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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038화 (1,026/1,404)

#1038화 에센시아 방어전 (4)

일단 크루아 대륙의 원 역사에서는 로가슈 왕국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기억으로는 가르시아 제국이 생기고 난 뒤에서야 역사의 한 편에 등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뭐 조금 더 이전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상관 없고.

애초에 로가슈 왕국 자체가 크루아 대륙으로 넘어오기 전에 들리는 대륙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역사 속에서 비중이 높을 이유도 없고.

실제 로가슈 왕국 자체도 그렇게 큰 편도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유저들이 레벨 업을 하면서 스쳐가는 딱 그 정도의 역할이랄까.

유저들 입장에서는 크루아 대륙으로 넘어오고 나면.

돌아갈 이유조차 없는 곳이 바로 로가슈 왕국이었다.

몇몇 중요한 퀘스트가 있긴 하지만.

애써 그것 때문에 바다를 건너 돌아갈 정도는 또 아니지.

다른 말로.

유저도 아닌 NPC 집단인 에센시아 제국에서 현재 신경 쓸 만한 수준의 비중은 절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우리가 위장하기에는.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딱 하나 다른 존재가 있긴 했다.

재중이 형에게 물어보며 한 가지 직책을 떠올렸다.

“형, 저 이래 보여도 교황인데.”

“아아, 그 교황 말이지.”

신성 제국 제넨샤의 교황.

얼떨결에 되긴 했는데.

일단은 내가 교황이긴 교황이었다.

교황의 증표도 역시 가지고 있었고.

언제라도 사람들에게 교황이라고 알릴 수 있달까.

재중이 형이 비공정을 운전하면서 저 멀리 에센시아 제국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당장 저기 가서 네가 교황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떠받들어 주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는 않을 텐데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고개를 저었다.

“에센시아 제국에 다른 교황이 없다면 말이지.”

“흐음. 그건 또 그렇네요.”

재중이 형 말대로 교황이라는 게 나라마다 있는 왕처럼 여럿 씩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크루아 대륙을 통틀어 단 한 명.

그리고 그 딱 한 명뿐인 교황은 지금 저 에센시아 제국성에 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여러 왕국의 사절들이 모이는 자리에 교황 역시 와 있을 테니까.

어쩌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안 된다.

교단에서 나온 녀석들이 한눈에 알아볼 테니까.

생각해 보면 가장 위장하기 힘든 직책 중 하나가.

바로 그 교황이라는 존재였다.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너도 어엿한 교황이긴 하지. 대략 몇 백 년 뒤쯤에. 당장은 칼 맞아 죽겠지만.”

“역시 안 되겠네요.”

“어, 여기 있는 동안 계속 교단에 쫓겨 다닐 생각 아니라면 꿈도 꾸지 마.”

만약 교황으로 사기를 칠 수 있다면.

그 어떤 직책보다 압도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제넨샤의 교황을 증명하는 증표까지 있지만.

이곳에서는 그 증표가 오히려 내 목을 조를지도 모르지.

“기껏 따놓은 교황인데. 아깝네요.”

교황이 무슨 딱지치기해서 얻은 직책인 것처럼 웃고 넘기는 사이 황실 비공정이 거의 에센시아 제국성 근처까지 접근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심한데?”

이미 제국성의 한쪽 성벽이 박살 나듯 무너져 그 처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다 마법 방벽을 서로 이어주는 마법진이 온데 간데 없었다.

배리어 역시 찢겨진 듯 구겨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무엇보다 저 흔적.

“형, 저건…….”

“어, 브레스네.”

어떤 형태의 브레스인지는 저 깊게 패인 흔적만 봐도 잘 알 것 같았다.

성벽을 녹이며 바로 일자로 에센시아 제국을 가르면서 이어지는 고열의 브레스.

문제는 그 고열의 브레스의 양옆으로 또 다른 브레스들이 등장한다는 데 있었다.

태풍이 거칠게 쓸고 지나간 것처럼 건물들이 이상한 형태로 구겨져 밀려나간 흔적들.

반대쪽은 열에 녹기보다는 사방으로 폭발되었다는 느낌이 더 강해보였다.

충격을 이기지 못해 터져 나갔달까.

그 흔적들 위로 아직도 강렬한 스파크가 연이어 흐르고 있었다.

“화염, 바람, 뇌전 계열 브레스를 쓰네요.”

“어, 그것도 따로 쓴 것도 아니야. 세 줄로 쭉 밀고 나간 걸 보면.”

재중이 형 말대로 저 브레스들은 동시에 쓴 것이다.

다른 말로.

저 흔적들은 아크 드래곤은 최소한 브레스를 동시에 세 발 이상 날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머리가 세 개가 아닌 이상 저렇게 하긴 힘들 텐데…….

혹시나 해서 전사 형에게 물어보았다.

<주호> 전사 형. 혹시 아크 드래곤의 머리가 세 개예요?

<방패전사> 응? 아니. 세 개는 아니던데 왜?

<주호> 아, 여기 성벽이 무너진 쪽에서 브레스 흔적을 보고 말하는 거예요.

<방패전사> 안 그래도 말해 주려고 했다. 그 녀석 트리플 캐스팅은 기본으로 쓰던데?

<주호> 브레스까지도요?

<방패전사> 어, 거기다가 전 속성을 다 돌려가면서 써. 난 또 무슨 이런 괴물이 있나 했다. 안 쓰는 속성이 없어. 하나같이 다 강하고.

<주호> 정말 괴물이네요.

보통은 어느 속성에 특화되어 있거나.

혹은 많아 봐야 세 개 정도 속성을 쓰는 편이었다.

베히모스가 화염과 바람, 뇌전을 같이 쓰긴 해도 그 세 개가 다 강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한 가지 속성만 강하다고 치면.

재중이 형의 가르가가 화염 속성 하나만 따졌을 때 압도적으로 강한 편이었다.

다른 말로 한 가지 속성을 쓸수록 그 속성에 특화되어 강한 위력을 내는 게 일반적이라는 거다.

만약 구사할 수 있는 속성의 개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능력치가 분산되어 평균적으로 약해지는 거고.

뭐 베히모스가 그렇다고 약하다는 건 또 아니었다.

신체적인 능력이 주가 된 상태로 다른 속성들이 강한 거니까.

아무튼 일반적인 케이스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저 아크 드래곤의 강함은 도가 지나친 면이 있었다.

브레스를 세 종류를 동시에 쓰는데 그 브레스들이 죄다 필살기급으로 강하다는 건 절대 일반적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아크 드래곤은 브레스만이 아니라 광역 마법 능력 역시 탁월했다.

눈에 보이는 일대를 전부 뒤엎을 수준이니.

거기다 트리플 캐스팅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녀석이라…….

하기에 따라 정말 대단위 광역 마법을 트리플 캐스팅으로 깔아 버릴지도 모른다.

구름 전체에서 뇌전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 사이로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연달아 떨어지며 거기에 광범위하게 태풍까지 불어 닥치면?

그건 그것만으로도 이미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빙결 계열 마법이나 어둠 속성 마법까지 연달아 쓴다면 답도 없고.

“설마 이 녀석. 육체도 강하진 않겠죠?”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임 자체가 드래곤이잖아. 약할 것 같냐?”

“……하긴 그렇네요.”

아크 드래곤.

그 이름 자체에 이미 드래곤이 들어간다.

흔히 마법적 능력이 강하면 신체가 약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그런 편이기도 하고.

마법 계열 몬스터가 신체까지 강하면 그건 사기라…….

그런데 이 드래곤이라는 건 또 그렇지 않다.

육체적인 능력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보스급 몬스터들의 싸대기를 날리고도 남는다.

타이탄과 당장 지상에서 붙는다고 해도 아주 밀리지는 않을 지도 모르고.

그만큼 신체적인 능력이 좋을 거라는 거다.

“거의 사기네요.”

“성마 전쟁 중반 넘어가야 나오는데다가 마왕군의 몬스터들 중에서 최상위라잖아. 애초에 지금하고는 밸런스 자체가 안 맞지.”

후.

막상 멀리서 볼 때는 실감이 안 났는데.

지금 눈앞에 저 흔적들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그냥 저건 사기다.

타이탄이 있다고 한들.

상대가 될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형, 그냥 우리 팀 살려서 내뺄까요?”

어느 정도껏 강해야지 게임이 되는데.

아크 드래곤이라는 녀석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긴 한데. 이미 늦은 듯?”

황실 비공정이 에센시아 제국성 근처로 다가서자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에센시아 방어전 권역을 들어왔습니다. 》

《 전투 상황으로 변경됩니다. 》

《 과거의 상급 고대 마수인 아크 드래곤이 에센시아 제국성을 침략하고 있습니다. 》

《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이 진행 중입니다. 》

《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

재중이 형에 이어 내게도 똑같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황실 비공정이 뭔가에 막힌 듯 가만히 날고 있는 걸 보면 방어전을 허락해야 더 진행이 되는 듯했다.

주어지는 선택지.

여기서 다시 방어전을 취소하면 이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반대로 여기서 허락하면 바로 제국성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고.

“휴, 할 수 없죠. 들어가죠.”

애초에 방어전을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뭔가를 해보기 위해서는 이 방어전에 참가해야 한다.

아크 드래곤을 물리치든 쫓아내든.

“좋아. 가자.”

둘 다 허락을 하자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에 참여하셨습니다. 》

《 현 시간부로 에센시아 제국성의 방어전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에서 공적을 세우는 만큼 공적치로 전환됩니다. 》

《 공적치 1위부터 순서대로 차등 보상이 지급됩니다. 》

《 아크 드래곤을 죽이거나 패퇴시키면 추가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

《 에센시아 제국성의 황실에서 지원 물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

《 에센시아 제국성의 모든 NPC들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

쭉 이어지는 메시지들.

그중에 핵심은 역시나 아크 드래곤을 죽이거나 패퇴시키는 일이었다.

애초에 지금 적이라고 할 만한 녀석은 저 아크 드래곤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방어전 권역을 들어서자 지상에서 따로 움직이던 타이탄 역시도 에센시아 방어전 권역을 넘어 무너진 성벽을 지나왔다.

그러자 성벽에 그나마 남아있던 몇몇 병력들이 놀란 눈빛으로 타이탄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또 침략이야?!”

“으아! 몬스터다!”

“젠장! 아직 복구도 못 했는데.”

“누가 좀 막아봐!”

하.

이런.

타이탄 역시도 저들이 볼 때는 몬스터일 것이다.

그것도 그냥 몬스터가 아닌.

아크 드래곤과 맞짱 뜰 정도의 거대한 네임드 몬스터.

에센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려가 봐야겠네요.”

적어도 타이탄은 지금 공격받아서는 안 된다.

안 그래도 내구가 좋지 않은데 말이지.

온전히 아크 드래곤하고 싸우는데 집중해야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바로 재중이 형이 황실 비공정을 지상으로 내려보냈다.

하늘에서 거대한 비공정이 내려오자 병사들 대부분이 놀란 듯 고개를 들고 외쳤다.

“지원이다!”

“어느 나라지? 아직도 제대로 떠 있는 비공정이 있었어?”

“오! 정말 비공정이다! 그것도 왕실급의!”

“우릴 도와주러 온거야!”

“살았다!”

으음.

여기선 황실 비공정 크기라면 왕실급이라고 부르는 건가?

뭐 지금부터 할 일들을 생각해 보면 딱 그 정도로 생각해 주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곧장 황실 비공정을 내려서 지상에 착지하자 구심점을 찾은 병사들이 황실 비공정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가 의아한 듯 외쳤다.

“어? 저 국기는 대체 어느 나라야?”

“그러게. 난 본 적도 없는데…….”

“어디지? 넌 알아?”

“나도 몰라.”

웅성웅성.

다들 당황한 눈빛이 더 강했다.

생판 처음 보는 국기가 보이니 당황한 듯 했고.

그런 그들 사이로 비공정에서 바로 뛰어 내려가 잔잔하게 말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지?”

“……누구십니까?”

“나? 난 로가슈 왕국의 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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