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8화 고대 마룡의 둥지 (15)
분명히 화련은 3층에서의 사냥이 힘드니 차라리 4층까지 내려갈 것을 권유했었다.
자신들이 직접 사냥을 해봤으니 이 3층이 얼마나 사냥하기 어려운 환경인지 잘 알고 있었을 터.
만약 3층의 모든 방들이 유저들로 가득해서 용아병 마법사들이 리젠되는 족족 잡아내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유저들 자체가 없었다.
입구서부터 하나만 건드리면 줄줄이 딸려오는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도 벅찬 환경이라는 거지.
그런데 이런 3층에서 사냥한 것도 모자라.
아예 드랍템을 가득 쏟아내자 화련의 표정이 대번에 놀람으로 굳어져버렸다.
무엇보다도 그 드랍템의 양 자체가 상식을 초월하는 양이었다.
어지간히 잡아대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화련이 우리가 늘어놓은 아이템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이건 고작 방 몇 개 털어서 나올 분량이 아닌데?”
“음. 좀 많긴 하죠.”
많다는 내 말에 화련의 눈가에서 살짝 경련이 일어났다.
또 뭔가를 본 건가?
“잡템이 없잖아.”
“아…… 없죠. 잡템은.”
확실히 화련의 말이 맞았다.
사냥하다 보니 자리가 없어서 잡템은 죄다 바닥에 던져 버렸으니까.
보통 사냥을 하면 잡템이 훨씬 많이 나온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잡템이지.
그런데 그 잡템이 없고 죄다 완제품에 악세서리. 강화석 등등.
누가 봐도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들만 즐비했다.
“설마…… 3층을 전부 다 쓸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순간 내 시선이 화련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돌렸다.
“딴청 부리지 말고!”
“흠.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하…… 어쩐지 너무 많더라니.”
그러다 화련이 마왕 헤르게니아 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화련> 마왕이 도와준 거야?
<주호> 그럼 드랍템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죠. 그리고 마왕이 유저들 사냥을 굳이 도와줄 리도 없잖아요.
<화련> 하아…… 말이 안 되긴 하네. 유저들처럼 레벨업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음.
마왕 헤르게니아는 그쪽 말고 다른 쪽으로는 욕심이 있는데.
이걸 대놓고 화련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10강 무기 강화석이 나온다는 것도.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휴. 어쨌든 알겠어. 이것만 처분해 주면 되는 거야?”
“네. 자리가 없어서요.”
내 말에 다시 드랍템들을 바라본 화련이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일단…… 여기 있는 건 내가 다 살게.”
“그럼 좋고요.”
괜히 귀찮게 여러 과정 거칠 필요 없이 화련이 일괄 처리해 주면 우리야 땡큐다.
경매니 판매니 신경 쓰다 보면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거기다 화련이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죄다 현재 나오지 않은 상위 등급 템이니까.
“가격은 잘 쳐주면 좋겠네요.”
“알고 있어. 이것들 밖에선 구하기 힘든 거잖아. 특히 마법사용 장비랑 마법서들은 더.”
역시 화련은 이 드랍템들의 값어치를 잘 알고 있었다.
혼자서 다 들고 갈 수 없어서 몇 명의 유저를 더 데리고 왔는데 그들 역시 드랍템의 등급과 양을 보고는 깜짝 놀란 눈치였다.
화련 옆이라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비싸게 쳐줄게. 어차피 우리 애들이 써야 하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화련이 비싸게 쳐준다고 하면 일단은 믿을 만했다.
적어도 이런 걸로 후려칠 만한 인물은 절대 아니니까.
“그럼 부탁해놓고 가도 될까요?”
“이걸 그냥 두고 간다고?”
“아. 뭐 문제 있어요?”
“뭘 믿고 이만한 양을 그냥 두고 가? 내가 먹고 째면 어쩌게?”
“그럴 거예요?”
“장난해?”
“화련이니까 믿고 맡기는 거죠.”
우리 최대 고객님이신데 말이지.
겨우 이정도 돈 정도로는 흠집도 가지 않는다.
“하. 댔고. 못 보는 사이 입에 기름칠이 늘었네.”
“칭찬 감사합니다.”
잠시 나와 드랍템들을 빤히 바라보던 화련이 뭔가 떠올랐는지 살짝 인상을 쓰고서는 말을 꺼냈다.
“일을 좀 빠르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네? 무슨 뜻이죠?”
그러자 화련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지금 던전 밖에 타란 제국의 용기사들이 돌아다녀.”
“전부터 돌아다닌다고 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여기저기 조사한다고 용기사들일 영지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말은 듣긴 했었다.
꼭 여기 영지만 아니라 다른 영지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특별할 것은 없을 텐데?
“이번엔 달라. 뭔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아. 딱 이 부근만 돌아다닌다니까.”
“그래요? 확실히 그건 이상하네요.”
아직 타란 제국의 용기사들이 이곳을 발견할 순 없을 텐데?
이곳에 올 때 흔적도 남지 않게 잘 처리하고 와서 추적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렇다는 말은…….
“저쪽에도 뭔가 이곳에 대한 정보가 있었나 보네요.”
“그럴 수도 있어. 그동안 신경 쓰지 않다가 파니까 줄줄이 나오는 거겠지.”
흐음.
다른 말로 하면...
화련을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응. 이젠 한가하게 사냥만 하고 있을 순 없어. 용기사들이 여기 찾아내면…….”
“꽤 귀찮게 되겠죠.”
적어도 우리가 이곳을 정리하고 난 뒤에야 타란 제국의 용기사들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시기적으로 너무 빠른 감이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이곳을 들쑤시면 지금 같은 사냥은 물 건너 가게 된다.
타란 황제부터 시작해서 밑에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올 테니.
“좀 더 타이트하게 해야겠네요.”
내 말에 화련이 눈빛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3층보다 더 아래를 쓸어주면 안 돼?”
“4층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보다 더 아래면 더 좋고.”
아마 화련이 보기에는 우리가 더 아래층을 사냥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듯 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까지……?
그때 화련의 시선이 살짝 드랍템 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흐음.
그런 거였나?
“장비 때문에 그래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화련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말했다.
“응. 드랍템을 이렇게까지 빨리 모을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진작 말했을 거야.”
“그런가요.”
확실히 이곳 베르탈륨 광산에서 나오는 장비의 수준은 높은 편이었다.
지금 화련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보다 더.
아직 4층까지 내려가 있는 녀석이…….
“4층의 그 녀석은요?”
“아. 혼자 사냥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장비만 되면 우리도 더 내려갈 수 있고.”
“마지막을 알뜰하게 쓰라 이거죠?”
“그래. 아무리 카샤스 대공이 막아준다고는 해도 황제가 직접 나서면…….”
“꽤 귀찮아지겠죠.”
타란 제국 황제는 용기사들을 써서 최대한 빨리 최하층까지 내려가려고 할 것이다.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그랬듯이.
본인이 직접 올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대 마룡이 가시권에 들어오면 오기야 오겠지.
문득 궁금한 점이 있어서 화련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걔는 어떻게 4층까지 내려간 거죠?”
“응? 어떻게라니?”
“몇 번 몰아보니까 용아병들이 안 떨어지던데.”
“그거? 5층까지 냅다 뛰면 입구에서 떨어져 나가.”
“그래요?”
흠. 괜찮은 정보인데?
“5층에 뭐가 있나 봐요?”
“안전지대.”
“아. 그러면 말이 되네요.”
한 가지 궁금한 건 풀렸고.
“5층 아래로는 내려가 봤어요?”
“가 봤는데. 죽을 것 같아서 다시 올라왔어.”
“뭔가 있는데 그래요?”
내 물음에 화련이 다시 인상을 썼다.
“네임드.”
“중간층에 네임드가 있어요?”
“응. 그냥 보는 순간 알겠더라. 용기사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달라. 근처만 가도 오싹하던데.”
순간 마왕 헤르게니아 쪽을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전에 말한 그 어떤 존재가 5층 아래에 있는 듯했다.
“용케 빠져나오셨네요?”
“딱히 따라오진 않더라고. 그렇다고 통과시켜 줄 것 같지도 않고. 괜히 건드렸다가 사냥도 못할 것 같아서 일단 내버려 뒀거든.”
“흐음. 그런데 지금 그걸 잡아 달라는 말로 들리네요.”
“가능하다면 우리가 잡고 싶은데. 당장은 힘드니까.”
화련 쪽도 전력이 나쁘진 않지만.
이런 상위 던전에서 네임드라…….
만약 시간이 넉넉했다면 충분히 장비를 갖추고 들어갔어도 되겠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화련 말대로라면 여길 찾아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으니.
무엇보다 아쉬운 건 아직 용신검을 제대로 활성화시키지 못했다는 정도일까.
카샤스 대공에게 타란 제국 황제를 더 오래 묶어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아마 무리일 것 같고.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앞에서 용신검을 꺼낼 수 없다.
귀찮게 됐네 정말.
“일단은 알았어요.”
그렇게 화련과는 떨어진 뒤 다시 우리 팀을 모았다.
전사 형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5층 아래에 네임드가 있다는 말이지?”
“그런 것 같아요. 화련도 손 못 대고 돌아왔다는 걸 보면.”
아마 다른 상황이었다면 건드려보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성마대전 시대였다.
한 번만 실수해도 바로 아웃이니까.
아직 다시 들어올 방법이 없는 이상 모험적인 레이드는 가급적 피하는 게 맞았다.
상식적으로 보면 말이지.
오자마자 아크 드래곤을 잡은 우리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보나마나 강하겠네.”
“그렇겠죠. 아마 전에 타락 천사 네임드보다 강할 수도 있어요.”
내 말에 전사 형이 귓속말을 보냈다.
<방패전사> 설마 마왕보다 강하겠냐.
<주호> 흐음. 그건 모르죠.
<방패전사> 힌트 같은 건 없었어?
<주호> 음. 모르겠어요. 어두운 곳에서 흔적만 봤다고 하는데…….
<방패전사> 하는데?
<주호> 네임이 시뻘겋게 되어있다는 것 정도?
<방패전사> 화련 레벨이…… 흠. 그럼 아마도 그 네임드 최소 700~800대 정도 된다는 말인데?
<주호>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는 옆에 있는 마왕 헤르게니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방패전사> 아, 쟤는 거의 900이지.
<주호> 일단 마왕보다는 약하긴 하겠지만…… 장담은 못 해요. 여기서도 마왕 수준의 녀석이 봉인되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방패전사> 일단 4층 정도에서 사냥해야 하나?
<주호> 네. 안 그래도 우리 쪽 마왕님도 입이 짧아지셨죠.
처음에는 정제된 베르탈륨 광석으로 만족하는 듯 하다가 그것도 어느 정도 지나니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듯 했다.
<방패전사> 하긴 그렇게 많이 가져다 바쳤는데 말이야.
3층을 무지막지하게 쓸어 담다 보니 나오는 정제된 베르탈륨 광석도 상당했다.
당연히 그 베르탈륨 광석들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흡수할 만큼 해서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주호> 어차피 내려가야 했어요. 3층에서 얻을 만한 아이템들도 다 얻었고.
물론 오래 사냥하다 보면 10강 무기 강화석 같은 게 떡하니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녀석은 정말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 하나 나온 뒤로는 계속 나오지 않았으니.
아마 드랍률이 극악에 가까운 듯 했다.
이건 제대로 네임드를 사냥해서 얻으라는 뜻이겠지.
우연에 기대서 얻기에는 확률이 너무 저조해.
“그럼 한 번 내려가 보죠.”
* * * * *
4층으로 내려가자 화련이 말했던 대로 용기사들로 보이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안쪽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파공음들.
“화련의 에이스가 저쪽에 있나 보네요.”
내 시선이 멀리 통로 쪽을 가리키자 재중이 형도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 혼자 사냥이라……. 전에 그 녀석이 얼마나 컸나 기회 되면 한번 보고 싶은데?”
“곧 보겠죠.”
전사 형은 재중이 형에게 조금 다른 의미로 말했고.
“우리 애 아니니까 눈독 들이면 안 됩니다. 상도덕 어긋나면 싸움 나요.”
“누가 뭐랬나. 그냥 한 번 본다고.”
여기서도 나오는 인재 욕심이려나.
원래는 4층에서 사냥을 하기로 했지만.
막상 와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일단 확인부터.
마왕 헤르게니아가 말한 대로 여기 용기사들을 네크로멘시 할 수준의 괴물이 있다면…….
지금 알아두는 편이 좋았다.
아니면 아예 타란 제국의 용기사들을 앞세워서 들어가도 되긴 하는데…….
이쪽은 이쪽대로 문제일 테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후자가 맞긴 하지만.
“일단 한 번 내려가 봐요. 5층 아래에 뭐가 있는지.”
그리고는 곧장 통로를 따라 5층으로 내달렸다.
우리 팀도 날 따라서 쭉 달렸고.
몇몇의 용기사들이 따라 붙긴 했는데 어차피 당장 잡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5층으로 내려오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안전 지대에 도착하셨습니다. 》
곧 우리를 따라붙던 용기사 녀석들도 모두 흩어져 버렸다.
확실히 화련 말대로네.
아마 헤르마늄 광산 쪽도 이런 시스템이 있긴 했을 텐데.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도중 갑자기 마왕 헤르게니아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 팔을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더 들어가지 마.”
“응?”
곧 인상을 잔뜩 쓴 마왕 헤르게니아가 어둠 속을 강하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저게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