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275화 (1,275/1,404)

#1275화 분열 (7)

우리가 베르탈륨 광석을 계약서에 적힌 물량만큼 구해왔다고 하자 베르가 공작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아마 베르가 공작은 분명 우리가 베르탈륨 광석 공급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불공정에 가까운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그것도 우리가 굉장히 유리한 계약을 말이지.

통상적으로 이렇게 불리한 계약을 허가해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그만큼 베르가 공작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절대 물량을 구해오지 못할 것이라 믿었을 터.

베르가 공작은 설마 장로회가 사 갔던 물량을 그대로 우리에게 다시 내어줄 것이라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까.

당황한 모습을 내비치던 베르가 공작이 애써 표정을 숨기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흠. 진짜 구해왔단 말인가.”

우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만한 물량을 그 짧은 시간에 다시 구해온다는 게 베르가 공작의 상식에서는 설명이 안 될 테니.

장로회가 가져간 물량을 이 녀석이 떠올리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못 믿겠습니까?”

그러면서 베르가 공작의 눈앞에 계약서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정해진 물량을 계약 기간 내 구해오면 바로 대영토를 넘겨준다는.

터무니없는 계약서가 내 손에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계약서를 본 베르가 공작의 표정이 바로 썩어버렸다.

계약서가 있는 이상.

심지어 퀘스트로 묶여 있는 이상은.

베르가 공작은 무조건 우리에게 대영토를 토해내야 한다.

“흠…… 확인부터 하지.”

화련이 그 모습을 보고는 내게 말했다.

<화련> 어지간히 안 믿기나 보네.

<주호> 공작이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니까요.

급한 대로 베르탈륨 광석 공급을 받다가 계약서를 파기해버릴 생각이었을 텐데…….

그런 베르가 공작의 바람은 우리가 베르탈륨 광석을 꺼내놓는 순간 바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상당한 양의 베르탈륨 광석이 옆에 쌓이자 베르가 공작에게 말했다.

“여긴 더 꺼내놓을 공간이 없는데. 계속 해볼까요?”

“으음…….”

이미 내놓은 베르탈륨 광석의 양만 봐도 우리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대체 어떻게…….”

우리도 장로회에서 다시 사 왔다라고 말할 순 없기 때문에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화련이 직접 거래를 하는 순간.

위약금으로 열 배를 물어야 하니까.

그럼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

“과정이 중요한가요?”

“……아니지.”

베르가 공작도 자신이 물어본 게 말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구해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구해온 방법을 논할 이유는 없으니.

표정을 굳히고 있던 베르가 공작이 짧게 한숨을 쉬더니 곧 우리에게 말을 꺼냈다.

“흠. 자네도 봤다시피 이미 베르탈륨 광석의 공급은 충분하다네.”

그러면서 창 너머로 성대한 환영회가 열리고 있는 행렬을 가리켰다.

카샤스 대공군에게서 베르탈륨 광산을 수호해낸 영웅들이라고 해야 하나?

저들 덕분에 타란 제국의 베르탈륨 광석 공급은 문제가 없어졌다.

당연히 우리와의 계약으로 받을 베르탈륨 광석은.

지금의 베르가 공작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다른 공급처가 생겼으니.

굳이 우리에게 매달릴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베르가 공작의 사정일 뿐.

슬쩍 화련을 쳐다보자 화련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면서 베르가 공작에게 말했다.

“그럼 공작 측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어요?”

화련의 으름장에 베르가 공작이 엄청나게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쪽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는.

패널티가 어마어마하다.

특히 지금처럼 계약 규모가 클수록.

그 패널티는 상상을 초월한다.

보상으로 걸려있는 계약물이 대영토 수준이라면.

여기에 몇 배의 패널티가 걸릴 경우.

베르가 공작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도.

바로 파산이다.

대영토 값어치의 몇 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토해내야 하니까.

한 마디로.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이 계약서는.

베르가 공작의 목숨줄이나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계약서 내용대로 계약을 잘 이행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크흠…….”

이미 베르탈륨 광석의 공급은 원활한데.

굳이 받아도 되지 않을 물량을 우리에게 추가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아주 비싼 값을 치르면서 말이지.

베르가 공작 입장에서는.

이 계약을 어떻게든 무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계약은 파기가 안 된다.

퀘스트에 묶여 있는 계약이기 때문에.

물론 딱 하나의 방법이 남아있긴 했다.

과연 베르가 공작이 그렇게까지 나올 것인가는 의문이긴 한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베르가 공작이 화련을 보고는 물었다.

“흠. 사실 계약 내용이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저 말을 하는 베르가 공작의 뜻은 하나다.

계약을 물리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겠다는 말이겠지.

그러자 화련이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 계약서를 다시 쓰자는 말씀은 아니겠죠? 대 타란 제국의 공작께서?”

“크흠!”

수천, 수만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는 타란 제국의 공작이 지금 화련의 한 마디에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어디 가서 누군가에게 말하면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공작 체면이 있지.

백작에게 휘둘리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화련과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자 베르가 공작이 결국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우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뻔뻔하게 대답했다.

“줄 수 없네.”

보상을 줄 수 없다라…….

이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지금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건가요? 공작?”

화련도 날이 선 채 받아치자 공작이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응접실 바깥에서 수십에 달하는 용기사들이 동시에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들어와서 아무 말도 없이 우리를 포위하는 걸 보면.

만에 하나를 위해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화련이 얼굴에 짜증을 가득 표하며 베르가 공작을 보며 외쳤다.

“베르가 공작! 이게 무슨 짓이죠?”

“난 화련 백작에게 충분히 기회를 준 것 같군. 내 말대로 계약을 다시 썼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챠밍이 바로 아이셔스 스태프를 꺼내 들고 마법을 시전 할 준비를 했다.

화련은 무기를 꺼내 들진 않았지만 언제든지 싸울 수 있게 베르가 공작을 노려보았고.

사방을 포위한 용기사단과.

눈앞에는 타란 제국의 영웅 중에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베르가 공작이 있었다.

우리가 싸워서 해결할만한 전력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때 내가 나서서 손바닥을 마주치며 박수를 쳤다.

짝!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어째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질 않습니까. 베르가 공작.”

“뭐?”

이미 베르가 공작의 저택을 들어오기 전부터 감각을 사방으로 퍼트려둔 상태였다.

그리고 이 저택에 수많은 용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와서 준비를 했든.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든.

어쨌든 베르가 공작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놓은 셈이었다.

“과연 우리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여기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 확고한 말에 베르가 공작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말은…… 다 알고서 들어왔다?”

“호랑이 굴에 들어오는데 준비 없이 들어오는 건 죽여 달라는 뜻이겠죠.”

그 순간 응접실에 정적이 흘렀다.

보통 이렇게 용기사단이 포위를 하면 당황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오히려 베르가 공작 쪽에서 당황한 눈치였다.

“너.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일은 베르가 공작이 꾸미지 않았습니까. 계약을 했는데 보상을 해주기 싫다고 우리에게 깽판이나 부리고 있고요.”

그 말에 응접실에 들어왔던 용기사단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마 저들은 정확한 계약 내용은 모를 것이다.

그저 베르가 공작이 들어와서 우리를 포위하라고 하니까 한 거지.

어쩌면 죽이라는 명령까지 이미 내려놨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이곳에서 죽어버리면 계약은 이행하지 않아도 되니까.

용기사단들의 서로 눈짓으로 이게 맞냐는 듯 쳐다보자 베르가 공작이 손을 들었다.

“저들이 쓸데없이 말로 흘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그러자 용기사단들이 다시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무기를 꺼내 포위를 단단히 했다.

뭐 이 정도로는 저들을 흩어놓는 건 애초에 무리지.

그다지 관심 없다는 듯 앞의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베르가 공작에게 말했다.

“베르가 공작.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어딜 다녀왔다고 생각합니까?”

“무슨……?”

베르가 공작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자 아쉽다는 듯 답을 해주었다.

“장로회.”

그 말에 베르가 공작의 얼굴이 팍 굳어져 버렸다.

“너희가 장로회는 왜……?”

“아. 우리도 보험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랑이 굴에 들어오는데 말이죠.”

“그 말은…….”

“네. 이 계약. 장로회에서도 알고 있다는 것만 말해주고 싶네요.”

그리고는 잊었다는 듯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제때 보상을 받아 나가지 못한다면요.”

“못한다면……?”

“예상하고 있듯이. 장로회에서 나설 겁니다.”

화련은 백작이고.

타란 제국에서 베르가 공작을 위협할만한 위치가 되지 못 한다.

만약 베르가 공작이 배 째고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화련의 힘으로는 그걸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타란 제국은 힘과 권력이 곧 깡패인 나라니까.

거기다 황제가 대신 받아줄 리도 없고.

오히려 베르가 공작의 편을 들었으면 들었지.

화련에게 손을 들어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로회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타란 제국에서 베르가 공작을 견제할만한 유일한 세력이면서.

베르가 공작이 무시 못 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설마 장로회와 손을 잡은 것이냐?”

“음. 손을 잡았다니…… 어떻게 보면 비슷할 수도 있겠군요.”

사실 장로회는 우리가 이곳에 온 것조차 모른다.

자신들에게 판 베르탈륨 광석을 후려쳐서 싸게 되사오긴 했지만.

그걸 베르가 공작에게 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겠지.

알아도 딱히 좋을 것도 없고.

특히 화련은 그에 따른 패널티까지 있었다.

장로회에서 절대 좋아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베르가 공작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베르가 공작이 우리를 감금하거나 죽이게 되면. 장로회에서 직접 계약서를 이행할 겁니다.”

“뭐……?”

“그러니까 장로회에서 베르가 공작에게 계약 위반에 따른 위약금까지 전부 다 받아낼 거라고요. 아마 위약금을 내려면…… 베르가 공작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모자를 겁니다.”

계약 위약금은 대영토의 값어치에 수 배에 달한다.

베르가 공작이 지불할 수 있는 한도를 한참 뛰어넘겠지.

청천벽력 같은 내 친절한 설명에 베르가 공작이 이마에 손을 짚으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해도.

장로회는 그런 방식으로 절대 안 된다.

“그러면 타누스 후작께서 직접 수금하러 오시겠군요.”

거기다 장로회의 수장인 타누스 후작까지 언급하자 베르가 공작이 바로 인상을 쓰면서 이를 갈았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

느긋하게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용기사단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제 저들은 물려주시죠? 베르가 공작?”

그러자 한숨을 쉬며 베르가 공작을 손을 저었다.

다 나가라는 뜻이겠지.

눈치를 보던 용기사단이 우르르 바깥으로 나가자 베르가 공작에게 환한 미소와 함께 서류를 하나 들이밀었다.

이건 대영토를 영구히 넘겨주는 계약서였다.

“그럼 대영토는 잘 받아가겠습니다.”

감히 어디서 배를 째려고 들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