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화 용 수호자 (14)
“슬슬 빠지자.”
베르탈륨 광산 위를 날아다니는 용들을 흘깃 한 번 보고는 재중이 형이 신호하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통로를 통해 뒤로 빠졌다.
우리 팀들 역시 줄줄이 내 뒤를 따라 빠져나왔고.
카샤스 대공도 살짝 못마땅한 듯 우리를 보다가 이내 용기사단장들을 챙겨서 전투 장소를 빠져나왔다.
그런 우리를 고대 용기사들이 쫓으려다가 뭔가의 명령을 받는지 멈칫하더니 그대로 멈춰 버렸다.
통로를 달리다가 제자리에 멈춰 버린 고대 용기사들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안 쫓아오네요.”
저 고대 용기사들은 전부 용마족의 명령을 받는 소환된 존재들이었다.
당연히 용마족의 의향에 따라 움직일 테고.
당장 용마족 녀석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떨어져 나온 우리를 쫓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예상했던 대로 구역을 벗어나자 바로 용기사단장에게 알렸다.
“용기사단을 챙겨서 입구로 빠집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용기사단장에게 변한 점이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제국 황제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따라온 용기사단들이기에 나를 비롯해 우리 팀의 명령은 그다지 따르려고 하지 않았었다.
카샤스 대공이 있으니까 그나마 듣는 척이라도 했던 거지.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태도가 바뀐 상태였다.
옆에서 같이 달리던 재중이 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쟤들 말 잘 듣네.”
“정말 그렇네요. 전에는 듣는 척을 안 하더니.”
그러자 앞에서 달리는 전사 형이 잘 알겠다는 듯 답했다.
“너 싸우는 거 보고도 말 안 들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저 용마족하고 대등하게 싸우는 걸 눈앞에서 봤는데 말이야.”
“그런가요?”
“카샤스 대공만큼이나 잘 싸우는데 말 안 들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하하…….”
태도가 왜 저래 변했나 했더니.
옆에서 그들과 같이 싸웠던 전사 형은 진작 알고 있었던 듯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말 안 듣고 버티는 것보다야.
그렇게 안전지대까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돌아오자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안 된 건가요?”
레오나 에센시아와 아이샤 황녀.
그리고 그런 그들을 호위하고 있던 에센시아 제국의 기사단들까지.
기사단장 베인 테스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이나 이해했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첼은 우리를 못 따라가서 못마땅한지 볼멘 표정으로 바닥을 툭툭 차고만 있었다.
쟤도 전투를 해서 좀 키워야 하는데 말이지.
기회가 마땅치 않네.
단순히 기사단에 붙여서 데리고 다니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아, 일이 좀 있었어요.”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대답해 주자 이번엔 아이샤 황녀가 내게 물어왔다.
“방금 지진은…….”
“그건…… 카샤스 대공이 설명해줄 겁니다.”
아이샤 황녀는 카샤스 대공에게 떠넘기고는 좀 기다리자 곧 용기사단장들이 자신들의 기사단을 모두 챙겨서 안전지대까지 돌아왔다.
카샤스 대공이 그들에게 물었다.
“사상자는?”
“몇 명 다치긴 했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부상자는 막내별과 챠밍이 나서서 바로 힐을 넣어주자 바로 회복되었다.
다행히 죽어서 고대 용기사들처럼 언데드로 되진 않았다.
“추격은요?”
추격이라는 물음에 용기사단장 중 대표인 테이먼 타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따라오다가 더 붙지 않더군요.”
“역시 그렇습니까.”
예상했다는 듯 말하자 그도 이미 본 광경이 있어서 그런지 딱히 더 물어 오진 않았다.
“자. 우린 이제 이곳에서 철수합니다.”
철수라는 말에 용기사단들이 환호로 보답했다.
“휴. 진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으. 다신 오기 싫군요.”
그런 그들을 향해 한마디 말을 건넸다.
“아. 그렇다고 집에 가는 건 아닙니다.”
좋다가 말았다는 듯 실망하는 그들에게 다시 말했다.
“황제의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
황제를 언급하자 그들 모두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안다.
황제파들과 장로원에 속한 이들의 관계가 그다지 좋진 않다는 것을.
그러자 다들 상황이 파악된 듯 일제히 카샤스 대공을 쳐다보았다.
지금 가장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게 카샤스 대공이니까.
정말 후퇴해도 되는 건가 묻고 싶은 거겠지.
그런 그들에게는 내가 설명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린 싸우진 않을 겁니다.”
“그럼……?”
웅성대는 그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은 지켜보죠.”
* * * * *
안전지대에서 기다린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련에게서 연락이 왔다.
<화련> 어디야?
<주호> 다 왔어요?
<화련> 그래. 이미 도착했어.
타란 제국의 황제가 움직이는데 감히 귀족 중 하나인 화련이 빠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옆 영지를 담당하는 귀족인데 말이지.
갔다가 고스란히 다시 돌아오는 수고를 더했지만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덕분에 우리도 정보를 바로 받아볼 수 있었고.
지하인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 순 없으니.
<주호> 군대가 광산으로 바로 내려옵니까?
<화련> 아니. 이미 잘 뚫린 고속도로가 있는데 뭐하러?
화련의 대답에 옆에서 재중이 형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역시 예상대로인가?”
“네. 그런가 보네요.”
군대가 오기 전부터 생각했던 게 있었다.
과연 저들이 얌전히 입구로 내려올 것인가.
하지만 재중이 형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화련이 말한 대로.
용마포로 뚫어버린 넓은 공간으로 편하게 내려올 수 있는데 굳이 입구로 올 이유는 없다면서.
<화련> 지금 모든 용기사들이 대기 중이야. 타란 제국의 영웅에 속하는 녀석들도 함께.
<주호> 그만큼 신중을 기하는 거겠죠.
<화련> 아. 그리고 카샤스 대공이 후퇴했다는 소식까지 다 전해졌어.
<주호> 꽤 빠르네요. 그런데도 들어온대요?
<화련> 그래. 성공만 하면 황제가 카샤스 대공보다 낫다는 걸 확실히 증명할 수 있으니까. 황제에게 이보다 끌리는 전장은 없을 거야.
이것 역시 예상했던 바였다.
딱히 제국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는.
카샤스 대공을 눌러 버릴 생각이 더 큰 상태였다.
<주호> 장로원에서는 어떻게 한데요?
<화련> 뭘 어째? 황제가 까라면 까야지. 중간에서 눈치는 보는 모양이다만.
역시 그런가.
<화련> 그보다 쟤들 겁도 없네. 카샤스 대공이 못 잡은 걸 잡으려고 설치다니.
화련도 잘 알고 있었다.
카샤스 대공이 성마대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영웅 중에 한 명이라는 것을.
그런 카샤스 대공이 어쩌지 못하는 용마족을 상대로 저 짓을 벌인다는 사실 자체가 화련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주호> 카샤스 대공이 아직 풀 파워가 아니긴 하죠. 그러니까 잘하면 정말 잡을 수도 있겠죠.
<화련> 타란 제국을 죄다 갈아 넣어서?
<주호> 하하…….
솔직히 내 생각도 화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련> 그런데 카샤스 대공도 같이 싸우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주호> 아뇨. 황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화련> 그래?
<주호> 화련이 말했잖아요. 자신이 더 낫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하는데 카샤스 대공이 끼면 그림이 이상해지잖아요.
<화련> 그러게. 오히려 안 가는 게 도와주는 거려나?
<주호> 네. 그래서 가만히 있으려고요. 대놓고 오지 말라는데 굳이 끼어서 불청객이 될 필요는 없죠.
내 말을 다 듣고 난 뒤 화련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화련> 하. 손도 안 대고 코 풀 생각이야?
역시 화련도 눈치 하나는 상당한 편이었다.
<주호> 생각대로 잘 풀린다면요.
우리가 싸우기에 번거로운 상대를 대신 싸워 준다는데.
말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환영이지.
<화련> 아무튼 알았어.
<주호> 아. 그리고 미리 말해 둘게요. 전투는 능력껏 빠져요. 절대 싸우지 말고요.
이미 싸워 봐서 안다.
괜히 끼어들어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것 역시도.
<화련> 알아. 저런 미친 짓에 우리 애들 갈아 넣을 생각도 없으니까.
<주호> 맞다. 가능하면 영상 정도는 보내주실 수 있죠?
<화련> 뭐 귀여운 짓 한다고 그런 것까지 보내줘?
<주호> 하하. 좀 부탁드립니다.
<화련> 마음에도 없는 아부는 됐고. 애들 시켜서 보여줄게.
베르탈륨 광산이 계속 폭발음에 쿵쿵거리는 걸 봐서는 이미 전투가 시작된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시간으로 영상이 연결되었다.
전사 형과 나르샤 누나, 챠밍, 이쁜소녀, 막내별이 모두 내 옆에 둘러앉아서 그 영상을 구경했다.
타란 제국의 용기사단이 용마족을 상대로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다들 궁금한 모양이었다.
보이는 영상에는 베르탈륨 광산의 공중 시점이었는데.
주변으로 수많은 비공정들과 하늘을 빽빽하게 채운 용들이 정신 없이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저 비공정과 용들에 전부 병력이 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병력을 끌고 온 셈이었다.
아마 고대 마룡을 상대하려고 모은 병력일 텐데.
이런 식으로 써도 되나 모르겠다만.
어차피 내 것도 아니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때 챠밍이 궁금한지 내게 물어왔다.
“오빠. 그런데 카샤스 대공은 어떻게 과거에 저 용마족을 이긴 걸까요?”
“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
분명히 고대 마룡을 지키고 있던 용마족을 눌렀으니까 고대 마룡을 테이밍하던가 했을 것이다.
용을 수호하는 수호자를 잡지 않고서야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전의 전투를 생각해 볼 때 딱히 카샤스 대공에게 자격이 있진 않았으니 분명히 싸워서 이겼을 테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인벤에 있는 용신검이 생각났다.
“역시 용신검이려나…….”
앞뒤 관계를 따져보면 고대 마룡은 용마족을 이기고 난 뒤가 되니까 용신검만을 가지고 저 용마족을 눌렀다는 뜻이 된다.
흐음.
용신검을 들었을 때 그만한 스펙업을 하진 못했던 것 같은데…….
역시 카샤스 대공이 들면 뭔가 다른 건가 싶기도 하고.
다음에 카샤스 대공 없이 한 번 꺼내 볼까?
어쩌면 정말 용신검이 키가 될 수도…….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영상 속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늘을 날던 수많은 용들이 명령이 떨어지자 용마포에 뚫린 넓은 공간을 통해 베르탈륨 광산 지하로 일제히 낙하해 내려갔다.
재중이 형이 그걸 지켜보더니 말했다.
“흐음. 일단 쪽수로 용마족의 힘을 빼보겠다는 건가?”
“그런 모양이네요.”
“보자. 대략 천 기는 넘어가는 것 같고. 꽤 들이붓네. 황제가.”
무려 용만 천여 마리였다.
그 위에 타고 있을 전력까지 생각해보면 어지간한 왕국 하나는 바로 날려버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병력은.
채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베르탈륨 광산 지하 바닥에 처박혀버렸다.
전사 형이 깜짝 놀란 듯 외쳤다.
“와…… 저 녀석. 우리하고 싸울 때 봐준 겁니까?”
재중이 형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에 헤르게니아가 말한 게 나왔네.”
그러자 나와 전사 형이 동시에 말했다.
“초고속 기동.”
“초고속 기동.”
“그래. 용마족이 하늘을 편하게 날게 두면 얼마나 무서운지. 이제 좀 알겠네.”
그야말로 용마족의 쇼타임이었다.
눈으로 좇기 힘들 속도로.
그것도 공중에서 방향을 자유자재로 급격히 꺾어가면서 변형된 비늘검들을 휘둘러 날아다니는 용들의 목과 날개를 죄다 분질러놓거나 잘라 버렸다.
심지어 속도에서 완전 앞서다 보니 아예 뒤쪽에서 따라잡아 용기사들의 허리를 통째로 갈라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끝도 없이 우수수 추락해 지하로 처박히는 용들을 보고는 전사 형이 놀란 눈빛으로 혀를 내둘렀다.
“타란 제국의 용들이 용마족의 움직임을 전혀 따라잡질 못하는군요. 이건 거의 애들과 어른 싸움인데요?”
그것도 모자라 광산 위 공중에서 대기 중이던 비공정들 또한 뭔가의 번쩍이는 공격이 터질 때마다 하나둘씩 추락해서 박살 나는 모습도 보였다.
저런 먼 거리에서 한 번에 비공정을 갈라버릴 정도의 위력이라…….
얼핏 보기엔 거의 소형 용마포라고 해야 하나?
그때 화련에게서 연락이 왔다.
<화련> 저게…… 대체 뭐야……?
화련조차 놀랐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샤스 대공에게 돌아갔다.
너…….
대체 저걸 무슨 수로 잡았던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