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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039화 (1,027/1,404)

#1039화 에센시아 방어전 (5)

과연 이게 통할까?

조금의 불안감을 속으로 감추면서도.

일단은 뻔뻔하게 입 밖으로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로가슈 왕국의 왕자라는 한 마디.

내 쪽에서 먼저 로가슈 왕국을 언급하자 잠시 사방이 조용하게 변했다.

빤히 바라보는 주변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마치 물음표가 뜨는 것처럼 흔들림이 보였다.

음.

이게 안 먹히면 곤란한데…….

에센시아 제국성의 일반 병사 NPC들이 과연 로가슈 왕국을 알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만약 이런 병사들 수준에서부터 막힌다면 그 이상은 볼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귀족 사칭이 안 통한다는 말이 될 테니까.

아.

지금은 귀족 사칭 이상이지.

무려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의 왕국을 통째로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기의 스케일도 이 정도면 좀 알아줘야 하는 것 아닐까…….

좀 기다렸음에도 주변의 병사들이 대답이 없자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차하면 여길 떠야 하니까.

이게 안 통했을 경우는…….

귀족 사칭으로 에센시아 제국성에는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저들의 태도에 따라.

앞으로 일의 진행도가 확연히 차이 나게 될 터.

차라리 에센시아 제국이 아크 드래곤에게 망해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슬쩍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 역시도 꽤 긴장된 표정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주호> 통할까요?

<불멸> 흐음.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하긴.

한 나라의 존재 자체를 통째로 꾸며 사기 치는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막상 실행에 옮긴 나도 미친 짓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반대로 통하기만 하면.

앞으로의 진행은 몇 배로 수월해질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외부인에서.

단번에 한 왕국의 왕자가 되는 셈이니까.

그렇게 마음 졸인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병사 NPC가 먼저 말을 꺼냈다.

“로가슈 왕국? 어디에 있는 나라지?

일단 한 녀석이 말문을 열자 다른 NPC들도 따라 입을 열었다.

“모르겠는데? 넌 아냐?”

“아니. 나도 몰라. 그런 나라가 있어?”

“모르지. 대륙 어딘가에 있는 거 아닌가?”

“그러게. 나도 왕국 이름은 전부 다 모른다고.”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일반 NPC들 수준에서는 로가슈 왕국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었다.

병사들이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의 왕국까지 알게 뭔가.

하지만 일단 사기를 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터.

설마하니 왕국을 걸고 사기를 치는 인간이 우리 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왕국이다 정도만 인식해 주면 좋을 텐데…….

딱 한 번만 먹히면 된다.

그렇게 마음 졸이면서 보고 있을 때.

병사들 중에 하나가 내 뒤에 있는 황실 비공정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길 봐. 저렇게 큰 비공정을 가진 왕국이라면 꽤 잘 사는 거 아냐?”

“그렇네. 다른 왕국들의 왕실 비공정만큼이나 크잖아.”

좋아.

병사들 사이에서 꽤 긍정적인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란 인간이 왕자인지 아닌지 녀석들이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내 뒤에 있는 저 황실 비공정은 진짜다.

가르시아 제국에서부터 가져온 거니까.

품질 하나만은 최상품이라는 거지.

누가 봐도 가짜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거기다 아무리 이 시대가 발전했다고는 해도.

이 수준의 비공정을 아무렇게나 굴리지는 않을 터.

최소 한 왕국의 왕실 정도는 되어야 타고 다니는 물건이다.

그러자 다들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처음의 의심스런 눈초리가 아닌.

조금 우러러 보는 것 같은.

딱 그런 표정들.

“정말 왕자인가 봐.”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는데…… 왕자니까 저런 비공정을 타고 다니겠지?”

“제국을 지원하러 나온 왕국인데 우리가 모른다고 이대로 세워 둘 셈이야?”

“그러게. 우리가 다른 왕국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저런 왕국도 있겠지.”

웅성웅성.

일단 로가슈 왕국이 대륙 어디 박혀 있는지는 몰라도.

황실 비공정 하나만으로 반은 먹고 들어갔다.

그리고 또 하나.

내 뒤에는 황실 비공정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와. 크다.”

“위험해! 가까이 가지 마!”

“에이, 안 움직여.”

“정말?”

“그래. 저 왕자님이 끌고 온 거잖아.”

“난 또 고대 괴수인 줄 알았네. 저 녀석이 성벽을 넘어올 때 죽는 줄 알았다니까.”

바로 타이탄.

지금은 내 통제하에 있어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성벽을 넘어온 뒤 가만히 있는 중이었다.

아마 이 근처는 다 이 타이탄으로 인해 난리가 났을 터.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주호 왕자님. 저건 안 위험한 겁니까?”

그 말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손을 꽉 지면서 속으로 환호했다.

됐다.

저 병사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주호 왕자라는 언급이 나왔다.

한 병사가 그렇게 말하자.

당연하게도 다른 병사들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주호 왕자…….”

“로가슈 왕국이래…….”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까지 떴다.

《 주변 에센시아 제국의 병사 NPC들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의 참가와 함께 호감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

《 에센시아 제국의 병사 NPC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

<주호> 형, 통했어요.

<불멸> 어, 나도 봤다. 설마 이게 진짜 될 줄 몰랐는데?

재중이 형도 확신이 없었던 건가.

일단 일은 벌여놓긴 했는데.

완벽한 작전은 아니었으니까.

나도 중간까지는 망한 줄 알았다.

그런데 재중이 형은 긴장을 놓진 않았다.

<불멸> 그래도 아직 확실히 통한 건 아니야.

재중이 형이 뭘 말하려는지는 잘 알겠다.

<주호> 귀족들 말이죠?

<불멸> 그래. 병사들이야 어떻게 대륙에 대한 지식이 적어 넘어간다고는 해도 귀족들은 그게 또 아니니까.

저 말이 맞다.

병사들 수준에서는 그냥 없는 왕국이 갑자기 나타났다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귀족들은 대륙에 있는 왕국들을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다른 나라의 왕족 족보를 꿰고 사는 걸 덕으로 아는 녀석들이라.

그런데 이 와중에 듣도 보도 못한 왕국이 튀어 나오면?

당연히 표가 날 수밖에 없다.

병사들은 작은 관문이라면.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리고 내가 황실 비공정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의 책임자를 찾은 것도 그런 이유 중에 하나였고.

“여기 책임자는 어디 있지?”

처음 말을 걸어왔던 병사를 향해 물어보자 바로 착실하게 대답부터 날아왔다.

“옙! 주호 왕자님. 책임자를 데리고 올까요?”

“그래. 여기서 기다리지.”

에센시아 제국 안으로 황실 비공정을 끌고 날아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무작정 들어가서는 지금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적어도 우리를 대변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것도 적당히 인지도가 있으면서.

제국 내에서 제지를 받지 않을 정도의 직책을 가진 누군가가.

그 NPC가 귀족이면 더 좋고.

잠시 기다리자 무너진 성벽 한쪽 멀리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이려나.

이곳의 책임자가.

다른 병사 NPC들과는 달리 복장 자체가 달랐다.

이 전쟁 통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은실로 수놓은 복장하며.

고생을 좀 안 해본 것 같은 말끔한 얼굴까지.

누가 봐도 저건 귀족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직위 자체는 높지 않은 듯 했다.

만약 직위가 높았다면.

저렇게 뛰어올 리가 없으니까.

그것도 어딘지 모를 왕국의 왕자가 부른다고 뛰어올 리가 없지.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녀석이 나와 재중이 형을 빤히 보고는 곧 시선이 내 뒤에 있는 황실 비공정과 타이탄에 가서 닿았다.

특히 타이탄을 본 그의 입은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거기다 경악과 공포가 살짝 섞인.

당장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녀석의 표정을 보고는 아차했다.

“세상에…… 정말 타이탄이라고?”

아마 이 녀석은 타이탄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고대 정령 병기라는 걸 알지는 못하겠지만.

녀석이 놀란다는 건.

그만큼 잘 알려진 녀석이라는 걸 뜻하기도 할 테고.

내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건가?

황실 비공정을 보고 놀라긴 했지만.

그보다는 타이탄에 경악한 녀석이 겨우 고개를 내려 나를 다시 쳐다보면서 물었다.

“대체 어떻게 타이탄을……?”

아마 오기 전에 내가 왕자라는 말을 들었을 테니 함부로 말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녀석의 호칭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주호 왕자라고 부르면 된다.”

“아, 주호 왕자님.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타이탄을 보고는 바로 기가 질린 듯했다.

어설프게 내 앞에서 제국 귀족 티를 좀 내보려고 할 수준을 아득히 넘어갔으니.

타국의 왕자라고 해도.

여기는 에센시아 제국.

거기다 제국의 귀족을 왕국보다 한 직위 정도 높게 쳐주는 경우가 많을 테니까 저 녀석의 직위가 높다면 나와 맞먹으려고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지금 녀석의 태도 어디에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직책이 낮던가.

혹은 이곳에서 저 타이탄이 확실히 통하는 물건이라는 거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녀석이 조심스러운 눈치로 조금 당황한 듯 내게 물었다.

“저…… 로가슈 왕국이라는 곳이 어디…….”

예상했던 대로 녀석의 지식 안에 로가슈 왕국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녀석의 물음을 애써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군.”

“아. 아무래도 갑자기 아크 드래곤이 쳐들어와서요. 보통은 산맥을 넘어오지는 않는데…….”

이것만 들어보면 평소에도 아크 드래곤을 파악하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시기의 밸런스를 보면 아크 드래곤은 재앙이나 다름없는 녀석이니까.

꽤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들.

감시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을 터다.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나요?”

알고 있었다면 방비도 당연히 되어 있겠지만.

솔직히 너무 허무하게 무너졌다.

한 대륙의 제국이 맞나 싶을 정도.

꼭 우리가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한들.

정말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분명 뭔가 원인이 있을 텐데.

“젠장, 아크 드래곤을 견제할 만한 영웅님들이 지금 성마 전쟁 때문에 원정을 나가 계셔서……. 하필 지금 아크 드래곤이 쳐들어와서는…….”

아.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에 스치는 것들이 있었다.

설마.

그런 이유였나?

<주호> 형, 이제야 앞뒤가 맞네요.

<불멸> 어, 영웅을 아껴둔 게 아니고.

<주호> 네. 나올 영웅이 없었다는 게 맞겠죠.

전사 형이 영웅이 나오지 않아 의아해했던 것도 풀렸다.

한창 진행 중인 성마 전쟁 때문에 자리를 비운 주요 영웅들의 허점이.

갑자기 쳐들어온 아크 드래곤을 막아내지 못한 주요 이유였다.

“지금 제국 내에 아크 드래곤을 막을 여력이 없다는 건가요?”

“겨우 막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시간을 좀 끌면 영웅님들에게 연락이 갔으니까…….”

“시간이 필요하다?”

“네, 그렇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녀석이 정말적인 표정으로 저 멀리 날뛰고 있는 아크 드래곤 쪽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거려나.

아마 이대로면 영웅들이 도착하기 전에 제국이 먼저 망한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표정을 굳히며 말을 꺼냈다.

“제 쪽에서 시간을 끌어보죠.”

“네?”

“그러니까.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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