아까 그 천사들이 벌벌 떨었던 이유까지도.

확실히 감찰원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천사들 사이에 어지간한 일은 다 해결될 것 같았다.

“그 감찰원이라는 거. 계속 써먹을 거야?”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무슨 걱정이야? 우리에게는 무려 대천사가 있는데.”

이런.

하다 보니 이젠 사기까지 치게 생겼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