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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167화 (1,155/1,404)

#1167화 신의 파편 (11)

당연히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레오나 에센시아의 성에는 버젓이 주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 내가 만나면 꽤 난감할 녀석 말이지.

피부를 저릿하게 찌르는 감각이 내게 계속 경고를 보내왔다.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분명히 크게 다칠 것이라.

하지만 이건 피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벽 너머로 느껴지는 카샤스 대공의 거대한 기운이 얼마나 녀석이 빡쳐 있는지 잘 알게 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아무 말도 없이 버리다시피 가 버렸으니.

무려 타란 제국의 대공을 말이지.

당장 목에 칼을 들이민다고 해도 받아줘야 할 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옆으로 마왕 헤르게니아가 바싹 달라붙더니 내게 물었다.

“저 재수 없는 기운은 뭐야?”

아.

확실히 이쪽은 마왕이었지.

어째 자주 까먹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둘은 성마대전에서 천척 관계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관계였다.

그런 마왕 입장에서는 인간군의 영웅 중에 한 명인 카샤스 대공이 내뿜는 지금의 기운이 결코 달갑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그냥 단순히 기운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살기를 듬뿍 담고 있으니.

무엇보다 이곳 에센시아 제국성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있어서 적진 한복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무난하게 정체를 숨기고 다녀도 언제 들킬지 모르는 상황에.

저렇게 대놓고 살기를 뿜어내니 마왕 헤르게니아가 반응할 수밖에.

적의가 가득한 카샤스 대공의 기세에 곧 마왕 헤르게니아의 눈빛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휴.

이거 양쪽을 다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는데.

여기서 현존하는 영웅 중에 최상위에 랭크된 카샤스 대공과 마왕 헤르게니아가 격돌하면.

말 그대로 성마대전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왕 특유의 적안이 레오나 에센시아의 성벽 너머를 노려보자 내가 한 팔을 들어 그녀를 만류했다.

“괜찮아. 아군이다.”

“뭐? 무슨 놈의 아군이 보자마자 이런 살기를 내뿜어?”

음.

마왕 헤르게니아가 봐도 지금 상황이 정상은 아니지.

내가 제지하자 멈칫했던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뜨고는 다시 성벽을 쳐다봤다.

곧 안쪽에 있는 뭔가를 안다는 듯 손가락으로 성벽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거. 영웅이잖아. 거기다 약한 놈도 아니고.”

“음. 어느 정도는 맞아.”

마왕 헤르게니아의 평가에서 약한 놈이 아니라는 건.

그녀가 보기에도 카샤스 대공이 상당히 강하다는 뜻이다.

곧장 적의를 내세울 만큼.

아마도 쉽게 넘어갈 상대가 아니라는 거겠지.

“일단 기운부터 빼. 그러다 마왕으로 변한다.”

“칫. 여기서?”

“보기에는 저래도 정말 공격하진 않을 거다.”

“하. 이걸 믿어야 하나…….”

“어차피 널 알아보고 저러는 게 아니야. 내 쪽이 문제지.”

잠시 날 빤히 바라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곧 기운을 풀어버리고는 말했다.

“여차하면 움직일 거야.”

“그래. 네가 판단하기에 정말 위험하면.”

그렇게 마왕 헤르게니아를 진정시키고는 다시 레오나 에센시아의 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 팀들 역시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 준비를 하는 중이었고.

솔직히 카샤스 대공이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서 녀석이 정말 죽자 살자 덤벼들면 우리도 그에 맞는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예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쪽은 일단 로가슈 왕국의 왕자니까.

아무리 제국의 대공이라고 하더라도.

일국의 왕자를 대놓고 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 녀석은 내게 원하는 게 있기도 하고.

이 판을 갈아엎을 만큼.

카샤스 대공이 어리석진 않길 바란다.

부서져 있던 성벽을 넘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무너진 성터 한곳에 걸터앉아 있던 카샤스 대공이 못 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들어 와?”

“아. 미안.”

“그게 끝?

“음…… 사정이 좀 있었다.”

“내게 한 마디도 없이 자리를 뜰 만큼?”

카샤스 대공이 화가 난 건 맞긴 한데.

당장 내게 칼부림을 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

“기다리게 한 건 미안한데. 같이 갈 수는 없는 곳이라.”

솔직히 카샤스 대공을 헤르마늄 광산에 데리고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신의 흔적을 노리고 있다고 대놓고 광고할 셈이 아니라면.

뭐 어쩌면 협조를 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냥 낮은 확률일 뿐이다.

오히려 카샤스 대공이 신의 흔적을 가지려고 할 수도 있으니.

위험한 일은 애초에 피해가는 게 좋다.

그리고 솔직히 카샤스 대공이 정말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바쁠 텐데.

타란 제국의 대공이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거기다 고작 일국의 왕자 하나 보자고 계속 여기서 죽치고 있는다고?

뭐 원하는 게 있어서 기다렸다고는 해도 믿기 힘든 일은 맞지.

카샤스 대공 입장에서는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카샤스 대공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내게 걸어왔다.

다행히 전에처럼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고.

하지만 완전히 경계를 놓지는 않았다.

내게 레벨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이 녀석은 마왕하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녀석이었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레벨을 고려해본다면.

아마 카샤스 대공도 거의 그 정도에 근접했다고 예상이 되니까.

내가 여기서 무슨 수를 쓴다고 하더라도.

녀석을 상대하기는 꽤 어려울 것이다.

가진 무기들과 장비들을 모두 꺼낸다면 또 모를까.

“오래 기다린 건 잘 알고 있겠지?”

“그렇지.”

“흠.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나 역시 일은 해야 해서.”

응?

무슨 말이지?

일이라고?

순간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타란 제국의 대공이 이곳에서 일이 있다라…….

그것도 지금 녀석이 말하는 투를 들어보면 절대 개인적인 일이 아님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본인만의 일이라면 굳이 일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을 테니까.

그건 바로 대외적인.

타란 제국에 관련된 일을 해야 함을 뜻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카샤스 대공이 해야 하는 일이 뭐가 있지?

에센시아 제국 황제와는 이미 만나서 굳이 그쪽으로는 의미가 없을 텐데.

그렇다면.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보다 녀석이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 날 기다려야 하는 일이라면…….

화련이 내게 이야기해 주었던 일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내가 알기로 딱 하나밖에 없다.

“타란 제국의 사신…….”

사신이라는 말에 카샤스 대공이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응? 이미 알고 있었나?”

역시인가.

카샤스 대공이 굳이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

화련이 타란 제국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했는데.

그 역할을 하는 녀석이 바로 카샤스 대공이었다.

하긴.

아무나 보냈다가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

애초에 에센시아 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카샤스 대공에게 부탁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카샤스 대공 같은 거물에게 단순히 사신을 하라고 하면 저 성격에 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겠지만.

그게 날 타란 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 임무라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지.

특히 녀석에게 이건 본인이 원하면서도 동시에 타란 제국에 필요한 일이니까.

“아마 타란 제국으로 날 데리고 가는 게 대공의 임무겠지?”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서 편한데?”

그러더니 작게 한숨을 쉬면서 카샤스 대공이 말을 이었다.

“늙은이들이 하도 들들 볶아대서 죽을 지경이야.”

“날 빨리 데려오라고?”

“그렇지.”

굳이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 늙은이들 중에 타란 제국의 황제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타란 제국의 대공씩이나 되는 카샤스 대공을 움직이려면.

그냥 그렇고 그런 녀석들로는 절대 불가능할 테니까.

적어도 타란 제국의 황제 정도는 나서줘야 카샤스 대공이 움직이는 척이라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카샤스 대공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곧 타란 제국의 황제가 움직였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일단 황제의 부탁이란 말이지?

그럼 이번 일에 걸린 게 결코 적지 않을 터.

그때 재중이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불멸> 상황은 어때? 우리도 뛰어들어야 하나?

<주호> 아. 괜찮은 것 같아요.

<불멸> 최악의 상황은 아닌 모양이네.

<주호> 그런데 이번에 온 사신이 카샤스 대공이네요.

<불멸> 응? 따로 온 게 아니고?

<주호> 네. 그냥 카샤스 대공에게 맡긴 듯해요.

잠시 말이 멈췄다가 다시 귓속말이 왔다.

<불멸> 널 데려오라고 말이지?

<주호> 정확해요.

재중이 형은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불멸> 너하고는 친분도 있겠다. 왕자를 상대하려면 대공 정도는 나서 주는 게 좋겠지. 타란 제국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

<주호> 네. 그걸 고려한 것 같아요.

<불멸> 아무리 타란 제국이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일국의 왕자에 대한 정보를 가진 녀석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거기다 만약 네가 에센시아 제국에 계속 머무르겠다고 하면 답도 없을 테고. 이 자리에서 바로 협상이 가능한 정도라면 카샤스 대공이 최적이지.

<주호> 그럼 어떻게 할까요?

<불멸> 이미 정해놓지 않았어?

<주호> 뭐…… 그렇죠.

화련의 의뢰도 있고.

어차피 한 번은 타락 제국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되는가는 따로 정해야 했지만.

카샤스 대공이 이렇게 나오면…….

잠시 기다리던 재중이 형이 내게 말했다.

<불멸> 어차피 카샤스 대공은 우리가 타란 제국으로 넘어갈 거라는 걸 전혀 몰라.

<주호> 간을 보라는 건가요?

<불멸> 그래. 그리고 오히려 공은 우리에게 넘어온 것 같은데?

그런 재중이 형의 말에 나 역시도 동의했다.

사실 여기 와서 카샤스 대공의 기분을 풀기 위해 뭔가 보상을 해줘야 하나 고민까지 했었는데.

그런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지금 상황은 내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이미 판이 뒤집혀 있는 딱 그런 그림이랄까.

지금은.

우리가 뭔가를 해줘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카샤스 대공이 우리에게 대가를 제공해야 하는 판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 당장 조건으로 뭘 제시하더라도.

카샤스 대공이 수용해 줄 확률이 높았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대놓고 무리한 조건을 걸 생각은 없었다.

굳이 카샤스 대공의 인내심을 여기서 실험해 볼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공짜로 넘어갈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이 좋은 기회를 발로 걷어차는 건 멍청한 짓이라.

카샤스 대공이 납득할 수 있는.

적당한 선에서.

거래를 걸어야 해.

그리고.

타란 제국의 황제가 날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가도.

이 협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우선 좀 물어볼게. 타란 제국의 황제가 날 원하는 이유를 묻고 싶은데.”

내 질문에 순간 카샤스 대공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호오. 그냥 내게 최대로 줄 수 있는 보상을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고. 어차피 황제의 의도에 따라 원하는 게 달라질 텐데. 딱히 의미도 없거든.”

타란 제국의 황제가 단순히 아크 드래곤을 잡은 나를 원한다고?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겠지만.

이건 절대 아니다.

아크 드래곤이 분명 대단한 네임드이긴 해도.

어차피 아크 드래곤을 대체할 만한 전력은 분명 타란 제국에도 존재한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딱 그런 포지션.

그런데 타란 제국의 황제는 날 간절히 원한다.

카샤스 대공까지 시켜서 데리고 오라고 할 만큼이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줄지어 엮이는 생각들에 잠시 한숨을 쉬었다.

이거 참.

아무래도 화련이 좀 짜증 내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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