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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172화 (1,160/1,404)

#1172화 신의 파편 (16)

로가슈 왕자의 신분으로 에센시아 제국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국과 왕국이라는 크기를 고려해보면 그 한계는 더욱 명확해지고.

물론 내가 에센시아 제국을 구해준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목소리를 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라는 예상은 너무 장밋빛이지.

무엇보다 이미 에센시아 제국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상은 어느 정도 정산이 된 상황이었다.

에센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헤르마늄 광산의 지분 절반 받아낸 일도 그렇고.

앞으로 나올 매장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고려해 본다면 제국 황제 역시 쉽게 내어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거기다 그 헤르마늄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들로 성마대전을 준비해야 하니까.

여기에 천사들과의 거래도 마찬가지다.

헤르마늄 자체가 성마대전에서는 전략 무기인 셈이라.

아마 레오나 에센시아를 빼내려고 한다면.

나 역시 뭔가를 내어줘야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건 분명하게 내게 마이너스가 될 테고.

당장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레오나 에센시아를 내어주는 대신 이곳에 머물라고 하면 상황은 더 골치 아파지게 된다.

혹은 제국 내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대신 처리한다던가.

그것들은 퀘스트 형식으로 주어질 확률이 높지만.

딱히 당장 내게 도움이 되는 퀘스트는 아닐 테고.

어쩌면 이곳에서 시간만 낭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난 굳이 에센시아 제국에서 퀘스트를 더 진행해 기여도를 쌓을 필요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기여도가 상당하니까.

다른 유저들과 달리 당분간은 아무런 퀘스트를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뭐 이것도 타란 제국으로 가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긴 한데.

당장 그 타란 제국도 가지 못하게 제국 황제가 막아설 확률이 높단 말이지.

그렇다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레오나 에센시아의 일을 처리해 줄 녀석이 필요했다.

그것도 확실히 에센시아 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를테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타란 제국의 대공 말이지.

대공이라는 지위도 지위지만.

사신이라는 임무에 따른 에센시아 제국과의 협상 전권을 얻어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건 앞서 질문들로 확실하게 확인을 한 상태다.

사절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카샤스 대공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 손에 피를 안 묻히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베스트니까.

“힘을 써 달라?”

“어, 아마 대공인 네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그 말에 잠시 카샤스 대공이 낮게 눈을 깔면서 내게 물었다.

“그 말은 로가슈 왕자로서는 힘든 일이라는 뜻이겠군.”

“정확해.”

역시 한 제국의 대공이라 그런지 이해가 빠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거기다 놀랍게도 내가 이미 할 이야기를 앞서 카샤스 대공이 말해 버렸다.

“그건 레오나 에센시아에 대한 일인가?”

“어떻게 알았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로가슈 왕국의 왕자가 대외적으로 처리하지 못할 일이라면 대부분 황가와 관련된 일일 확률이 높겠지. 그건 내정간섭이 될 수도 있으니 네가 관여하기 힘들다. 아닌가?”

흠.

이 녀석.

단순히 강하다고 대공 자리에 앉아있는 건 확실히 아닌 듯했다.

몇 가지 없는 주어진 단서로 현 상황을 추측하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다른 녀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 대공이라면 전투에서의 통솔력도 상당할 텐데.

이 정도면 거의 사기급 캐릭 아냐?

여기에 전술까지 좋아 버리면.

거의 육각형 올라운드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괜히 성마대전 역사상에 카샤스 대공이 최강의 영웅 중에 한 명이라고 이름 올린 게 아니네.

카샤스 대공의 말에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너무 정확해서 더 붙일 말이 없군.”

내 긍정에 카샤스 대공이 다시 말했다.

“레오나 에센시아에 대한 제국 내 직위 인사권은 나도 관여하기 힘들다. 그건 제국 황제의 고유 권한이니까.”

“기사단 말이군.”

“그렇지. 전용 기사단이 주어지면 그만큼 임무를 받고 활동을 해야 하니까.”

카샤스 대공 말대로 그동안은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전용 기사단이 없었으니 그런 임무에서 대부분 자유로웠을 것이다.

지금 성마대전에 나가 있는 다른 상위 황자나 황녀들과 달리 말이지.

대신 비밀 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대외적으로 황녀가 해야 하는 공식적인 활동은 아니다.

카샤스 대공 역시도 타란 제국에서 주어지는 공식적인 임무들이 존재했다.

이번의 사절 임무를 제외해도.

성마대전에서 타란 제국의 기사단과 군단을 이끌고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지금은 뭐 아크 드래곤 때문에 혼자 부랴부랴 날아온 셈이라 좀 그런 임무들을 내팽개치고 오긴 했지만.

타란 제국에서 카샤스 대공에게 이 일 때문에 대놓고 따지고 들 간 큰 인물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가기 싫다면 말이지.

대공이라는 특수한 위치도 있고.

이런 카샤스 대공이야 어지간히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위치지만.

레오나 에센시아는 다르다.

이제 곧 기사단을 받아 행해야 하는 첫 임무를 거부할 순 없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럼 그 임무를 좀 비틀어 줄 순 있겠지?”

“기사단의 행사 말인가?”

“그래.”

지금은 레오나 에센시아를 제국 황제의 시야에서 최대한 멀어지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이것도 시간을 벌어주는 일밖에는 되지 않겠지만.

당장은 그것만 해도 충분하다.

현재 필요한 건 시간.

어떻게든 성마대전 시대의 최강의 영웅이 될 시간만 벌어주면 된다.

정령신의 무구인 르아 카르테를 보유한 지금의 레오나 에센시아는.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제국 황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할 강력함을 얻게 될 테니까.

그 사이가 너무 무력해서 문제지.

카샤스 대공을 빤히 바라보면서 내 정확한 용건을 말했다.

“레오나 에센시아를 타란 제국으로 빼돌려 봐.”

“흠. 타란 제국으로 말인가.”

다른 곳은 너무 내 시야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안 된다.

적어도 문제가 생겼을 때.

내 쪽에서 대응이 가능할 만한 거리는 되어야 손을 쓸 수 있다.

우리가 타란 제국으로 가야 하는 이 시점에.

그녀가 에센시아 제국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최악.

다른 곳으로 가는 건 그나마 낫긴 한데 그래도 멀어지는 건 매한가지라.

지금은 타란 제국이 베스트다.

무엇보다 카샤스 대공이 타란 제국의 대공이기도 하고.

대고자 하면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지도.

내 제안에 카샤스 대공이 잠시 눈을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레오나 에센시아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려나?

아니면 그녀를 타란 제국으로 데려감으로써 생기는 손익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카샤스 대공도 뭔가의 대가를 내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충분히 지불하겠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카샤스 대공도 굳이 힘을 써주진 않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카샤스 대공에게 일단 부탁은 해놨어요.

<불멸> 해줄 것 같아?

<주호> 모르죠. 일단은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우호적이긴 한데. 잘은 모르겠어요. 그녀를 데리고 갈 만큼의 호감인지도 판단하기 힘들고요.

<불멸> 정 안 되면 우리가 타란 제국에 가는 일도 묶어 봐. 카샤스 대공은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주호> 네. 그건 마지막에요.

솔직히 카샤스 대공이 안 된다고 하면.

우리가 타란 제국에 가지 않는다고 강짜를 놓아버리면 되는 일이다.

반드시 나를 타란 제국으로 데려가야 하는 카샤스 대공은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켜야 할 테고.

다만 이럴 경우.

내 쪽에서 강제력이 발생하게 되니까.

오히려 타란 제국에 발이 묶여 버리는 상황이 되겠지.

지금이야 최상의 조건이지만.

그 조건도 꽤나 나빠질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레오나 에센시아를 패키지로 데려가려면.

하지만 거기까지는 감수할 만할 가치가 있었다.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는 게 지금은 맞으니까.

어차피 손실을 보면.

그만큼 나중에 타란 제국에서 뜯어내면 그만이다.

지금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특히 고대 마룡을 포획하는 시점이 지난 다음에는.

완전히 입장이 달라질 테니까.

뜯어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해.

잠시 기다리자 카샤스 대공이 눈을 떴다.

꽤 복잡해 보이는 눈빛이라 카샤스 대공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겠네.

곧 결정을 내렸는지 카샤스 대공이 말했다.

“좋아. 이 일은 타란 제국의 사절로 해결해 주도록 하지.”

그런데 의외로 카샤스 대공이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아 조금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분명히 카샤스 대공에게는 마이너스가 될 텐데?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에게 레오나 에센시아를 내어달라고 하면 당연히 그만큼의 보상을 걸어야 한다.

아니면 제국 황제가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뭔가를 내게 요구해야 정상인데 말이지.

그때 카샤스 대공이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레오나 에센시아 황녀를 에센시아 제국에서 빼돌려야 하는지 모르겠군.”

아.

이거였나?

카샤스 대공이 궁금했던 점이.

분명히 내가 에센시아 제국에서 그녀를 빼돌린다는 표현을 쓰긴 했었다.

당연하겠지만 황녀를 빼돌린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쓰는 말은 절대 아니지.

“그 이유에 대한 답이 네 조건이 되는 건가?”

“네 대답 여부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지금 카샤스 대공은 레오나 에센시아를 빼내야 하는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 묻는 중이었다.

흐음.

이거 사실대로 이야기해 줘야 하나?

미래의 성마대전에서 레오나 에센시아가 역대 최강의 영웅이 된다고.

하지만 그걸 이야기하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이 걸려 있는 게 문제였다.

아마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카샤스 대공이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건 다른 유저들도 대부분 같은 락에 걸려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돌려 말한다고 해도.

우리가 미래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저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쪽은 애써 설명해 봐야 답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못하면 설명 자체가 안 되는데 말이지.

레오나 에센시아가 영웅이 될 강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정도로는 카샤스 대공이 직접 움직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해.

그것도 카샤스 대공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납득 가능한.

최강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제외한 부분에서.

그를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카샤스 대공을 설득할 재료가 뭐가 있지?

아무리 봐도 이건 카샤스 대공에게 마이너스인데.

그때 갑자기 챠밍이 내게 해준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흐음.

이거 참.

설마 여기에 기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데.

하지만 이게 어쩌면 카샤스 대공을 움직일 최선의 패가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전에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해 봤을 때.

그리고 챠밍의 말까지 종합해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잠시 숨을 쉬었다가 카샤스 대공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레오나 에센시아가 죽을 거라면……?”

“뭐?”

“에센시아 제국에 남아 있으면 레오나 에센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을 거야.”

“황위 경쟁에서 뒤처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황녀의 숙명 같은…….”

그런 카샤스 대공에게 눈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레오나 에센시아는 그렇게 죽지 않아.”

“무슨…….”

“제국 황제.”

제국 황제라는 말에 카샤스 대공의 어깨가 흔들렸다.

설마 하는 눈빛과 함께.

“어, 맞아. 레오나 에센시아는 제국 황제에게 죽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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