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화 승자 없는 전장 (14)
“우와아아!!”
“전부 들어가!”
“밀어 붙여!!”
“다 죽여 버리라고!”
일단 성문이 열리자 연의 연합원들은 파죽지세로 거점 용아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에 상응하듯 성벽 위에서 미친 듯이 타르포들이 불을 뿜었지만 이미 열린 성문을 커버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타르포 더 날려!”
“들어오면 안 돼!”
“젠장! 어떻게든 저지하란 말이야!”
“몸으로가도 막아!”
“대체 성문은 왜……!”
그 광경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문제는 왜가 아니라.
누구인지가 문제다.
성문은 그냥 자기 혼자 알아서 열리는 녀석이 아니니까.
누군가가가 성문을 열어 주었으니 열리지.
하지만 정신이 없는 와중에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는지 일단 열린 성문을 막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패황의 연합원들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동안의 수성 경험이 많다는 걸 보여 주듯 빠르게 성문을 막기 위해 뛰어 내려왔다.
일단은 뭐 숫자가 많으니까.
확실히 이전에 단순히 오백 명 정도로 막던 것과 지금의 수천이 넘어가는 유저들이 막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꽤 빠르게 열린 성문으로 탱커들과 딜러들이 막아서며 성문을 대신해 몸으로 틀어막자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시간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문의 존재와 유저가 막는 건 여전히 큰 차이를 보였다.
몇 번의 충돌이 있은 뒤 더 이상은 막지 못하는지 성문 쪽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윽! 이젠 무리야!”
“젠장! 밀리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막으라고!”
꽤 분투를 하고는 있었지만 성문이 열린 순간부터 이건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라고 봐야겠지.
그리고 강력한 공격력으로 무장한 연의 돌격부대들이 연신 성문 대신 막고 있는 바리게이트를 두들기며 돌파하자 결국 완전히 열리게 되었다.
“뚫었다!”
“전원 치고 들어가!”
“싹 쓸어버려!”
“성벽을 차지해!”
그렇게 한 번 뚫리고 나자 병력들이 서로 얽히면서 안에서는 정말 정신없는 난전이 벌어졌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정도로.
눈에 보이는 족족 베어 넘기는 일만 가득한 전장의 모습이란 그것만으로도 구경꾼들의 환호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나와 재중이 형은 가만히 앉아서 그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 있는 유저들의 방송을 통해 아주 잘 방송되고 있었으니.
“확실히 방송이 이럴 때는 재밌단 말이지.”
“네, 다들 잘 싸우네요.”
“그래.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죠.”
이래서 싸움 구경이 재밌다고 하던 거였나.
다들 처절할 정도로 치고받는 와중에 우리는 누워서 이걸 구경하고 있었으니.
저들에게는 사활을 건 투쟁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저 유희일 뿐이었다.
“크큭, 정작 싸움을 붙인 당사자들은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는데 말이야.”
재중이 형의 그 말에 나 역시 웃어버렸다.
확실히 지금의 공성들은 원래는 있지 않았어야 하는 장면들이었다고 할까.
애초에 여기서 붙게 되는 것도 저들의 계획에는 없었던 일일 것이다.
마치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네.
전체 판을 우리가 짜고 뒤흔들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다는 것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레스는 이제 빠졌어요?”
“어, 한몫 제대로 챙겼다고 아이디 새로 팔 거라더라.”
“하하, 다행이네요.”
나중에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성문을 누가 열어 주었는가에 대해서.
그럼 당연히 누군지 확인을 해보게 될 텐데.
그때쯤 되면 이미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이미 작전을 실행한 레스와 그 부대원들은 한몫 챙겨서 흔적을 싹 지우고 난 뒷일 테니까.
“왠지 우리 악당 같지 않냐?”
“하하, 그런가요?”
그렇게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공성 전장을 구경했다.
게시판과 채팅창도 아주 활활 불타올랐고.
- 누가 이길까?
- 당연히 초월 연합이 이기겠지. 이미 뚫고 들어갔잖아.
- 그러게, 성문이 열릴 줄은 상상도 못 했네.
- 확실히 숨겨둔 한 수가 있구만.
- 지금 다른 거점도 공성 시작했다는데?
- 거긴 어때?
- 성벽도 못 뚫어서 아직. 그다지 진전이 없어.
- 헤에, 그럼 여기만 뚫린 거?
- 이쪽 지휘관 누구임? 능력 있네.
- 그러면 수성하는 패황은 능력이 없는 거고?
- 아, 맞다. 거점 지휘를 패황이 하는 중이지.
- 에이, 걔는 맨날 여기저기 쥐어터지고만 다니잖아. 전에 공성도 그렇고.
- 하긴 이번에도 똑같겠지. 기대도 안 된다.
- 혼령이 있었으면 안 뚫렸을 건데.
- 그러게, 이번에 혼령은 없나?
- ㅋㅋ. 패황이 후방으로 보내 버렸다는 썰이 있음.
- 오, 시기와 질투?
- 아마 그런 듯?
“그냥 이젠 동네북이네요.”
“패황?”
“네, 평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은데요?”
“크큭,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아, 그랬죠.”
패황은 솔직히 자기가 할 만큼은 잘 했다.
우리가 뒤에서 장난질을 치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지금은 여기저기서 패황의 자질을 의심하는 듯한 말들이 나오는 걸 봐서는 패황도 꽤 곤란할 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성문이 뚫린 뒤 이어지는 수순은 비슷했다.
패황이 성벽의 방어를 포기한 채 전 병력을 시가지로 불러들이기 시작하면서 전장은 다시 혼란으로 이어졌다.
“결국 포기하네요.”
“어, 성벽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버티면 앞뒤로 포위되어 싹 죽어버릴 테니까. 판단은 나쁘지 않아. 빠지는 타이밍도 나쁘지 않고.”
패황 자체가 능력이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시작하고서부터 딱히 뭔가 해보지도 못했는데.
게임이 이미 터져 있는.
이런 걸 당하고 나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거다.
“패황이 운이 없네요.”
거기다 공성이 이어지는 동안 연의 연합에게 연신 두들겨 맞으면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필드에서 붙으면 백이면 백 깨진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거겠지.
단순히 병력 대 병력으로 단순하게 붙으면 패황 연합의 세력은 상대가 안 된다.
그런 기세가 이어지며 계속 시가지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안쪽까지도 계속 밀리는 건 당연했다.
“가자!! 적들이 쫄았다!”
“시가지 전부 점령해!”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흐흐, 오늘 한몫 제대로 뽑겠는데?”
“다 쓸어버려!”
숫자적으로는 패황의 연합원들이 배나 차이 날 정도로 많지만.
성문이 뚫리면서부터 계속 밀리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기세가 너무 죽어 있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전쟁은 기세 싸움이라고.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쫄아서 제대로 주먹 한 번 뻗어보지 못하면 결국은 지는 싸움이 된다.
지금 패황 연합이 딱 그런 모양새였다.
물론 아예 두들겨 맞기만 한 건 아니긴 했지만.
간헐적으로 반격이 제대로 통해 이기는 곳도 분명히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싸움 몇 번 이긴다고 전쟁을 이기는 건 아니라고.”
“네, 전체 판도는 다 넘어갔으니까요.”
열 곳 정도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한두 곳은 쪽수로 어떻게 이기기는 하는데…….
딱 거기서 끝이었다.
“이미 패황은 졌다.”
재중이 형은 승패를 확신하는지 그렇게 말했고.
나 역시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중앙 크리스탈까지 몰린 패황의 연합이 마지막 항쟁을 이어가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중계가 되었다.
“확실히 숫자는 패황이 많네요.”
“어, 딱 뭉쳐놓고 보면 이쪽이 압도적으로 많겠지.”
시가지에서 죽고 죽어 뒤로 밀리다 보니 부활한 모든 병력들이 결국엔 중앙 크리스탈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 숫자가 상당했다.
연도 한 번에 밀고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숫자랄까.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꽤 지난한 싸움이 이어졌다.
누구 하나 확실히 압도하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는 패황 쪽에서는 죽어도 부활을 해서 계속 지원을 올 수 있는 반면.
연 쪽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었다.
거기다 다른 거점에서 추가로 지원이 올 수 있다는 점까지.
여기서 하나의 문제.
“패황이 혼령을 부를까요?”
“흐음, 아마도 안 부를걸?”
후방에서 지원을 하기 위해 거점 패황에 남아있는 혼령은 그야말로 놀고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르기만 하면 당장 올 수도 있을 테고.
“그래요?”
“어, 혼령을 불렀다가 전장을 뒤집게 되면 결국 그건 패황이 잘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혼령이 다 한 게임이 되겠네요.”
“패황 입장에서는 죽 쒀서 개 준 셈이지.”
“그래도 이기는 편이 낫지 않아요?”
“어, 그러니까 패황은 혼령을 제외한 다른 거점에서 병력을 끌고 들어올 거다.”
“그건 곤란할 텐데…….”
다른 거점들도 지금 전신이나 명궁 같은 애들을 힘겹게 막아내는 중일 것이다.
오히려 그쪽이 더 필사적일 수도 있고.
그런데 여기가 밀린다고 거기서 병력을 빼온다면…….
아마 이건 패황이 낼 수 있는 최악의 카드가 아닐까.
“설마 그렇게 할까요.”
“두고 보면 알겠지.”
확실히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쪽을 막으면 다른 한쪽이 터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여기를 그냥 놔두면 겉을 방어하는 세 개의 거점 중 하나가 결국 열리게 된다.
그럼 남은 두 곳의 거점도 결국은 흔들리게 될 것이고.
이젠 패황도 확실히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존심인지.
실리인지.
만약 끝까지 자존심을 챙기면…….
그렇게 전쟁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지금이 거대한 흐름의 한 분수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선택하기에 따라서 완전히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황이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오, 지원이 온다.”
그런데 부활석 쪽으로 텔레포트를 해서 넘어오는 녀석들을 보자마자 나와 재중이 형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른 거점에서 데리고 온 건가.”
“네, 자존심을 택한 모양이에요.”
물론 밀리지만 않고 막아내기만 하면.
이 방법이 패황에게는 최고였다.
하지만 연이 그걸 그냥 두고만 보진 않았다.
“오호라, 저건?”
확실히 연도 그동안 놀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나의 패를 준비해 온 것이었다.
“타르포네요?”
“어, 이 녀석 봐라. 제대로 준비해 왔잖아?”
연이 병력들 사이로 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타르포였다.
수성을 할 때 적의 많은 숫자를 녹이기 위해서 배치해놓는.
위력 면에서는 어지간한 광역기를 상회하는 최강의 수성 병기.
그걸 지금 아예 멀고 먼 성벽에서부터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애초에 수성할 필요가 없으니 거기 있던 타르포가 그대로 놀고 있었을 테니.
그것도 패황의 병력들의 방향을 향해 수십 대를 동시에 배치하는 수를 내었다.
타르포가 확실히 배치가 된 뒤.
연이 더없이 자심감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전 타르포! 쏴!!!!”
“쏴!!”
“날려!!”
“가자아!!”
콰아앙!!
콰아앙!!
쿠우웅!!
그리고 엄청난 포화 소리와 함께 수십 대의 타르포가 동시에 불을 뿜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뒤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마디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패황은…… 망했네요.”