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9화 고대 마룡의 둥지 (6)
현재 이 성마시대에서 가장 강한 존재들을 뽑자면.
그중 마왕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천사 진영에서 그에 상응하는 존재가 대천사.
그리고 인간들 쪽에서는 최상위의 영웅 정도가 아닐까.
거기다 이미 우린 마왕 올펠과 붙어 본 적이 있어서 마왕이 어느 정도 강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화련의 말대로 마왕 스티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마왕 올펠을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일단은 사기라는 거지.
무엇보다 지금 내 눈앞의 마왕 헤르게니아는.
레벨이 무려 890이었다.
해맑게 웃으면서 마왕 헤르게니아가 물어보자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잡은 건데 알아서 해.”
‘솔직히 그거 상대하려면 우리가 더 피곤할 거 같으니까.’라는 말은 애써 하지 않았다.
곧 마왕 헤르게니아가 양 손바닥을 쭉 펴더니 그대로 크리스탈 리저드의 등딱지를 촘촘하게 둘러싼 비늘들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뭔가의 힘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쏴아아!!
그렇게 보랏빛 기운들이 크리스탈 리저드 전체에서 쭉 빨려나오는가 싶더니 그 전부가 빨려들 듯 마왕 헤르게니아의 전신을 통해 흡수가 되었다.
“얘는 좀 효율이 낫네.”
꽤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의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나왔다.
꼭 저러는 거 보면 그냥 영락없는 애 같은데…….
그때 크리스탈 리저드를 상대하기 위해 뛰어나갔던 전사 형이 혀를 내두르면서 감탄했다.
“와…… 저걸 한 방에 눌러 버리네.”
왠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듯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웃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탱커보다 앞서서 달려간 것도 모자라서 그냥 딜로 찍어 눌러서 경직을 만들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격차가 있어야 한다는 걸까.
애초에 유저와 마왕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긴 한데.
막상 눈앞에서 보고 나니 더욱 실감이 날 뿐이다.
그때 전사 형이 몰래 귓말을 보냈다.
<방패전사> 쟤. 마왕 올펠보다 강한 것 같지 않아?
<주호> 음. 아무래도 성마대전 시대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레벨도 더 높을 테고.
분명 마왕 헤르게니아는 이 시대에 가장 강한 마왕이 아니었다.
거기다 오랜 기간 동안 헤르마늄 광산에 갇혀 있어서 제대로 힘을 내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방이라…….
어쩌면 베르탈륨 광석을 꽤 흡수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의 환경이 그녀가 힘을 내기에 좋은 환경이라 그럴 수도 있으려나?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한 건.
과연 다른 마왕들도 저런 식으로 베르탈륨 광석으로 힘을 흡수할 수 있는가였다.
원래 시대에서는 애초에 베르탈륨 광산 자체가 없어서 그런 모습을 못 본 것도 있는데.
그간 지켜봤던 모든 마왕들.
그러니까 마왕 벨라, 마왕 시아트, 마왕 올펠…….
아니 마왕 올펠의 경우는 적으로밖에 못 봤으니 예외로 치고.
다른 마왕들은 근접해서 볼 기회가 많았는데도 저런 식으로 힘을 흡수하는 건 못 봤단 말이지.
그렇다는 건.
저게 혹시 마왕 헤르게니아만의 특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다른 마왕들도 다 할 수는 있는데 뭔가의 이유가 있어 굳이 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고.
이건 좀 알아봐야겠는데?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화련이 날 보면서 물었다.
“저 마왕.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음.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완전 핵폭탄을 옆에 데리고 다니는 거네.”
“뭐 그런 셈이겠죠.”
설마하니 화련도 저 크리스탈 리자드를 한 방에 눌러 버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좀 어이없어하는 모습이었다.
이제껏 상대하는 데 계속 애를 먹고 있었다는 저 크리스탈 리저드가 말이지.
“하. 1층 사냥터 자리 만들어 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건 너무 쉽잖아?”
조금은 허탈한 눈빛도 보였고.
그런데 화련의 눈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나 저 마왕 좀 빌려주면 안 될까?”
“……불가요.”
“아. 왜!!”
“진짜로 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아니.”
의외로 포기가 빠르네.
솔직히 잘 알지도 못하고 감당이 안 되는 물건은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다.
그러다 쪽박 차기 딱 좋으니까.
그사이 마왕 헤르게니아가 바닥에 눌러놓은 크리스탈 리저드의 베르탈륨 비늘에서 모든 마력을 흡수했는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내려왔다.
“아, 겨우 조금 찼네.”
“겨우야?”
“응. 아직 이걸로는 입가심도 안 돼.”
그때 전사 형이 우려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방패전사> 까딱 잘못하면 여기 있는 베르탈륨 광석들 쟤가 다 먹는 거 아냐?”
<주호> 설마요. 그렇게나 먹겠어요?
<방패전사> 그럼 차라리 저렇게 몬스터를 잡아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차피 리젠되니까.
<주호> 흐음. 그것도 방법이 되겠네요.
순간 화련과의 아까 전에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마왕을 빌려달라는 말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전사 형과의 대화를 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거 어쩌면 꿩 먹고 알 먹기가 되려나?
물론 당장 한다는 건 아니다.
아직은 그녀의 힘이 더 필요하니까.
그런데 의외로 마왕 헤르게니아가 크리스탈 리저드는 죽이지 않고 그대로 내려왔다.
“죽이는 거 아니었어요?”
“귀찮게 왜 죽여?”
흐음.
저 마왕 헤르게니아의 흡수 능력은 딱히 상대를 죽이지는 않아도 된다 이건가?
지금 자세히 보니 크리스탈 리저드의 비늘들이 전부 색이 바래져 푸석푸석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언제라도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그렇다는 말은…….
저 단단한 비늘 갑주가 아무런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잠깐만.”
그리고는 곧장 용신검 아스카론을 들고 힘을 잃고 쓰러져 있는 크리스탈 리저드의 앞에 섰다.
이게 과연 제대로 되려나 모르겠는데…….
일단 용신검의 옵션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용신검이 날 주인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뭐 그렇다고 용신검이 벼락을 내려서 날 어떻게 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직 그 쓸모가 없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만약 내가 보지 못하는 옵션들이 실제로 발휘가 된다면?
그것도 용신검이 딱 좋아할 만한 상황으로.
“이거 제가 마무리할게요.”
그러고는 곧장 용신검을 들어 크리스탈 리저드의 머리에 강하게 내리찍었다.
다소 반발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푸욱!!
너무 쉽게 크리스탈 리저드의 비늘을 뚫고 들어간 뒤 그대로 관통해서 안에 박혀 버렸다.
흐음.
이거 봐라?
아예 외장의 방어가 무력화된 수준인데?
그게 아니라면 이 용신검이 이 녀석의 방어력을 월등히 상회할 정도로 강할 때만 가능한데.
지금 이 녀석은 딱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아마도 전자가 맞을 것이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아예 외부 물리 방어력을 없애버린 것.
그게 단순히 마력을 흡수했기 때문인지.
아님 베르탈륨이 변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용신검을 박아 넣은 지 얼마나 됐을까.
전과 달리 이번에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탈 리저드의 신체가 급격하게 쪼그라들면서 견고했던 피부가 사막의 메마른 땅이라도 된 듯 푸석하게 갈라져 갔다.
그러더니 곧 크리스탈 리저드의 신체가 붕괴하듯 한 번에 무너져 내리더니 죽음의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꽤 놀랄 만한 시스템 메시지도 울렸고.
《 용신검 아스카론이 크리스탈 리저드를 흡수했습니다. 》
《 용신검 아스카론의 봉인율이 0.01% 해제됩니다. 》
크리스탈 리저드를 흡수하고 난 뒤 용신검 아스카론이 잠시 부르르 떨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음.
이것 봐라?
강력한 용혈이 아니면 쓸 수도 없게 해놨으면서 먹을 건 먹는다는 거냐?
조금 어이없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쓸 수 있을지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아마 옆에서 보기에는 단순히 이 용신검으로 크리스탈 리저드를 죽였다고 정도로 보일 것이다.
적어도 화련의 눈에는 말이지.
지금도 딱히 화련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보진 않았다.
“진짜 마왕이 대단하긴 하네. 막타만 쳐도 죽게 하고.”
그런 화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일단 1층에 리젠되는 크리스탈 리저드부터 다 정리하는 게 어때요?”
“그래 주면 나야 좋아. 그럼 굳이 힘들게 저것들을 피해서 자리를 이동할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보다 훨씬 효율이 좋아질 거야.”
화련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직접 마왕 헤르게니아를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 말을 듣고는 재중이 형을 불렀다.
“형, 아무래도 따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슬쩍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고는 알겠다는 듯 말했다.
“넌 마왕 헤르게니아하고 움직이게?”
역시 척하면 척이네.
“네. 아무래도 막타만 쳐야 할 것 같은데…….”
“오케이. 따로 그것만 키우기에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았는데. 쟤 덕분에 문제 하나는 해결하겠네.”
<불멸> 역시 드랍템은 없는 거지?
<주호> 네. 테르타로스와 동일해요.
테르타로스는 몬스터의 능력을 흡수하는 거라면.
아스카론은 용종을 제물로 먹는 쪽이라고 해야 하나.
둘 다 드랍템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동일했고.
마신의 파편이나 용신검이나.
편하게 성장시키라고 놔둔 아이템들이 아닌 건 확실했다.
경험치가 안 들어오는 것까지도.
결국 나와 함께 작업을 하면 우리 팀은 계속 손해를 본다.
그런데 지금 같이 마왕 헤르게니아가 그 역할을 대신해 준다면?
어차피 마왕 헤르게니아는 레벨이 너무 높아서 우리와 파티를 맺고 사냥을 해봐야 우리가 경험치를 전혀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예 이런 식으로 마왕 헤르게니아와 움직이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왕 헤르게니아 역시도 그걸 좋아하는 듯 보이고.
마왕 헤르게니아가 날 빤히 바라보고는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얘 더 없어?”
“없긴.”
아무래도 벽에 박힌 광석을 일일이 캐면서 흡수하는 것보다 저 마력 덩어리들을 잡는 게 훨씬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 같았다.
실제로 효율은 이쪽이 훨씬 더 나오기도 하고.
바로 우리 팀을 불러 모은 뒤 말했다.
“일단 1층부터 해서 사냥을 하죠.”
아직 화련이 눈치채진 못했지만.
방금 드랍템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이걸 의심 받지 않게 숨기려면…….
우리 팀의 사냥팀과 섞여서 사냥하는 수밖에.
잠시 서서 사방으로 감각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땅의 진동과 바람의 흐름으로 대략적인 던전의 구조가 그려지는 듯했다.
특히 내가 찾는 건.
다른 녀석들도 아닌…….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신호를 했다.
“가자. 저쪽에 있어.”
그리고는 발을 박차며 뛰어나가자 마왕 헤르게니아 역시도 내 뒤를 따라 달렸다.
얼마나 나갔을까.
“잠시 여기서 대기. 끌고 올게.”
딱히 모든 사냥터를 다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아까 주워 둔 베르탈륨 광석을 손에 들고는 저 멀리 있는 크리스탈 리저드를 향해 던져 정확하게 맞추자 울음소리와 함께 녀석이 우리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쪽에도 한 마리.”
계속해서 광석을 던져 가며 크리스탈 리저드만 사냥터에서 쏙쏙 빼왔다.
만약 링크된 몬스터였다면 좀 귀찮을 뻔했지만.
단일 개체라 그런지 그렇진 않았고.
그렇게 다섯 마리를 모으고 난 뒤.
다시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다섯 마리 대령.”
“헤. 쓸 만한데?”
아무래도 마왕 헤르게니아는 일일이 찾으러 다니는 게 귀찮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몰아다 주니 더 좋아하는 걸 보니.
그렇게 이쁘게 크리스탈 리저드들이 몰려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달려들자 녀석들에게 애도를 보냈다.
저건 상대를 봐가면서 달려들어야지…….
아니나 다를까.
쾅!!
쾅쾅!!
콰앙!!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섯 마리의 크리스탈 리저드들이 죄다 바닥에 누워서 사경을 해매고 있었다.
당연히 마왕 헤르게니아가 그들에게서 마력을 흡수해 간 상태고.
“땡큐.”
난 그대로 용신검을 그들의 머리로 박아넣으며 확인 사살을 했다.
《 용신검 아스카론이 크리스탈 리저드를 흡수했습니다. 》
《 용신검 아스카론의 봉인율이 0.02% 해제됩니다. 》
《 용신검 아스카론의 봉인율이 0.03% 해제됩니다. 》
《 용신검 아스카론의 봉인율이 0.04% 해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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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맛에 몰이를 하는 거지.
그리고는 곧장 전사 형에게 알렸다.
<주호> 형. 이 근처 크리스탈 리저드 없애놨어요. 남은 것들 마음껏 몰이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